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노쾌출(1921년생, 당시 30세)의 논. 그날도 노쾌출은 뜨거운 여름 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 논 밖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다가 6․25사변 나기 전에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죠. 면 직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서 순경들도 잘 알고 형사들도 친분이 있고 그런 사이였어요. 그런데 전쟁 터지고 한 달 정도 지나서 형사 세 사람이 아버지가 논에 일하는데 찾아와서 ‘좀 나오너라, 경찰서에 좀 갈 일이 있다’ 했답니다. 아버지가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갔다가 금방 오지 않겠나’ 하고 의심도 없이 가신 거죠. 그런데 돌아오지도 못하고, 끝이라, 그게.”
노쾌출의 아들 노원렬(1938년생)은 열세 살이었다. 형사들은 왜 아버지를 데리러 온 건지, 그래서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왜 끝내 돌아오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국민보도연맹’이란 여섯 글자에 들어 있었다.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법률에 근거한 단체는 아니지만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맡는 등 정부 주도의 관변단체였다. 1949년 4월 중앙본부를 결성한 국민보도연맹은 그해 12월 창녕군 지부를 만들었다.
창녕군 보도연맹원 수는 약 200명. 이들은 모두 ‘좌익 전향자’였을까. 실제로는 ▲공비들에게 밥이나 옷을 줬다는 이유로 가입되기도 하고 ▲과거 징역을 산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자동으로 가입되거나 ▲도장을 잘못 찍어서 가입된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가입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서, 가입하면 비료나 곡식을 주겠다고 회유해 가입시키는 일도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잠재적으로 적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전쟁 발발 직후부터 그해 8월까지 창녕 경찰은 관내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해, 창녕경찰서와 경찰서 인근 무도관(강당)에 구금했다.
당시 경찰관들의 진술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위(상부)에서 보도연맹을 소집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이며,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창녕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중)
영문도 모르고 경찰서로 간 아버지. 가족들은 면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열흘 남짓 시간이 흘렀다. 그때 할아버지 앞으로 쪽지 하나가 왔다.
“우리 아버지가 쪽지를 보냈다 카는 거라. 내용이 ‘아버지 돈을 좀 써서 나를 나가게 해주세요’ 그런 연락이 왔대. 아버지가 거기 갇혀서 보니까 돈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빠져 나가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 계속 갇혀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쪽지는 받았는데, 돈을 어디로 줘야 되는지 통로를 알아야 할 거 아이가? 면회도 안 시켜주는데…. 그래서 또 하루하루 흘러가 버려서 돈을 못 부쳤다 이러더라꼬, 우리 할아버지가. 그게 너무 원통한 기라.”
창녕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사람들은 군용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들은 다시 마산 앞바다, ‘괭이바다’로 옮겨져 총살된 후 수장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창녕읍 송현동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51명(추정자 2명 포함)의 신원을 확인했고, 전체 희생자 수는 최소 120명에서 최대 2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 사건이 한국전쟁기에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한 사람들을 불법 살해하여 집단희생되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 절차 원칙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이다.(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창녕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중)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아버지 생일날이 되면 한 그릇 가득 ‘생일밥’을 차려놓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 쪽지에 쓴 것처럼 얼른 돈을 구해서 어떻게든 전해줬다면 구할 수 있었을까. 자책만큼 큰 미련이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50년이 지나서야 아들 노원렬은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음력 9월 9일, 무주고혼이나 객사혼령을 모신다는 구구절에 제사를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원한과 그리움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노원렬의 인생에, 노력과 능력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한 벽이 놓인 셈이었다.
“(아버지에게)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다’ 낙인을 찍어가지고, 신원조회를 하면 그것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거라. 주변에서 ‘아이고 저거는 대학교까지 나와 가지고 빨갱이 자식이기 때문에 아무 데도 못 쓴다’ 그런 놀림도 받고…. 정신적으로 많이 괴로웠죠.”
열세 살 소년은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알고 싶다.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장소라도 안다면 그곳에 작은 비석이라도 세우고 싶다는 게 노원렬의 마지막 바람이다. 아버지를 위해, 또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한 할아버지를 위해 꼭 해야 할 일. 내내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노원렬의 눈이 마지막 대답에서 촉촉이 젖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와 이리 안 돌아오노… 자식을 못 보고 내가 죽는갑다…’ 하셨던 그 말씀이 가슴에 남고…. 그리고 (아버지가 잡혀가신 뒤에) 우리 어머니가 한평생 홀로 지내면서 고생하신 게, 그런 게 가슴에 남아 가지고….”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