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긴 머리 소녀’ 노랫말 중, 둘다섯, 1974년 발표)
형은 마을의 ‘연예인’이었다.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그 시절,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형의 색소폰 연주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 공연이었다. 찬송가부터 대중가요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긴 머리 소녀’도 그중 하나. 그 노랫말처럼 “말없이 가버린” 형은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으로 동생 강순구(67세)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4월 11일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이뤄졌다. 첫 질문부터 잠깐, 강순구의 눈이 젖는다. 그에게 ‘형’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아프고, 시리고, 무거운 말이었다.
강순구의 하나뿐인 형 강의구(1955년생)는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이 강순구다.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은 전남 광산군 동곡면 유계리(지금의 광주 광산구 유계동). 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저희 작은아버지들이 양계장을 했어요. 닭 사료로 주려고, 형하고 개구리나 메뚜기 같은 걸 많이 잡으러 다녔어요. 형하고 같이 들판으로 돌아다니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런 걸 잡아서 오면 작은아버지들이 잘했다고 운동화도 사주셨어요. (다른 친구들은) 고무신도 떨어진 것 신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덕분에 운동화도 신고 다니고 재미있었죠.(웃음)”
그 시절 형제 많은 집 장남들은 꼭 아버지처럼 엄하게 동생들을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의구는 쾌활하고, 정 많고, 든든한 모습으로 동생 강순구의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강순구와 형의 사이는 더 각별했다. 강순구가 바로 아래 동생이라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둘이서 방을 얻어 같이 자취를 하며 광주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성격도 참 정이 많았어요. 동생들한테도 애틋하게 잘해주고, 동네에서 놀다가 친구들하고 싸움이 나면 형이 와서 혼내주고.(웃음) (장남이라고) 엄하게 대하지 않았어요. 모르겠어요. 나중에 그렇게 빨리 가려고 그랬는지, 동생들한테 참 잘해줬어요.”
장남인 강의구에게 집안 어른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날리고 출세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타고난 재주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강의구는 어릴 때부터 기타나 퉁소 같은 악기들을 곧잘 다뤘다. 그러다 마침 밴드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그렇게 밴드부의 일원이 돼서 음악을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밴드부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때 색소폰을 본격적으로 배워서 연주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지휘도 맡아서 했다.
“할머니 회갑 때인가 학교 밴드부가 다 같이 와서 연주를 해줬어요. 시골에는 명절 때가 되면 콩쿠르 대회라고 장기자랑을 합니다. 항상 거기 와서 반주를 해줬어요. 찬송가도 많이 연주하고, 유행가는 그 시절에 인기 있던 ‘긴 머리 소녀’ 이런 것도 들려주고요.”
처음에는 음악 활동을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강의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하지 않나. 지금이나 그때나 악기는 그 값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강의구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나중에 부모님은 비싼 수입 악기까지 사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제가 보기에도 굉장히 잘했던 것 같아요. 형이 색소폰을 이렇게 들고 연주할 때 보면 정말 멋져요. 그러면서 저한테 ‘너는 절대 이거 만지지 마라, 너는 공부해야지’ 그러셨어요. 지금이야 예술가라 부르지만 옛날에는 ‘딴따라’라고 했잖아요. 저는 악기를 절대 만지지도 못하게 해서, 저는 (형과 달리) 음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자랐어요.”
강의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적인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전남 목포에 있는 클럽에서 색소폰 연주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미군부대나 클럽 등에서 활동하다가 정식 데뷔의 기회를 얻게 되는 연주자와 가수들이 많았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내고, 강의구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을 맞이했다. 바로 군 입대였다. 1976년 1월 5일 강순구는 기차역에서 입영열차를 타는 형을 배웅했다. 동생은 열차 밖에서, 형은 열차 안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도 모르고.
그해 3월 3일 강의구는 서울 노원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근무부대 군악대에 색소폰 연주병으로 전입했다. 육사 안에는 생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근무부대 병사들도 많이 있었다. 군악대는 대표적으로 육사 입학식과 졸업식 등 각종 행사에서 연주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맡게 됐으니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가족들은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남짓 지난 5월 18일. 강순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모두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산 없이 집에 오던 날. 인생의 우산 하나가 사라진 날이었다.
