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구금되면서 서울구치소의 3평 독방 구조와 식단이 연일 뉴스에 나왔다. 그 소식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국선전담변호인으로 만나온 무수한 ‘법무부의 자식’이 떠올랐다. 그 중 한 여인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다.
물건 전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20대 여성이었다. 몸이 거구였고, 대화를 해보니 지적장애가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아르바이트가 보이스피싱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면서 모든 잘못을 인정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학업은 중학교에서 끝났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홀로 살았다. 공장에 다니고 빵집에서도 일했다. 더운 날은 물론 추운 날에도 걸어서 물건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억척같이 성실하게 일을 하다 보이스피싱 범죄 끄트머리에 물리고 말았다.
보이스피싱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여서 몸통 조직이든 휘말린 아르바이트생이든 엄벌에 처해진다. 그녀는 긴 징역살이를 피하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성폭력 가해자 아버지와는 예전에 단절했으니, 그녀에겐 가족이 없는 셈이다.
구금시설 밖에 피고인의 가족이 있으면 변호인은 그들에게 탄원서 등 양형자료를 받는다. 하지만 이 피고인처럼 가족이 없으면 구치소 내 생활의 어려움이나 건강, 빈곤 정도를 물어 양형사유로 써서 재판부에 내곤 한다. 구치소 접견실에서 만났을 때 그녀에게 물었다.
“영치금 얼마 있어요?”
“이천….”
뇌가 쉬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네? 이천만 원요?”라고 되물었다. 피고인이 고개를 흔들며 수줍게 말했다.
“아니요. 이천 원요. 우표랑 종이 살 돈이 없어서 방 사람들한테 신세 져요.”
그제서야 그녀의 발을 유심히 바라봤다. 역시,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영락없이 ‘법무부의 자식’이었다.
법무부 교정본부는 구치소나 교도소에 입소한 사람에게 의복, 이불, 칫솔 등 기본적인 관급물품을 지급한다. 그것 말고는 모두 입소자 자비로 구매해야 한다. 영치금이 없는 사람들은 ‘자비부담물품’을 구매할 수 없고 오로지 관급물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법무부의 자식’, 줄여서 ‘법자’라고 한다. 법조계와 구금시설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같은 방에 ‘법자’가 있다는 것은 다른 수용자에게 민감한 문제다. 재소자들은 영치금을 갹출해 공동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간식과 부식 등 음식물을 사서 나눠 먹기 때문이다. 돈을 낼 수 없는 법자가 방에 있으면 일인당 지출 비용이 증가한다.
그렇다고 법자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법자가 비누 떨어졌다고 씻지 않거나, 여벌이 없다고 속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그 좁은 방에서 냄새와 위생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좁은 곳에서 함께 사는 이상 법자를 어떻게든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구금시설을 연민과 상부상조의 정이 넘치는 곳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구치소, 교도소 안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다. 돈이 있으면 그 안에서 편의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종합비타민을 영치금으로 살 수 있고, 시력이 떨어지면 의료과에서 안경을 맞추고, 허리보호대를 해가며 건강관리도 가능하다.
식사시간마다 배급되는 음식에 입맛대로 부식을 추가 구매해서 먹을 수도 있다. 참기름과 고추장, 참치, 소시지를 추가로 구매한다면 반찬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스킨로션 등 화장품은 법무부에서 지급하지 않지만, 돈이 있으면 자비로 구입해서 피부관리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위생조차 지키기 어렵다.
남의 영치금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법자들은 대개 그 대가를 치른다. 나의 피고인 중 법자들은 다른 수용자들의 설거지,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변기청소를 대신 하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수용규칙 위반 사항을 대신 뒤집어쓰는가 하면, 다른 수용자의 몸을 주무르거나 근육을 풀어주는 안마를 하기도 했다.
수용시설 혼거실에서는 각자의 자리 위치가 밖에서 땅 사러 다니는 사람이 판단하는 입지조건 못지 않게 중요하다. ‘뺑끼’라 불리는 변기통 근처는 밤에 화장실 가려는 사람이 발을 밟기도 하고, 냄새도 나며,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어 기피하는 곳이다. 주로 신입의 자리지만, 방에 법자가 있다면 뺑끼 앞은 그의 몫이다.
변호사 생활 20년 중 10년을 국선전담변호인으로 살았으니, 내가 첫눈에 법자 여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법원에 반성문을 내지 않거나, 자비로 운동화를 구매해 신고 있는 다른 수용자와 달리 관급 고무신을 신고 있으면 거의 100% 법자다.
