‘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년)

세월호를 마음에 장사지낸 사람들이 세월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그날로 아들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아들의 이름자와 같은 글자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이 아버지의 인생에 짙게 드리웠다.

스물한 번의 봄을 살고,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왜. 도대체 왜.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든 것의 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었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날, 아들의 마음이었다.

방성률(1975년생)은 똑똑한 아이였다. 대학교수인 아버지 방근태(77세)와 공무원 출신인 어머니 도채숙(78세) 사이에서 모자람 없이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름에 ‘법 률(律)’자를 넣어 지은 덕분이었을까. 국립대 법과대학에 진학한 방성률을 보며, 가족들은 그가 장래에 사법고시를 보고 훌륭한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품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입대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것이 고시 공부. 군대를 먼저 다녀와서 편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얘(방성률)를 정서적으로 키우려고 피아노도 가르쳤어요. 얘는 엄마가 뭘 시키면 ‘노(No)’ 하는 게 없어요. 늘 ‘어머니, 하겠습니다’ 하지. 그래서 피아노도 곧잘 쳤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서 얘가 스스로 ‘어떤 일’이 있어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도채숙)

방성률은 1995년 3월 대학에 입학한 뒤 2주 만에 군에 입대했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그해 5월 배치된 곳은 강원 양구군 제12사단. 북한군의 땅굴 침투를 감지하는 ‘청음병(聽音兵)’으로 복무하게 됐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은 군살이 쏙 빠져 있었고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군 생활은 116일 만에 끝난다. 7월 7일,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방성률의 어머니 도채숙.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고 기나긴 자책의 세월을 건너왔다. 지난 3월 30일 대구 신천동에서 그를 만났다. ⓒ셜록

아들이 죽었다는 말. 스스로 수류탄을 터트렸다는 말. 전화 수화기에서는 상상도 못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대구에서 양구까지 먼 길을 혼이 빠진 채 달려갔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 가지 의심을 했지. 내무반에서 학대나 기합이나 몸싸움이나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고, 또는 걔가 기계 만지고 이런 것도 좀 소질이 있어서 폭발물을 호기심에 만졌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지 않겠나, 여러 가지 생각을 다 해봤어.”(방근태)

아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유서도 없다고 했다. 군인들이 쓰는 일기장인 ‘수양록’ 또한 없다고 했다. 그때 도채숙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일주일 전 가족들이 방성률을 면회 왔을 때, 그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복귀하기 전에) 같은 내무반 사람들 선물로 담배를 하나씩 사가라 했어. 그런데 아들이 내무반 인원 수보다 담배를 적게 잡는 거야. 왜냐고 물으니까 ‘다 안 줘도 됩니다’ 하더라고. 내가 그래서 사이 안 좋은 사람이 있나, 누구하고 문제가 있나, 이상했거든.”(도채숙)

경황없는 와중에도 이 사람 저 사람 오가는 이야기가 귀에 들렸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채숙은 우선 종이를 한 장 구해서, 그가 들은 이름들을 모두 적었다. 그 이름들을 ‘구타자’, ‘증거인멸자’, ‘증인’으로 구분했다. 한 장의 종이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한 장의 메모는 훗날 ‘진실’의 출발점이 된다.

연락을 받고 부대에 찾아갔을 때 여러 사람에게 들었던 것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써놓은 것으로, 나중에 생각나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 듣자마자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 확실하게 당시 부대에서 듣고 작성한 것이 맞습니다. 제가 지금 원본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평생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군사망사고규명위 도채숙 진술)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로 달려갔을 때, 도채숙은 그가 들은 이름들을 모두 종이에 적었다. 이 한 장의 메모는 훗날 ‘진실’의 출발점이 된다. ⓒ도채숙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곳은 군대니까. 믿을 수 없었지만 믿는 수밖에 없었다. 끝내 의심은 남았지만, 따지고 싸운다 해도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사건 사흘 뒤인 7월 10일,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국군현리병원(2010년 국군홍천병원으로 명칭 변경)에서 30분간의 짧은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했다.

“장례를 치르는데, 꼬깃꼬깃한 돈들을 봉투에 담아 주더라고요. 같은 내무반 사람들한테 돈을 걷었나봐. 만 원짜리도 있고 천 원짜리도 있고. ‘나는 이거 안 받고요, 돈 낸 사람들한테 다시 돌려주세요’ 하고 다시 줘버렸어요. 내가 그거 못 받겠습디다.”(도채숙)

부대에서는 장병들에게 걷은 조의금 50만 원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 병사들 월급이라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가족들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은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병사들이 아들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우리) 자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말까지 남기고 돌아왔다.

기나긴 자책의 시간이 시작됐다. 나라를 탓할 수도 없고, 죽은 아들을 탓할 수도 없고, 가족들은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일찍 가라고 해서’. ‘너무 믿고 맡겨서’. 심지어는 ‘괜히 이사를 가서’. 아무 이유도 알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이유 같았다.

“내가 (아들이 입대할 때) 나름대로 한번 버텨보라, 이런 식으로 말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못 버티고…. 내가 (군생활에 대해서) 충고도 별로 안 해주고, 더 돌봐주지를 못해서 그런 일의 원인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면서 뭔가 자책감이 생기더라고.”(방근태)

부대에서 가지고 온 것은 두 개뿐이었다. 장례식 때 쓴 영정사진. 그리고 유골함. 도채숙은 아들의 영정사진을 자신의 방에 뒀다. 영정사진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 좋다는 말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죽은 아들이 엄마한테 나쁜 짓을 할 리가 있나. 그리움은 미신보다 힘이 셌다.

