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를 처음 만난 날. 한여름 매미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식당 안에서도 그 소리가 다 울릴 정도였다. 면발을 건져 올리려던 젓가락을 내려놓게 된 건 이 노무사의 그 말 때문이었다.

“지금도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다 지난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요.”(이종란 노무사 인터뷰 2023. 8. 9.)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멎은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대신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세상은 여전히 더디게 변화하고, 누군가에게는 가혹했다.

‘반올림’이 2015년 10월 29일 반도체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기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반올림

최진경 씨(48)는 2000년 1월부터 17년 8개월간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정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중 6년은 실험실과 생산라인을 오가면서 근무했다. 이 과정에서 최 씨는 화학물질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입사한 지 약 7~8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몸에 이상증상이 나타났다. 아토피. 이 시기는 그녀가 유해물질이 가득한 생산라인에 들어가던 시기와 맞물린다. 업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부서 이동을 자원하고, 2006년 1월 연구소 내 ‘사무직’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최 씨를 괴롭히던 아토피는 사라졌다.

그녀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2017년 8월 퇴사하지만, 기대는 1년도 안 돼 꺾이고 만다. 2018년 7월 최 씨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을 만나면서 자신의 유방암이 산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최 씨는 2019년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2023년 7월이 돼서야 ‘불승인’ 판정을 받는다. 말기 암 환자에게 무려 4년이나 걸려 도착한 결과는 너무도 허망했다.(관련기사 : <반도체, 말기암, 불승인… 나는 홀로 ‘마지막’을 준비한다>)

“피해자들한테 산재 인정은 곧 생계와도 연결이 되잖아요. (산재가) 인정돼야 치료비나 요양비로 안정적으로 치료하고, 약도 써보고 하니까.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이걸(피해자들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얼마 전에 (신약을 써볼 수 있는) 돈이 안 되니까, 의사가 추천하는 약을 포기해야 했어요. 신속하게 산재 인정이 돼야 피해자들도 하루빨리 안정적인 치료를 받을 텐데요.”(최진경 인터뷰 2023. 8. 29.)

4년이라는 긴 세월. 항암 치료를 이어왔지만, 암은 온몸으로 퍼졌다. 누군가의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던 그 시간 동안 근로복지공단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근로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직업성 암에 대한 요양급여 신청서를 제출하면, 공단은 간단한 서류 검토 후 업무상질병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에 사건을 넘긴다. 이때 자문위가 전문조사인 역학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안전보건공단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 혹은 근로복지공단의 직업환경연구원에 ‘역학조사(전문조사)’를 의뢰한다. 역학조사 기관은 사업주 자료 및 문헌을 검토하고, 필요 시 현장조사를 나가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한다.

최 씨가 요양급여 신청서를 제출하고 두 달이 지난 201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산보연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역학조사는 2023년 4월 역학조사평가위원회 심의를 끝으로 종료됐다. 역학조사에만 총 1442일이 소요됐다.

역학조사를 기다리는 동안 최진경 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문서로도 남아 있지 않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문제가 있던 곳이라도 ‘문제 없는 작업장’이 될 수 있잖아요.” ⓒpixabay

역학조사 보고서는 최진경 씨의 작업환경과 유방암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작성됐다. 유방암의 직업적 유해인자는 ▲산화에틸렌·폴리염화바이페닐 등 발암물질 ▲엑스선(X-선)·감마선 등 전리방사선 ▲교대근무 및 야간근무 여부다. 질판위는 이를 바탕으로 2023년 7월 17일 산재 불승인 처분을 통보했다. 유해물질 및 방사선 노출 수준이 높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첨단 전자산업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공정이나 장비가 계속 바뀌잖아요. 과거에 최진경 씨가 있었던 그 라인(스핀코터)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데, 4년 동안 뭘 조사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죠.”(최진경 씨 대리인 정익호 노무사 전화 인터뷰 2023. 8. 30.)

최 씨가 근무했던 작업장은 이미 사라졌다. 당시 현장을 기록한 자료조차 없는 상황에서 ‘사라진 라인’을 조사하는 데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법은 산업재해보상보험 사업을 시행하여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며,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 복귀를 촉진하기 위하여 이에 필요한 보험시설을 설치·운영하고, 재해 예방과 그 밖에 근로자의 복지 증진을 위한 사업을 시행하여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장 제1조)

역학조사에 걸린 시간 4년. 암 환자인 그녀에게 4년이란 시간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신청 당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던 그녀는 ‘불승인’ 판정이 나온 2023년 7월, 간 기능을 거의 상실한 4기 유방암 환자가 됐다.

최 씨처럼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산재 신청자에게 시간은 곧 생명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운영 규정에는 ‘180일 이내에 조사를 마무리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는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부족하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역학조사 평균 소요일수는 2022년 기준 550.6일이다. 그러나 최 씨에게 소요된 시간은 1442일(역학조사 의뢰 접수 이후 역학조사평가위원회 심의까지)로, 약 2.6배는 더 기다린 셈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 보도자료를 통해 역학조사 지연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조사 인력이 부족하고, 제도가 미비하여 늘어난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 이어 “동일·유사사례가 있는 경우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역학조사 결과 업무관련성이 높다고 평가된 사건은 질판위 심의를 생략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올림은 2016년 10월 7일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방진복 퍼포먼스와 문화제를 진행했다 ⓒ반올림

과거 고용노동부는 역학조사 지연 문제 해결을 위해 산재처리 절차를 개선한 바 있다. 고용노동부는 2018년 반도체산업 작업자 산재인정 처리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의 ‘추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업무관련성이 인정된 선례가 있을 때, 그와 동일·유사 공정 종사자에게 직업성 암이 발생한 경우 역학조사를 생략하겠다는 것.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추정의 원칙’ 도입으로 역학조사가 생략된 것은 2022년 기준 2111건 중 1466건으로 69.5%에 달한다.

