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편 <비처럼 음악처럼 사라진 형… 남은 건 색소폰과 ‘의혹’들>에서 이어집니다.

“2018년에 (군사망사고규명위가) 출범했을 때는 몰랐죠. 그 뒤에 뉴스에 한번씩 나오는 걸 듣고도 그냥 넘어갔었어요. (진정을 넣으면) 괜히 아픈 기억만 되살아나는 거고…. 근데 한 1년 정도 지났을 것 같은데요, 추석 때 고향 집에 다녀와서 신문을 봤는데, 구타나 가혹행위에 의한 죽음도 진상을 밝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형 사건도 입대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일어났는데, 구타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겠나’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형이 죽은 이유가 ‘단순 복무염증’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입한 지 두 달 정도밖에 안 된 신병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가혹한 일’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진정을 넣겠다 하니 아버지는 오히려 강순구를 말리셨다. 아들이 괜한 헛고생만 하게 될까 걱정하셨다. 옛날에는 군대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쉬쉬하며 살아야 했지만, 이제 국가가 직접 조사기관을 만들어서 진상을 밝힌다고 하지 않나. 강순구 역시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진정을 접수했다.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는 현실이 더 원망스러웠습니다. (…) 자살이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왜 자살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이나 사정을 제대로 듣지 못했으며, 당시 동료들에게는 접근조차 할 수 없어 아무런 말 한마디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강순구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정서 중)

2019년 10월 24일 강순구의 진정을 접수한 군사망사고규명위는 이듬해 1월 20일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국방부와 병무청 등에 남아 있는 기록물들을 입수하고, 강의구의 죽음에 대해 작은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부대 동료 등 15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400여 쪽의 조사기록을 통해, 스물두 살 강의구가 살아서 보낸 마지막 ‘두 달’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2021년 1월과 6월 두 차례 조사기간을 연장한 끝에, 2022년 6월 27일에야 조사보고서는 완성됐다. 강순구가 진정을 접수한 지 2년 8개월 만이었다.

강의구는 육군사관학교 근무부대 군악대에서 색소폰 연주병으로 복무했다 ⓒpixabay

강순구가 의심했던 구타와 가혹행위. 당시 강의구와 같은 부대에서 생활했던 많은 이들은 그 의심이 ‘사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했다. 군악대는 육사 근무부대 중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손꼽혔다. 육사는 행사가 많았고, 그중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도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 연주 중에 실수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연습 때부터 구타와 단체기합이 많았다.

신병교육 때 선임들이 정말 많이 때렸습니다. 저도 철조망을 붙잡고 탈영할까 말까 고민을 심하게 했을 정도로 정말 심하게 했습니다.(선임병 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진술 중)

기합이나 가혹행위는 자주 있었고, 제가 알던 고참은 너무 많이 때려서 병사들을 몇 명 군병원으로 후송시킨 경우도 있었습니다.(선임병 홍○○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구타도 많이 당하고, 뺑뺑이도 많이 당했습니다. (…) 연습시킬 때 많이 때렸고, 악기들이 틀리면 그날은 아주 끝장이 나는 날이었습니다.(하사관 전○○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육군사관학교 군악대는 군기가 매우 셌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도 자주 했습니다. (…) 실수를 하면 군악대 전체가 아주 박살이 났습니다.(선임병 곽○○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구타와 가혹행위 말고도 이들을 괴롭힌 것이 또 있었다. 바로 과도한 업무량. 군악대는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그만큼 악보 암기와 의복 및 장비 관리 업무도 과중했다.

군악대는 육사 근무부대 중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손꼽혔다. 육사는 행사가 많았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도 있었다. ⓒ셜록

대통령 행사에 필요한 곡이 60여 곡 되는데 군악대는 이걸 모두 외웠어야 했습니다. (…) 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행사 워커가 있고 일반 신사화가 있었는데 그 둘을 모두 반짝반짝하게 닦아 놨어야 했습니다. 그걸 병기계가 복장검사라고 하는데 아주 빡빡했고, 그게 제대로 안 되면 기합도 주고 구타, 가혹행위가 꽤 있었습니다. (…) 장교 정복, 행사 정복 등등 저희가 관리해야 하는 옷이 많았습니다. 졸병들은 선임들의 구두를 대신 닦거나 선임들의 옷을 다려주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선임병 홍○○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군악대의 본래 업무와 상관이 없는 일에도 일상적으로 동원됐다. ▲휴일 태릉골프장 수색(VIP 이용 대비) ▲육사 생도 승마훈련 후 도로 위 말똥 치우기 ▲연병장 잡초 뽑기 ▲영내 수목 관리(해충 박멸) 등에도 동원되면서, 일과시간 후와 휴일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

그러는 동안 강의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가족들이 기억하는 쾌활하고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대원들은 강의구를 “우울한 친구”, “조용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대화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군사망사고규명위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근거 삼아, “(강의구는) 구타·가혹행위가 상당한 군악대 분위기로 인해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거기에 더해 과도한 업무에 노출된 채 피로가 가중된 상태에서 이러한 고통이 남은 군 복무기간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 및 부담감으로 인해 자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라 판단했다.

