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쏟아졌다. 비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나뭇잎과 우산을 쓴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잿빛 하늘 아래 죽음과 삶이 교차했다. 최진경(48) 씨는 이따금씩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 챙에 가려 그녀의 눈이 무얼 쫓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온기가 남은 커피잔만 매만졌다.

그 시절 ‘우산’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해물질 가득한 연구실에서 그녀를 지켜 줄 ‘우산’이 있었더라면 최 씨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까. 야속하게도 그녀에게 주어진 건 얇은 마스크 한 장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그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문서로도 남아 있지 않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문제가 있던 곳이라도 ‘문제 없는 작업장’이 될 수 있잖아요.”

‘문제의 작업장’에서 6년간 일했던 최 씨는 4기 유방암 환자다. 그녀는 몸에 퍼진 암을 일하다 생긴 질병으로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 씨는 23년 전 근무했던 작업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지난달 29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최진경 씨를 만났다. 어느덧 유방암 말기 환자가 된 그녀는 자신을 통증을 못 느끼는 ‘무통초인’이라고 소개했다. ⓒ셜록

그녀는 2000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 입사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을 이용해 반도체·LCD 공정 과정에 참여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작업장에는 각종 화학물질과 발암물질로 가득했다.

그녀는 IPA(이소프로필알코올), 아세톤 등 화학물질이 담긴 세정제에 손을 담그고, 발암물질로 알려진 니켈이 분사되는 작업대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가끔 밤새 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거의 화학물질에 빠졌다 나오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작업장에 유해물질은 가득한데 창문이나 환풍기 하나 없었어요. 유해물질이 외부로 노출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밀폐를 해 둔 거죠.”

삼성 또한 누출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실험실에 밀폐력 높은 터닝도어를 설치해 공기 노출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이 망각한 이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연구원들. 외부보다 노출 위험이 높은 이들이 그 안에 있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안전 장비라곤 덴탈 마스크 한 장이 전부였다.

“제가 당시에 차를 몰고 출퇴근했는데, 동탄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진입하면 벌써 ‘그 냄새’가 나요. 그걸 단순히 독하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고… 메스껍다고 해야 될까요.”

출근길부터 따라다닌 ‘그것’은 얇은 마스크로 다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속이 미식거릴 정도”로 독한 냄새에 업무 중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몸에 나타난 거부 증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토피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입사 전에도 아토피는 이따금씩 그녀를 괴롭혔지만, 입사 이후에는 정도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참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지만, 약효는 잘 듣지 않았다. 묘한 건 아토피가 발현되고 악화된 시기는 그녀가 화학물질이 있는 라인에 들어가기 시작한 그 시점과 맞물린다는 점이다.

최 씨가 일한 작업장은 경기 용인시 기흥구에 있었다. 이미지는 경기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 반도체 공장의 전경. ⓒ주용성

작업장에 유해물질이 가득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회사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한 건 아니고, 제가 그쪽 직무를 전공했기 때문에 알았죠. 그래서 몸이 나빠질 때(아토피가 심해질 때) 당연히 이 환경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어요. 더는 안 되겠더라고요.”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발진 때문에 더 이상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작업 환경을 바꿔달라고 요청해 2006년 1월 연구실에서 벗어났다. ‘사무직’ 연구원이 되자, 그동안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아토피는 언제 그랬냐는듯 종적을 감췄다.

이후 최진경 씨는 2017년 8월 삼성전자에서 퇴사하며 제2의 삶을 꿈꿨다. 권위적인 상사와 불규칙한 야근으로부터 해방되자 오래도록 앓고 있었던 위염도 사라졌다. 그녀는 은퇴 후 실내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고, 인테리어 산업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러던 2018년 7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들이찼다.

“유방암 3기입니다.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최 씨의 가슴에 조용히 자라고 있던 종양은 3기가 돼서야 발견됐다. 그러나 그녀는 의사의 말에 낙담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왜 내 몸에 암이 자랐는지 돌이켜보기보다 하루빨리 치료받아 일상으로 회복하기만 바랐다.

