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31일 08시 43분, 119로 첫 신고전화가 들어왔다. 곧이어 10여 통의 전화가 빗발쳤다.
“누가 열차 안에 불을 질렀어요!”
다급한 목소리들. 그 시각 여의나루역에서 마포역 방향 터널을 지나던 서울 지하철 5호선 객실 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60대 원아무개 씨가 객실 바닥에 휘발유를 뿌리고 옷가지에 불을 붙인 것.
긴박한 순간, 400여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은 기관사 한 명뿐이었다. 승무원이 둘인 지하철 1~4호선과 달리 5호선은 ‘1인 승무’였기에.
다행히 기관사가 28년차 베테랑이었다. 승객들도 빠르게 대처했다. 덕분에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으로 번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를 당한 이들에겐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터. 특히 사고 한복판에서 혼자 대처해야 했던 기관사가 겪었을 마음의 상처는 짐작하기 힘들다. 기관사는 급히 열차를 멈추고 관제실 보고와 대피 안내 방송을 한 뒤, 불이 난 객실까지 가서 사고 수습을 했다.
그도 연기를 마신 탓에 계속 구토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 수습이 끝난 뒤에도 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구토 증세를 삼키면서 열차를 애오개역까지 운전해 갔다. 열차 운행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선’을 지키기 위해서.
그날의 사건이 기관사의 마음에는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걱정하는 이유가 있다. 서울 지하철 5~8호선(서울도시철도공사였다가 2017년 서울교통공사로 통합)에서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아홉 명의 기관사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있기 한 달 전, 30년차 지하철 기관사 정승민(가명)을 만났다. 그와 약속한 시각은 오전 8시 12분. 그가 운전하는 7호선 전동차가 정확히 8시 12분에 승강장에 들어섰다. 그는 기관사들은 시간에 강박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우리 승무사업소 소속 승무원이 160명쯤 있습니다. 저마다 (열차 운행 스케줄에 맞춘) 교번표가 다르니까 160일 동안 출퇴근 시간이 매일 다르다고 보면 됩니다. 일하는 시간이 계속 바뀌니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도 날마다 다르죠.”
그가 핸드폰 속 알람 설정 화면을 보여줬다.
06:20 / 16:00 / 19:26 / 20:46
그날의 기상시간, 출근시간, 열차시간, 교대시간이었다.
“이걸 안 맞춰놓으면 순간 깜박할 때가 있어서” 매일 네 번의 알람을 새로 맞춘다고. 교대시간을 헷갈려 열차운전 교대를 못하는 결승이 승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업무상 실수란다. 그도 교대하는 승강장 방향을 착각해 열차를 못 탈 뻔한 아찔한 순간이 한 번 있었다. 그 뒤로 더 자주 시계를 본다고.
규칙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다. 집을 나서는 시간만 해도 새벽 5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각각. 잠자리도 매일 달라진다. 야간일 때면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주박지(이른 아침열차 운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승무원들이 취침하고 출발하는 역)와 사업소 두 곳에서 번갈아 잔다. 집에서 잘 때면 가끔 집이 낯설다.
주박근무를 하는 날은 아예 잠을 못 자기도 한다. 보통 새벽 1시까지 막차 운행을 마치고 마지막 승객이 내리는 것까지 확인한 뒤 열차를 주박지까지 몰고 간다. 거기서 기관사 침실로 이동해 씻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2시가 넘는다.
다시 눈을 뜨는 시각은 새벽 4시 30분. 주박한 열차를 점검한 후 보통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하는 첫 열차 운전에 나선다. 한 달에 6~7회 있는 야간근무 중 주박근무를 하는 1~2일은 이처럼 눈만 잠깐 감았다가 뜨는 밤을 보낸다.
이처럼 불규칙한 생활패턴은 기관사들의 신체건강에 무리를 가하는 한편, 정신건강까지 압박한다. 정승민은 도시철도 기관사들이 앓는 ‘마음의 병’을 세상에 알린 22년 전 사건을 떠올렸다.

2003년 8월, 기관사 서○○이 6호선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는 6호선을 모는 기관사였다. 근무를 마치고 열차에서 내려 선로 위를 걸어갔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친구가 출근시간에 맞춰 못 일어날까봐 알람시계를 계속 샀대요. 처음에 두 개 샀는데 불안한 거예요. 네 개, 다섯 개까지 샀는데도 불안하니까 잠을 못 자는 거죠.”
사망 당시 서○○의 나이는 35세. 비극은 계속됐다. 2주 뒤, 서○○보다 한 살 어린 7호선 기관사 임○○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신경성질환으로 휴직하고 치료를 받다가 복직을 1주일쯤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복직을 위해 기관사복까지 다려놨지만,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
정승민은 근무환경도 기관사들의 정신건강 악화의 큰 요인이라고 짚었다.