“그때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그날 비가 엄청나게 왔어요. 큰 도로에서 차를 내려서 집까지 가려면 한 20분은 걸어야 돼요. 우산을 못 가지고 와서 비를 추적추적 맞고 걸어갔는데, 동네 앞에서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하고 집안 당숙 한 분하고 이렇게 세 분이 나오시더라고요. 길에서 마주쳐서, 어디 가시냐 여쭤봤더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을 안 하세요. 그러다가 당숙께서, 형이 죽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형이 죽어요?’ 그렇게 되물으면서 순간 까무러쳤어요. 저는 그거밖에 생각이 안 나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집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그를 업고 집까지 옮긴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집안 남자 어른들은 서울로 황급히 길을 떠났다. 어머니 혼자 집에 남아 눈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모 집에 가 계시던 할머니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셨다. 정말인가. 정말 형이 죽었나. 강순구는 믿을 수 없었고, 또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1976년 5월 18일 오후 2시경, 강의구는 부대 안 창고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오후 1시부터 군악대 합주 연습을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 끝나도 강의구가 연주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작업도구를 정리하러 창고에 들어간 동료들이 그를 발견한 것.
당시 헌병대는 매화장보고서, 사망확인서 등을 근거로 ‘단순 자살’ 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 복무염증으로 인한 자해사망’으로 기록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떤 지휘관이 시신 처리를 빨리 안 한다고 짜증을 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할 소리냐’라며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망인(강의구)의 시신을 확인한 날 바로 화장처리 하였고, 18일에 사망하였는데 19일에 서울시립화장장에서 화장했습니다.(당숙 강○○,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매화장보고서(1976. 5. 26.)에는 당시 시신에서 “전투복 상하, 훈련화, 전투모, 런닝구, 빤스, 백색 도복끈, 현금 3000원, 개인수첩, 인식표 및 줄”이 발견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 유품도 가져오지 못했다. 죽은 지 하루 만에 화장한 형의 유골을 육사 뒷산에 뿌렸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닫았다. 집안이 온통 침묵의 바다가 됐다.
슬픔은 가슴에 묻고 원망은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형이 남들처럼 모질지를 못해서, 너무 착하기만 해서 그랬을 거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군대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하는 생각들이 흔하던 때였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개인의 존엄은 손쉽게 무시되던 시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뭐라 항의할 힘도 없었다.
“어머니가 하도 많이 울고 넋 나간 사람처럼 계서서, 제가 앞으로 잘 모실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 계속 말씀드렸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형만 살아서 돌아온다면 제가 정말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미 세상 떠난 사람을 다시 살릴 방법이 없으니까, 부모님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삭이고) 살아야 했어요. 저까지 ‘이거 억울해서 되겠습니까? 어디라도 찾아가 봅시다’ 이렇게 나갔으면 부모님은 더 많이 힘드셨을 수도 있겠죠.”
속으로 삭이겠다 마음먹었다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사람 하나를 마음에서 지우는 일인데. 입영열차에 올라 잘 다녀오마 손 흔들던 모습이 생생한데, 죽은 형의 모습을 보지도, 형의 뼛가루 한 줌 만지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 죽음을 믿을 수 있을까.
“형이 항상 꿈에 살아 있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와요. 그래서 형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만나서 ‘형 언제 왔어?’ 하고 옛날처럼 재밌게 놀다가 깨보면 꿈이고…. 한 20년 정도는 계속 그런 꿈을 꿨어요. 형이 꼭 살아 있을 것 같고, 오늘 돌아올 것도 같고 그랬어요. (형의 죽음을)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 못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동생의 마음이 이랬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그 뒤로 어머니는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지셨다. 그 충격 때문일까. 어머니의 몸에는 암이 생겼고, 큰 수술도 겪어야 했다. 가슴에 묻은 자식을 그리워하며 40여 년을 보내다, 2019년 영영 눈을 감으셨다.
사회인이 된 강순구는 한때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산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육사 가까운 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아, 우리 형이 여기 어디쯤에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육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형의 얼굴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색소폰 부는 사람이 나오잖아요? 그걸 보면 정말 채널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래도 아무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그냥 혼자 남몰래 다른 데 쳐다보고…. 지금도 유튜브 같은 걸 보다가 색소폰 연주 음악이 나오면 눈물이 저절로 나요.”
40년이 넘는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스무 살 대학교 신입생이던 강순구의 인생도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2019년 가을. 우연히 본 신문 기사 한 꼭지 때문에 강순구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라는 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애써 잊으려, 잊으려 했던 그 말, ‘진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 하편 <“실수하면 군악대 전체가 박살”… 짓밟힌 스무 살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