종이, 펜, 우표도 자비로 사야 하기 때문에, 반성의 뜻도 돈이 있어야만 재판부에 전달할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의 징역은 돈이 있는 사람의 징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결코 같은 형벌이 아니다.

가진 돈이 2000원뿐이어서 고무신을 신고 있는 나의 피고인을 다른 재소자들이 노예처럼 부려 먹거나 괴롭히는 건 아닌지, 첫 접견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녀에게 구치소 방 사람들이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구매 물품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그녀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다들 정말 잘해주세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과거 웹툰작가를 꿈꿨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 혼자 보낸 외로운 시간들이 그녀의 그림 실력을 키워주기도 했다. 동료 재소자들은 가족이나 지인에게 서신을 보낼 때, 편지 봉투와 편지지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나의 피고인은 그 대가로 동료 재소자들에게 종이를 받고 펜을 빌렸다. 그렇게 얻은 것들로 재판부에 반성문을 내고 변호인인 내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구치소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집도 가족도 없고, 전 재산이 2000원뿐인 나의 피고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구치소 민원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에게 약간의 영치금이라도 넣어주려면 먼저 민원실에서 지인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혀, 뭐 하러….’
나는 고개를 흔들며 사무실 방향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출소하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풀죽은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뒤돌아 민원실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또 사무실로 방향을 틀고.. 그렇게 휙휙 방향을 바꾸다 보니 옛날 개그맨 배삼룡과 구봉서가 추던 그 춤을 한여름 땡볕 아래 구치소 앞에서 내가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나는 그 옛날의 춤을 멈추고 민원실로 향했다. 지인등록을 하고 나의 피고인에게 약간의 영치금을 넣어줬다. 며칠 뒤 그녀에게 편지가 왔다.
접견 중 그녀의 성폭력 피해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가족이라고 꼭 다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해줬는데, 그것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떠난 죄책감도 내려놓았다고 했다. 내가 영치금을 넣었다는 걸 알고 엉엉 울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림도 그려서 보냈다. 여전히 종이 한 장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처지인지, 그녀는 한 사람의 얼굴을 편지봉투 두 개에 나눠서 그렸다. 편지봉투를 나란히 맞춰보니 마침내 드러난 한 소녀의 얼굴. 혹시라도 어긋날까봐 선 하나하나를 신중히 그렸을 그녀의 조심스러운 몸짓을 생각하니, 이번엔 내가 엉엉 울고 싶었다.
며칠 뒤 출근길,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걷는 것도 힘들었다. 사무실로 향하는 인도에 한 노인이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사세요”라는 글귀를 적어놓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직접 뜯은 듯한 네 잎 클로버가 시든 상추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그 노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도 빨리 지나쳤다. 그러다 멈칫했다.
‘행운을 팔고 있는 행운 없어 보이는 저 노인도, 네 잎 클로버가 다 팔리면 행운이겠지?’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가 당장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선물했다. 장기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도움이나 행운도 그 사람에겐 한고비를 넘기는 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나의 피고인에게 영치금을 준 것은 그녀의 인생에 늘 나쁜 일과 불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작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선전담변호사는 사건을 선택할 수 없다. 소속된 법원과 재판부가 정해져 있고, 법원에서 사건을 배당해준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과 장애인, 소년, 70세 이상의 시민, 구속됐으나 변호인이 선임돼 있지 않은 사람을 주로 변론한다.
나에게 오는 피고인들은 대부분 법에 무지하지만 평범한 사람, 사건 당시 경솔하기는 했지만 이내 후회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흉악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 없는 사람도 있다.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피고인’들은 대체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 하지만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했다고 모두가 피고인이 되는 건 아니다. 잘못을 했어도 수사기관에 걸리지 않거나, 고소를 당하지 않거나, 자신의 잘못을 숨기거나 해결할 능력이 있으면 피고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
나의 피고인 그녀에게 성폭력 아버지가 아닌 자상한 부모가 있었다면, 혹은 우리 사회가 세상 물정은 몰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먹고살 수 있는 곳이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녀는 자기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우리가 변호인과 피고인으로 구치소 접견실에서 만난 건 그 때문이다. 이런 만남을 숱하게 겪은 나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많은 점이 연결돼 선이 되듯이, 사람은 누구나 지난 서사의 결정체이다.
성장을 돕고 기다려주는 어른이 곁에 있어 지난 서사가 조금만 평탄했다면, 나의 피고인은 지금쯤 좋은 글과 그림을 그리는 웹툰작가로 성공하지 않았을까.
국선전담변호사인 내가 사건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번 연재를 통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