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주말 저녁. 휴대폰 액정 화면이 번쩍였다. 엄마였다.

‘지웅아, 잘 지내고 있지? 날마다 니 기사 읽고 있어. 그렇게밖에 니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서. 돈 필요하면 엄마한테 와. 꼭 연락하고 와. 참으로 미안하다, 엄마가.

문자 메시지가 잇달아 날아왔다. 손지웅(가명, 27) 씨는 화면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어 저만치 밀어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 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불을 꺼도 잠에 들 수 없었다.

27년 만에 엄마가 처음으로 건넨 사과였다.

“사실 제 삶이 망가진 원인이 엄마한테 있다고 생각할 만큼 원한이 너무 커요. 엄마를 용서한다는 건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손지웅 씨는 가족들과 연을 끊은 ‘탈가정 청년’이다. 그가 기억하는 가정은 폭력이 발생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누군가는 눈물짓는 곳이었다. 현재 손 씨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누나들과도, 이모들과도, 심지어 엄마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손지웅 씨를 만났다 ⓒ셜록

“제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 ‘부모 따돌림’이 있었어요.

손 씨의 어린 시절.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아빠는 술부터 찾았다. 그는 소주 몇 병을 비우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너희 아빠 알코올 중독이야.”
“너희 아빠가 너 태어나기 전에는 나를 엄청 때렸던 사람이야. 너 뱄을 때 발로 찬 적도 있어.”
“하루는 아빠한테 너 맡겨놨는데, 너를 안 돌보고 장롱 안에 넣어놓은 적도 있었다?”

어린 손 씨는 엄마와 한방에서 잤다. 엄마는 매일같이 아빠를 헐뜯었다. 손 씨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함께 산책도 하고, 공원에서 농구를 같이 한 적도 있었다.

“엄마랑 아빠랑 맨날 싸웠어요. 보통 형식은 비슷하죠. 아빠는 술을 마시고, 엄마는 그걸 보면서 싫은 말을 해요. 그러면 아빠가 참다 참다 결국 화를 내요. 그러면 엄마가 울고 집을 나가요. 그때 저는 나가서 엄마를 찾아요. 그렇게 엄마 옆에 있으면 또 아빠 욕이 시작되는 거죠. 이런 게 늘 반복됐어요. 가끔 경찰도 찾아오고요.”

경찰에 신고하는 쪽은 엄마였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질 때면 ‘아빠가 술 마시고 난동 부린다’는 식으로 경찰을 불렀다. 손 씨는 우는 엄마를 달래고, 술 마시는 아빠를 말렸다. 싸우지 말라고 울음을 터트려도 그를 봐주는 어른은 없었다. 어린 그가 어른들 사이에서 중재자가 돼야 했다.

가족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던 아이를 도와주는 어른은 없었다

하루는 열네 살 차이 나는 큰누나가 집에 왔다. 그때 엄마는 큰누나에게 “네가 한번 아빠를 혼내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님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세 사람의 충돌로 번졌다. 큰누나는 엄마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때 큰누나가 아빠를 밀쳤거든요. 아빠가 소파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힌 거예요. 한동안 기절해 있었어요. 그때 엄마는 ‘아빠가 쇼한다’ 이런 식으로 말했고요. 몇 분 지나니까 아빠가 일어났는데,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침울해져서 방에 들어가셨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손 씨도 아빠가 문제라고만 여겼다. 엄마한테 욕을 먹는 것도, 큰누나한테 밀려 넘어지는 것도 결국 다 아빠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회사에서 명예퇴직 한 뒤에 전남 담양에 집을 한 채 마련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 달에 한 번 꼴로 가족들이 있는 광주로 찾아왔다.

“지웅아, 엄마가 집을 팔고 아빠랑 따로 살 것 같아. 지웅이는 어때?”
“그래도 집은 안 팔면 좋겠는데…. 같이 살면 안 돼?”

아빠를 미워하는 감정은 있어도 ‘화목한 가정’에 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집을 팔았다. 아빠만 모르게 진행된 이사였다. 손지웅 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빠와 분리됐다. 결국 2008년 부모님은 이혼했다.

당시 지웅 씨의 나이 열한 살. 그때부터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됐다. 이제 아빠가 아닌 손 씨에게 화살이 향했다.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많이 맞았어요. 왼손으로 글씨 쓴다고 대나무 매로 때리고, 밖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다치면 빗자루를 들고 와 ‘왜 다쳐서 돌아왔냐’며 다그쳤죠. 어떤 날은 눈 앞에 바늘을 갖다대거나 칼을 가져올 때도 있었고, 청소기로 맞다가 (청소기가) 부러진 적도 있었어요.”

지웅 씨가 억울하다며 ‘반항’하면, 엄마는 “애비 닮아서 말을 안 듣는다”고 꾸짖었다. 피가 문제였다. ‘가정을 지키지 못한’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 엄마가 아빠를 버렸듯 자신도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른이 된 지웅 씨를 여전히 괴롭힌다 ⓒ셜록

“지웅아, 슈퍼에 심부름 좀 다녀와라.”

엄마가 심부름을 시킨 날이었다. 길목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빠였다. 손 씨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차마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번 안아보자.”