“‘삼성에서 일한 것 때문에 (암까지) 생긴 걸까’ 하는 생각도 못했죠. 아마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그럴걸요. 현장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바로 산재를 떠올리기는 어렵잖아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4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 근로자의 질병에 대해 지원·보상한다’는 뉴스가 최 씨의 눈에 띄었다.

2013년 8월 19일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인정 촉구에 동참해달라며 시민들에게 탄원서를 받는 활동을 했다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민권지킴이반올림

그 배경에는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의 11년간의 투쟁이 있었다. 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 씨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고, 비판 여론에 직면한 삼성은 11년 만에 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최진경 씨는 곧장 지원·보상 신청을 했고, 보상 지원금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최 씨의 마음속에 ‘자신의 암이 산재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반올림의 도움으로 2019년 3월에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을 했다.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사실 저는, 제가 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통증도 별로 없었고, 의사 선생님 말과 다르게 여명(餘命, 남은 수명)도 계속 부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4기 진단을 받고서는 ‘아, 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구나. 순리대로 가려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녀가 착실하게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암은 계속해서 자랐다. 결국 3기 진단을 받은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4기 진단을 받는다.

인터뷰에 앞서 그녀는 가방에서 진통제를 꺼내 입에 털어넣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도 벌써 5년. 약은 여덟 번 바뀌었다. 수술도 할 수 없는 말기 암환자에게 앞으로 남은 건 비급여 신약뿐이다. ⓒ셜록

직업도 없이 의료비만 지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산재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여덟 차례 약을 바꿨다. 이제 그녀에게 써볼 수 있는 약은 신약뿐이었다. 의사는 “이 약도 듣지 않으면 다른 약이 없을 것 같다”며 2400만 원짜리 신약을 소개했다. 산재가 인정되면 휴업급여(근로자 평균임금에 70%에 해당하는 금액)로 약값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런 최 씨가 말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따로 있었다. 그건 지연되는 산재 인정도,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도, 비싼 약값도 아니었다. 가족들에게 악화되고 있는 몸 상태를 알려야 한다는 것. 앞으로 3개월, 길면 6개월 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내 입’으로 가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부모님은 잘 모르세요. 친언니한테만 사실대로 말하고, 부모님한테는 간에 전이가 돼서 4기 진단을 받았다고만 이야기했어요. 며칠 전에도 의사 선생님이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며,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암환자한테는 치료받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지난 7월 산재 판정 결과가 나왔다. 신청 이후 약 4년 만에 나온 결과. ‘불승인’. 내일을 장담하기 힘든 말기 암 환자에게는 시간도 다르게 흐른다. 최 씨가 산재 판정을 기다리며 보낸 4년은 얼마나 길고 잔인한 시간이었을까.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최 씨 몸에 있는 유방암을 업무상 발생한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녀는 ‘최후의 보루’가 된 신약을 결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최 씨는 오래도록 모아둔 예적금 통장들을 해지했다.

“저는 사실 (산재로 인정될 거라는) 큰 기대 없었어요. 2년 안에 결과가 나올 거라고 했지만 그 판단이 늦어졌을 때나, 4년 만에 불승인 판정이 나왔을 때나. 회의장에 들어선 순간 알겠더라고요. 산재 판정 심사위원들이 이미 다 결정하고, 형식적으로 회의만 하는구나 싶었어요.”

업무상 질병판정 위원회에 다녀온 날이었다. 위원들 앞에서 유방암이 ‘직업성 암’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장 분위기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심사위원들은 그녀가 준비한 발표를 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질문도 하지도 않았다.

“역학조사를 한 사람들이 공신력 있으니까 (심사위원들이) 그 사람들의 자료를 더 믿는 거죠. 첨단전자 산업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공정이나 장비가 계속 바뀌잖아요. 과거에 내가 있었던 그 라인(스핀코터)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데, 4년 동안 뭘 조사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죠.”