그러나 최 씨는 역학조사 생략 대상에 들지 못했다. 기준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유방암에 걸린 노동자가 역학조사 생략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생산 라인에 있는 ‘오퍼레이터(생산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연구원으로 실험실과 생산 라인을 오가며 근무했기 때문에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삼성디스플레이 천안공장에서도 최 씨처럼 유방암으로 산재 신청을 한 고(故) 여귀선 씨가 있었다. 그녀는 7년간 삼성에서 근무했고, 이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산재 신청을 했지만, 1년 8개월이 넘도록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산재 승인 결과를 받아보기 전 눈을 감았다.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한 뒤 결과를 받아보기 전에 사망한 노동자는 최근 5년간 111명에 달한다.

“산재 처리가 지연되다 보니까 ‘어쩌면 나도 산재 승인받기 전에 죽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과연 결과를 못 보고 쉽게 눈감을 수 있을까? (…) 그러다 보면 먼저 떠난 사람들 심정에 이입하게 되는 거죠. 저한테도 그게 더 이상 남 일, 뉴스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니까요.”(최진경 인터뷰 2023. 8. 29.)

4년 4개월 만에 나온 산재 불승인 판정. 그녀는 선택의 기로 위에 서 있다. 불승인 판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넣는 것, 혹은 이번에 나온 결과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 있다.

산재 ‘불승인’ 이후에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최진경 씨와 같은 암 환자들에겐 그것 또한 좋은 대안이 아니다. ⓒ연합뉴스

법원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박민숙 씨는 최진경 씨와 마찬가지로 유방암에 걸렸다. 그녀는 유해인자 노출 수준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2019년 박 씨의 유방암을 업무상 질병으로 판결했다.

동일한 사례에 대한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이 다른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이종란 노무사는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인정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최종 판정하는) 질판위 인적 구성이 대부분 의사 중심이에요. 의학적 증명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의심은 있는데,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으면 ‘불승인’ 판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법원은 의학적 증명보다 여러 사정을 종합해서 사회통념상 합리적으로 추단되는 정도, 즉 ‘사회적 인과성’에 중점을 둬요. 그래서 질병을 유발할 만한 환경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확인되면 ‘인정’ 판결을 내리는 거죠.”(이종란 노무사 인터뷰 2023. 9. 23.)

최진경 씨의 경우 작업장에 유해물질이 있다는 것은 확인됐다. 니켈과 같은 1급 발암물질이 있다는 사실이나 방사선에 노출된 사실은 역학조사 보고서에도 포함됐다. 그러나 질판위는 ▲유방암의 유해인자로 구분되는 산화에틸렌, 폴리염화비페닐 함유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고, ▲암을 유발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의 판단을 통해 산재을 인정받는 것에도 절차상 큰 어려움이 있다. 법원에 ‘산재 불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 즉, 피해자는 산재 신청을 넣고,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불승인’ 판정을 받은 뒤에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뒤집어진’ 판결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관문을 더 거치는 동안 얼마나 긴 시간이 또 흘러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유방암 말기 환자인 최진경 씨가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 최근 그녀는 조금씩 삶의 흔적을 지워내는 중이다. 부모님에게 병증이 악화되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대신, 살던 집을 내놓고 그녀에게 귀속돼 있던 짐을 하나씩 덜어냈다.

반올림에서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온 이종란 노무사(왼쪽). 사진은 2021년 6월 21일 태아산재 입법 촉구 기자회견. ⓒ반올림

“그동안(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과 반올림이 싸워온 세월 동안) 변화는 있었죠. ‘추정의 원칙’이 도입되고, 삼성이 (직업병) 근로자에게 보상하는 변화도 있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산재로 싸우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아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꼭 여럿 죽어야만 (제도가) 변해요.”(이종란 노무사 인터뷰 2023. 9. 23.)

이종란 노무사는 ‘추정의 원칙’이 여전히 2018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패스트트랙이 도입됐지만, 적용 대상이 되지 못해 산재 승인을 기다리다 사망한 사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사례들을 살펴보고, 제도 또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것. 이 노무사는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 “역학조사 지연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뿐더러 고용노동부의 업무 가중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어 “대안적 지침이 아닌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이 필요한 시기”라며, ‘선보장 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는 역학조사 지연 방지에 그 목적이 있다. 역학조사 기일을 180일로 설정하고, 그 기한을 넘기면 피해자에게 일단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선보장 제도가 포함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지난 27일 국회에 발의됐다(더불어민주당 우원식 국회의원). 개정안에는 대법원 판결과 같이 “의학적·자연과학적 관점이 아닌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산재 인정 기준을 명시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최진경 씨 ⓒ셜록

최 씨는 4일 예정된 ‘산업재해국가책임제 도입 촉구 기자회견’ 참석을 약속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직접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지는 현실의 벽 앞에 부딪혔다. 온몸으로 퍼진 암세포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 씨는 지난 2일 다시 한 번 입원했다.

“의지와 현실은 많이 다르네요. 현재 제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최진경 씨가 이종란 노무사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일부)

화학물질을 다루는 연구원으로 살았던 시간 6년, 유방암 3기 판정 이후 투병 생활 5년, 산재 불승인 판정까지 4년.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이런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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