“일하면서 컴컴한 터널만 계속 쳐다보잖아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공황장애가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 근무하니까요. 사고 났을 때 심리적으로 받는 부담이 (둘이 근무할 때보다) 차이가 크죠. 열차가 고장 나거나 객실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큽니다.”
스크린도어 끼임, 열차 고장, 투신사건 등. 승무원들이 대처해야 할 열차 사고들이 많다. 정승민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 있다. 스크린도어가 보급되기 전인 200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정오 즈음, 그가 운전하는 전동차가 7호선 마들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승강장에 보이는 한 사람. 선로 쪽으로 몸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빵! 경적을 짧게 울리니 그 사람이 승강장 안쪽으로 쭉 들어갔다. 정승민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 그 사람.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였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승강장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았다.
‘아, 뛰겠구나!’
정승민은 동시에 비상제동을 걸면서 다시 한 번 긴 경적을 울렸다. 빠아앙—.
순식간이었다. 뭔가 눈앞으로 휙 움직였다. 그리고 쾅. 전동차에 부딪히는 소리. 승강장 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놀랄 틈도 없었다. 안내 방송과 관제실 보고 뒤, 바로 전동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승강장에 서 있던 승객들에게 역무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철로로 내려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긴장과 두려움에 마음도 오그라든다. 선 채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열차 아래를 훑어갔다. 그렇게 두 량쯤 이동했을 때, 그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믿고 싶지 않은 장면.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119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도 못했다. 들것을 내려달라고 해서 역무원과 둘이 옮겼다. 지금은 후회한다. 구조대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사고 현장을 수습한 것을.
“내 차가 사고 나면 앞차, 뒤차를 모두 잡아놔요. 빨리 처리돼야 열차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잖아요. 빨리 못하면 욕먹어요. 난리가 나죠. 나 같은 경우는 조치하는 데 10분도 안 걸려서 나중에 관리자가 교육 때 모범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119 구조대에 뒷일을 맡기고, 그는 다시 지체된 열차 운행에 나섰다. 그렇게 교대 역인 어린이대공원역까지 30분 가까이 운전했다.
“역에 들어가면 승강장에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요. 사람들이 계속 뛰어들 것 같은 거야. 어린이대공원역까지 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힘들어. 힘들어…. 그렇게 교대를 하고 바로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갔어요. 거기서 돌아가신 분 사진을 보여주는데… 다시 충격을 받았죠.”
3일 특별휴가를 받았다. 무덤덤하게 휴가를 보냈다. 복귀 후 열차를 타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무 이상이 없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사고 후 보름쯤 됐을 때 열차를 탔는데, 갑자기 심장이 막 뛰기 시작하는 거예요. 숨을 못 쉬겠어. 손도 막 떨리고.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너무 공포스럽고, 이러다 죽겠다 싶더라고요. 그 3시간 동안 차를 어떻게 탔는지 모릅니다.”
공황발작이었다. 숨통이 막히는 경험을 하자 한 기관사 선배가 생각났다. 그때보다 3년쯤 전, 차를 몰다가 갑자기 한 역에 열차를 세우고선 병원 응급실에 갔던 선배였다. 그도 공황발작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하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선배의 고통이 이해됐다.
“숨이 막히면서도 ‘이제 더 이상 이 일을 못하는 건가’ 걱정부터 되더라고요. 그때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당시 네 살이던 막내를 생각하니 더 막막했다. 당장 오후 차를 탈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다행히 오후 차를 타기 전 휴식시간 동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오전처럼 심장이 무섭게 뛰진 않았는데 두려움, 공포심은 그대로 있었죠. 그 상태에서 일을 계속 한 거죠. 예전엔 열차를 타면 되게 편하고 좋았는데, 이젠 차에 혼자 있다는 게 되게 공포스럽더라고요.”
그 공포감을 마음 한쪽에 밀어둔 채 계속 열차를 운행해왔다. 그 뒤로 다시 공황발작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20년이 넘은 지금도 “이상한 느낌을 받는 날”이 있다. 그런 날 열차를 타면 여지없이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정승민은 공황상태를 경험하고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죽을 것 같던 그때가 공황발작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정신건강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던 때였다.
“그때는 사망사고가 나도 기관사들끼리 서로 별 말 안 했습니다. ‘군대도 갔다 왔는데 이것도 못 버텨?’ 이런 분위기였으니까. 우리가 정신건강권 투쟁을 한 뒤에야 서로 얘기하기 시작했지…. 사고 때문에 심리적으로 힘들다? 그냥 내 자신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죠. 나중에야 내가 이상한 탓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요.”
☞ 다음 이야기 <‘힐링’으로 살릴 수 있나… 죽음의 열차를 모는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