방성률의 아버지 방근태. 그의 오랜 침묵은 그만큼 크고 무거운 상처 때문이었다. ⓒ셜록

유골을 뿌리는 일은 방근태의 몫이었다. 내 아들이었던 몸. 내 아들이었던 뼈. 하지만 이제 아들의 이름을 불러도 웃으며 대답할 몸이 없다. 유골함을 안고 아버지는 가슴을 쳤다.

“너무 멀리 가면 내가 나중에 찾아오기 힘들 것 같아서 집 근처 산에 뿌렸어요. 밤에 내가 혼자 들고 가서, 일부는 산에 뿌리고 일부는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도 뿌리고…. 그런데 그러고 난 다음에 한 번도 못 갔습니다. 근처까지는 가더라도 (거기는) 못 가겠더라고. 산 앞에 도로가 새로 났는데, 그 길로 지나갈 때도 그쪽은 못 쳐다보고 가지.”(방근태)

가족들이 자신을 탓할 때, 군은 죽은 자를 탓했다. 당시 부대에서는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고자(방성률)의 내성적인 성격과 지병(고혈압, 중이염, 당뇨병)으로 인한 군 복무 미적응”이라고 결론 내렸다. 1995년 8월 25일 가족들에게 ‘사망(자살)확인서’가 통지됐다.

잊으려고 살았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아버지는 앨범에 남아 있던 사진도 불태웠다. 집에 있던 아들의 물건도, 옷도 없애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이 있던 부대를 다시 찾아가본 적도 있다. 너무 아쉽고 그리워서, 근처만 맴돌다 돌아왔다.

“군에서 사망하면 학교나 이런 데는 통보가 안 가는 모양이죠? 그 이듬해에 학교에서 등록 안 하냐면서 연락이 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군에서 사망했다고 내 입으로 얘기해줬어. 잊으려고 잊으려고 하는데도, 생각도 못하는 그런 일이 생겨서 또 기억나고….”(방근태)

길을 걸으면 도채숙의 눈에는 아들 닮은 사람이 자꾸 보였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출렁, 파도가 쳤다. 아닌 줄 알면서도, 가서 한번 물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기억하는 것보다 힘든 게 잊는 것일까. 도채숙은 아무에게도 아들 이야기를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방근태 역시 입을 닫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요. 어디 ‘률’ 자만 나와도 지금도 가슴이 뛰어요. 말은 안 하지만. 아들 이름 한 글자만 봐도 가슴이 뛸 정도로 나도 못 잊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금까지 지냈어.”(방근태)

가족들이 자신을 탓할 때, 군은 죽은 자를 탓했다. 당시 부대는 사고 원인을 방성률의 ‘내성적인 성격과 지병’으로 결론 내렸다. ⓒ셜록

방근태가 어떻게든 빨리 잊어버리려 애쓴 것은 아내 도채숙의 건강 때문이기도 하다. 아들을 잃고, 도채숙은 두 차례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2017년 두 번째 수술 때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3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대로 잘못되는 게 아닌가, 가슴 졸였던 시간들. 천만다행으로 정신을 되찾은 도채숙이 맨 처음 기억한 것도 바로 ‘아들’이었다.

“잊고 살려고 노력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 노력한다고 그게 됩니까? 내가 무덤 갈 때나 다 잊어지겠지. 오늘 열 번 생각나면 내일은 아홉 번 생각나고, 한 달, 두 달 지나면 또 점점 덜 생각나고, 생각하는 횟수가 좀 적어질 뿐이지. 그래도 나는 하느님이 망각이라는 걸 우리한테 주신 걸 감사해요. 망각이란 걸 안 주셨으면 내가 살 수 있겠나….”(도채숙)

잔인한 세월, 24년이 흘렀다. 2019년 도채숙의 귀에 들려온 소식. 동생의 지인이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군사망사고규명위)’에 진정을 넣었다는 말이었다. 그 집안에도 군대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신청했다고 했다. 도채숙의 마음이 요동쳤다. 남편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노(No)’.

그 마음은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1년을 더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히 본 텔레비전 화면에 흘러 지나가는 문구가 있었다.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정 접수를 받는다는 자막 광고. 국가에서 이런 조사기구를 만들어서 나서준다고 하니 ‘이젠 되겠다’ 하는 희망이 생겼다.

“남편은 아들 이름 한 번 들으면 일주일간 밥을 제대로 못 먹어요. (진정 신청을 한다는 건) 이십몇 년 가슴에 겨우 눌러붙은 딱지를 떼는 건데… (반대할 만하죠).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원래 텔레비전을 잘 안 보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군사망사고규명위) 광고가 딱 보이더라고.

비무장지대 안에서 사고 난 걸 민간인이 어떻게 압니까? (진실을) 덮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덮지. 이거는 나라에서 해주지 않으면 개인이 하기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나라에서 이런 기회를 줬는데, 안 한다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 아들 명예회복은 시켜줘야 되지 않겠나…. 아들 죽고 나서 내가 한 게 없잖아요.”(도채숙)

도채숙은 25년 전에 쓴 메모지를 꺼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로 찾아가서 정신없이 받아쓴 이름들이 적혀 있는 그 종이 한 장. 정성껏 진정서와 서류들을 준비하고 그 메모 사본과 함께 군사망사고규명위로 보냈다. 그때까지도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1995년 여름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가는 여정은, 2020년이 돼서야 그렇게 시작됐다.

☞ 하편 <“진실을 못 보고 죽는다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독백>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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