최 씨 사건을 맡은 정익호 노무사는 역학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역학조사는 근로자의 질병과 작업장의 유해요인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조사다. 정 노무사는 “‘존재하지 않는 작업장’을 조사하며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역학조사 장기화는 피해자들의 구제 시기를 늦춰버린다. 최 씨와 비슷한 시기 삼성 반도체 천안캠퍼스에 입사한 고(故) 여귀선 씨가 있다. 그녀는 7년을 삼성에서 근무했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산재 신청을 넣었지만 1년 8개월이 지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산재 승인을 받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4개월이 지난 뒤, 근로복지공단은 그녀를 산재 피해자로 인정했다. 최 씨는 이러한 일이 자신의 미래가 될까봐 걱정했다.

반올림은 2016년 10월 7일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방진복 퍼포먼스와 문화제를 진행했다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민권지킴이반올림

산재 판정 처리 지연은 오래된 문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내부 지침에는 ‘180일 이내에 조사를 마무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는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다.

고용노동부에서는 2018년 반도체·디스플레이 종사자에 대한 산재인정 처리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의 지침을 도입했다. 직업성 암(백혈병·다발성경화증·재생불량성빈혈·난소암·뇌종양·악성림프종·유방암·폐암)에 걸린 경우 비슷한 공정에서 종사한 사람이라면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역학조사를 생략하겠다는 것이다.

최진경 씨 또한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에서 근무한 유방암 환자다. 그러나 해당 지침이 그녀에게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인정 기준이 협소하기 때문. 역학조사 생략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생산 라인에 항시 서 있는 ‘오퍼레이터’ 직무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실과 생산 라인을 오가는 ‘연구원’이라는 점에서 대상이 되지 못했다.

직업성 암에 대한 협소한 기준은 역학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질병판정위원회가 인정하는 유방암 산재 인정의 기준은 크게 ▲야간·교대근무 여부 ▲유해물질 노출 빈도·수치 ▲방사선·저주파 노출 빈도·수치 정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최 씨의 경우 야간·교대근무 수행이 인정되지 않고, 유해물질·방사선·저주파 노출량이 적다는 이유로 직업성 암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 씨처럼 기준에 해당되지 않아도 인정된 사례가 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이 아닌 법원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았다는 특징이 있다.

4년 만에 나온 불승인 판정. 최 씨는 소송 혹은 심사청구의 기로에 놓여 있다. 심사청구는 산재 불승인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 과정. 소송이나 심사에 얼마나 긴 시간이 더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말기 암 환자인 그녀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지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인터뷰 내내 최진경 씨는 왼쪽 쇄골 부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통증. 진통제도 듣지 않았다. 정밀검사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괴롭힘. 과연 그녀에게 ‘기적’이 찾아올 수 있을까. ⓒ셜록

“기자님, 저 내일이랑 모레는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최진경 씨와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다. 맛집 탐방과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여유로운 식사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만 사는 그녀에게 모레는 어쩌면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을 작정이라고 했다. 내일은 집을 청소하고, 이튿날에는 중개인이 집을 찾아올 거라고. 그녀는 최근 10분만 청소해도 숨이 가빠 쉬어가는 시간이 늘었다고 했다. 최 씨는 어느덧 청소하는 데 하루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됐다.

그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부모님이 계신 서울에서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집을 파는 건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이 전부 ‘순둥이’라 그녀가 없으면 집을 매매하거나 관리하는 방법도 잘 모를 거라고.

카페를 나서는 최 씨는 우산을 펼치는 대신 지팡이처럼 짚었다. 자꾸만 기우는 몸을 한 손에 꼭 쥔 우산에 지탱했다. 이슬비에 옷이 젖어갔다. 빗물에 최 씨의 자취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걸어갔다.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성실하게. 순박한 가족들을 위해 조금씩 자신의 시간을 지워갔다. 그녀가 없는 삶을 ‘스스로’ 준비하면서 말이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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