군 복무 중 군악대에서 강도 높은 신병교육 중 행해진 구타 및 가혹행위와 과도한 업무가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국방부장관에게 망(亡) 강의구의 사망 구분에 관한 사항을 순직으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한다.(군사망사고규명위 결정문 중)

대체 무엇이 형을 생(生)의 낭떠러지로 내몰았는지, 46년 만에 알게 된 진실. 지금이라도 밝혀냈다는 것에 다행스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형이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면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진다.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에 품은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떠난 형.

군악대는 장교 정복, 행사 정복 등 직접 관리해야 하는 옷이 많았다. 관리 상태가 상급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지없이 구타와 가혹행위가 돌아왔다. ⓒpixabay

강순구가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또 있다. 2022년 11월 4일 국방부는 재심사를 거쳐 강의구를 ‘일반사망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숨진 사람.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딱 석 달만 빨랐더라면…. 이미 너무 오랜 세월 기다려온 아버지에겐 그 석 달도 너무 길었다.

“(순직 재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진정 접수로부터) 3년 이상 걸렸어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결과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작년(2022년) 8월에 돌아가셨는데, 11월에 결과가 나왔더라고요. 그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기왕이면 조금만 빨리 했었으면, 석 달만 빨리 됐었으면 아버님도 한을 풀고 가실 수 있었을 텐데….”

국방부가 ‘순직’으로 다시 결정함에 따라, 그의 위패를 현충원에 모실 수 있게 됐다. 현충원 이야기가 나오니, 강순구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홀가분한 감정이 얼굴에 보인다.

“(형의 위패를 현충원에 모시면) 그때는 나도 마음의 짐을 좀 걷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세대마저 가고 나면 누가 형을 기억이나 해줄까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국가에서, 국가가 있는 한 계속 기억해준다는 게, 마음이 다 편해요. 대전현충원은 원래 둘레길이 잘돼 있어서 가끔 갔는데요, 이제 현충원에 가면 찾아가 볼 데가 또 생겼네요.”

인터뷰 막바지 강순구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내놓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 국가를 위해 군대에 간 사람들은 국가의 관리 아래 복무를 다 하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처럼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실을 모른 채 한을 품고 살지 않도록, 군사망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돕는 조사기구가 ‘상설화’돼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2018년 출범한 군사망사고규명위는 5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2023년 9월 문을 닫는다. “평생 멍에를 지고서” 살아온 당사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차분하고도 무거웠다.

국방부는 재심사를 거쳐 강의구를 ‘일반사망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pixabay

“군대 가서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어야죠. 자신도 억울하고, 또 그 부모와 가족들은 평생 멍에를, 멍에를 지고서 산다고요…. 군대라는 게 폐쇄된 조직이라 (내부를)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런 일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돼요. (앞으로)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군사망사고규명위가) 이제 없어진다고 하는데, 저는 이런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위패 봉안식이 언제 열릴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지 알 수 없지만, 강순구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다. 47년 전 형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품이 하나도 없어요. 옛날에 큰 물난리가 나서 시골집이 침수됐어요. 그래서 집을 새로 지으면서 물건들이 다 없어졌어요. 형이 입대하기 전에 굉장히 좋은 구두하고, 색소폰 마우스피스 아주 좋은 걸 저한테 맡기면서 ‘네가 좀 가지고 있어라’ 했는데, 그걸 제대로 간수를 못했어요. 요즘 보니 색소폰 마우스피스는 팔대요. (봉안식 할 때) 그런 것도 넣어줄 수 있는가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음악을 제일 좋아하니까 그거(색소폰 마우스피스)라도 하나 사서, 고향 시골에 있는 흙 조금 하고 안에 넣어줄 수 있을까….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강의구와 비슷한 시기 육사 군악대에서 복무한 사람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포크 가수도 있다. 강의구 역시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계속 연주자의 꿈을 이어갔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다른 곳에서 마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멋진 색소폰 연주자를 볼 때마다, 동생 강순구의 가슴은 그래서 더 먹먹해졌다.

강의구는 영원한 스물두 살로 남았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음악으로 그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꿈 많은 청년.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긴 머리 소녀’를 다시 듣는다. 노랫말 마지막 소절이 전에 없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청년의 피우지 못한 꿈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도 ‘기도’처럼 고요해졌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긴 머리 소녀’ 노랫말)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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