부자 간의 어색한 포옹. 그리고 아빠는 딸기 한 상자를 건넸다. 아빠가 직접 기른 딸기였다. 얼떨결에 딸기 상자를 안아들고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에 대한 반가움이라곤 없었다. 엄마한테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먼저 났다.

그전에도 엄마는 종종 손 씨가 아빠와 만나기를 바랐다. 목적은 분명했다. 돈을 받아오라는 것.

돈을 ‘받아내라’는 말은 아빠와 한 지붕 아래 살 때에도 들었던 말이다. 엄마는 손 씨에게 아빠 지갑에서 돈을 훔쳐오라고 요구했다. 그러다 아빠한테 들켜서 “너 이제 내 아들 하지 말고 엄마 아들만 해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빠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죄책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아빠를 만나면 손 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돈을 요구해야 하니까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빠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미움도 원망도 미안함도 남아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학교로 전화가 왔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손지웅 씨가 아빠를 다시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영정사진을 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친척들이 울면서 “엄마가 하는 말 중에 거짓말이 많다”며, “아빠 좀 용서해줄 수 없겠냐”고 물었을 때도 슬프지 않았다. 그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가족들을, 그리고 손 씨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빈소에 얼굴만 비치고 돌아갔고, 누나 둘은 찾아오지도 않았다. 손 씨는 장례식장을 3일 내내 지키고 싶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며 하교 후 두세 시간 빈소를 지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만약 지금 아빠를 만날 수 있다면 같이 술 한잔 마시면서 엄마가 했던 말들 중에 뭐가 맞고, 뭐가 틀리고, 아빠가 속상한 건 없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는 거예요.

손지웅 씨는 엄마의 폭력 아래 자랐다. 손 씨가 반항하며 언성이라도 높이면 엄마는 매를 휘두르거나 경찰에 신고했다. 그때부터 엄마가 했던 말들을 의심했다. 아빠에 대해 했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고.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엄마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어요. 나중에는 그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됐고, 20대가 되면서는 ‘나와 관계 없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엄마는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도 ‘폭언’ 메시지를 보내왔다 ⓒ셜록

손 씨는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왔다. 엄마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내’ 삶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만 그가 찾은 삶은 불안정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주 7일 노동’으로 탈진해 쓰러진 적도 있다. 그래도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생활비를 마련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까. 건설현장까지 누비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했다.

손 씨의 홀로서기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 도왔다. 친구들은 이사를 도와주고, 끼니를 거르는 손 씨를 위해 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가족들이 비운 자리는 친구들이 대신했다.

“엄마랑은 1년에 몇 번 연락을 했어요. 그러면 또 말버릇처럼 아빠 탓을 해요. ‘너희 아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요. 그런 식의 책임회피 때문에 집안이 해체된 거예요. 아들딸들 전부 엄마랑 연락을 안 하고 살아요.”

다만 가족들의 빈자리가 다 채워지진 않았다. 특히 남성 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그 사람의 사회적 배경, 인격 등을 설명하는 열쇠처럼 취급됐다. 그는 한평생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낙인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저도 최근에야 알았어요. 엄마가 아빠를 계속 욕하던 게 그거래요, 부모 따돌림.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더라고요.”

스물여섯이 돼서야 손지웅 씨는 자신의 유년기를 설명할 단어를 알게 됐다. 부모 따돌림은 부모 간의 싸움이 아니다. 한쪽 부모가 아이에게 다른 한쪽 부모를 ‘지워버리게 만드는 정서적 조작’이다.

아이에게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 주입하면 아이의 기억은 조작된다. 감정도 덧칠된다. 결국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아빠랑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어릴 때 면접교섭이 뭔지 알고, 잘 이뤄졌더라면 지금과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죠.”

부모님의 이혼 과정에서 손 씨의 목소리는 완전히 지워졌다. 그는 ‘화목한 가정’을 꿈꿨고, 부모님이 갈라서지 않기를 바랐다. 어려서부터 학습된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성인이 된 지금도 손 씨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현재 기자로 일하면서 유년기의 상처를 회복하고 있다 ⓒ셜록

“기자로 일하면서 양육비에 관한 기사를 쓴 적이 있어요. 그때 면접교섭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됐는데,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이 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쓰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사회에 잘 보이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계속 소수자, 인권 이슈를 다루는 게 결국 제 삶에서 ‘내가 문제가 아니다’라는 걸 증명하는 과정이에요.”

면접교섭은 부모의 권리가 아니다. 아이가 두 부모를 모두 기억할 권리다. 손지웅 씨는 기자가 된 지금,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신도, 삶에 대한 애정도 없다”고 전했다.

“아직도 명절이 되면 엄마가 꿈에 나와요. 환청이 들리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내가 ‘집’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너무 힘들면 지금도 정신과 약을 먹어요.”

부모 따돌림은 아이의 언어와 기억을 왜곡시키는 정서적 학대이며, 단절을 방치하는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이다.(관련기사 : <‘나를 버린 엄마’가 처음으로 울던 날>)

엄마가 지웅 씨에게서 지워내려고 했던 건 ‘아빠’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는 ‘가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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