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최진경 씨도 이젠 웃을 수 있을까. 4일 국회에서 산재 판정 지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우원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노원구을)과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 및 산재 피해 노동자·가족들은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산업재해 선보장을 통한 ‘산재국가책임제’ 실현을 촉구했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직업병 피해자에게 시간은 곧 생명이다. 과거 삼성 반도체 노동자 고(故) 황유미 씨와 그 동료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반올림’이 결성됐다. 그 이후로도 15년째 산재 처리 지연 문제는 반복해서 제기되고 있다.

4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재해 선보장을 통한 국가책임제 실현 촉구 기자회견’. 왼쪽부터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우원식 국회의원, 이종란 노무사, 문은영 법률사무소 문율 변호사 ⓒ셜록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부터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최진경 씨의 이야기를 통해 산재 처리 지연 문제를 지적해왔다. 최 씨는 2000년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해 17년간 근무했다. 이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2019년 3월 산재 신청을 했다. 그리고 4년 4개월이라는 오랜 기다림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7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관련기사 : <반도체, 말기암, 불승인… 나는 홀로 ‘마지막’을 준비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직접 피해자 발언을 할 예정이었던 최진경 씨는 현장에 나타나지 못했다. 온몸으로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간과 신장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편지로 대신 전했다.

최 씨는 “그때(최 씨가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던 시기) 연구소 안전이란 아무것도 없었다”며, “여러 화학물질들을 직접 손으로 다뤘고, 엑스선 장비도 사용해 속이 메슥거리고 아토피 증세가 심해졌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2019년 3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넣었으나, “1~2년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산재 판정이 나오기까지는 4년 4개월이나 걸렸다. 결과마저 ‘불승인’. 그 사이 최 씨의 암은 4기로 진행됐다. 최 씨는 “퇴사하기 전 이미 폐기된 개발라인 업무를 조사하느라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근로복지공단의) 인력 부족을 떠나 직무유기 같다”고 지적했다.

“산재 인정을 받으면 치료비와 생계비에 보탬이 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제 몸 상태가 당장 하루 앞을 장담하기가 힘듭니다. 꼭 산재법이 개정되어 더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최진경 씨가 쓴 편지 중)

기자회견에 참석한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황유미 씨의 죽음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셜록

산재 처리 지연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건 최진경 씨뿐만이 아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삼성전자 엘시디(LCD)공장 기흥사업장에 19살의 나이로 입사해 5년 9개월간 일하고, 퇴사한 지 4년 만에 뇌종양 확진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였다.

그녀는 산재 승인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 법원과 다툼을 이어갔다. 7번의 불승인 끝에 2019년 5월 뇌종양 질환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았다. 처음 산재 신청을 한 지 10년 만이었다.

한 씨의 곁을 지킨 어머니 김시녀 씨는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늦장 행정과 불승인 처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남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삼성을 위해 일하다 아픈 것이었는데, 개인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치료비와 생계비를 마련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덧붙여 산재 인정은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사회보험”이라며, “경제적 고통을 줄여줄 수 있도록 신속하게 더 많은 피해자들의 산재가 승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혜경 씨가 뇌종양으로 휠체어를 타는 순간부터 그녀의 뒤에는 엄마 김시녀 씨가 함께했다 ⓒ셜록

이종란 노무사는 “반올림이 오래도록 싸워왔지만, 높은 산재 인정의 문턱 때문에 여전히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피해자들이 많다”며, “‘신속한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법 제1조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우원식 의원은 지난달 27일 ‘산재국가책임제’로 대표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개정해 역학조사 법적 기간 초과시 산재 ‘선보장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자회견에서 우 의원은 “역학조사 방법·조사·기간 등을 법정화하겠다”고 제안 목적을 밝혔다. 이어 “최근 5년간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사망한 산재 피해 노동자가 111명이나 된다”며, “국가가 산재 규명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국가가 책임지고 먼저 보상하여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의 개정안에는 역학조사 기한을 180일로 설정하고, 그 기한을 넘기면 피해자에게 일단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우 의원은 “일하다가 다친 노동자들을 위해 국가 재정이 운영되는 것이 마땅하다”며, “산재법 제92조 근로자복지사업 항목에 ‘선보장제도’를 넣어 이번 정기국회에 법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계획을 밝혔다.(관련기사 : <‘사라진 라인’ 조사에 1442일… 말기암 환자의 死라진 시간>)

우원식 의원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산재국가책임제 도입 역시 최우선 문제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셜록

한편,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이강산 반올림 활동가, 시이석 노무사, 이종란 노무사, 정익호 노무사, 조승규 노무사, 문은영 변호사, 우원식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최진경 씨가 쓴 편지 전문]

저는 현재 암이 온몸에 퍼져 잘 걷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몸 상태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으로 신약을 써보기 위해 기다리는 중인데, 간과 신장 상태가 나빠져 급히 병원에 입원합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2000년에 입사해 17년을 일하다 퇴사했습니다. 그리고 퇴사한 다음해인 2018년에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산재가 의심되었습니다. 기흥연구소에서 6년간 LCD용 핵심 소재인 감광제(포토레지스트) 개발업무를 했는데, 그때 여러 화학물질들을 직접 100% 손으로 다뤘고, 엑스선 장비도 사용했습니다. 검붉은 감광제(PR)를 빠르게 회전하는 스핀코터에 뿌리며 작업을 할 때에는 거의 그 안에 빠졌다 나오는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고, 피부 아토피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그때 연구소 안전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최진경 씨 ⓒ셜록

2019년 3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는데 예상과 달리 역학조사가 지연되었습니다. 1년만 기다리면 되겠지 싶었는데 기약 없이 2년이 지났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지 했지만, 그 사이 암은 온몸에 퍼져 말기가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조사하느라 4년이 필요한 것인지요. 제가 퇴사하기 전에 이미 폐기된 개발라인 업무를 4년간 조사했다는 것인가요. 인력부족을 떠나 직무유기 같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판정위원회가 열린다고 하여 힘들게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승인’이라는 답을 정해놓은 듯, 4년을 끌어 부실한 역학조사에 기대어 제대로 업무내용 파악도 되지 않은 판정위원들에 의해 불승인 판정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용한 수많은 화학물질과 모든 방사선 설비에 대해 조사도 못하고 4년을 끌더니 납득할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불승인되었습니다.

산재 인정을 받으면 치료비와 생계비에 보탬이 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제 몸 상태가 당장 하루 앞을 장담하기가 힘듭니다. 꼭 산재법이 개정되어 더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취재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사진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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