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30년차 지하철 기관사 정승민(가명)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끔찍한 투신사건 이후 그는 운행 중 공황발작을 겪었다. 그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동료들이 있었다. ‘마음이 무너진’ 기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2003년 젊은 두 기관사의 자살은 동료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서울도시철도노동조합(2018년 서울지하철노동조합과 통합해 현재는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이다)은 승무본부를 중심으로 정신건강권 투쟁에 나섰다.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사실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우리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기관사들이 불안감과 우울증, 강박증 같은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요.
1999년 노보(노동조합 신문)에 ‘기관사의 꿈’이란 만화가 실렸습니다. 기관사가 꿈에 열차를 몰고 가는데 궤도가 없는 거야. 그런데도 차를 세우지 못하는 상황인 거죠. 기관사들이 이런 꿈을 엄청 꿀 만큼 심리적인 압박에 시달린다는 걸 표현한 만화였습니다.”
노동조합은 두 기관사의 죽음이 ‘멘탈이 약한’ 개인 탓이 아니라, 근무환경과 관련돼 있음을 밝히려고 애썼다. 지하 터널 속 1인 승무, 거의 날마다 겪는 사건사고 조치에 대한 부담감은 물론, 2000년대에도 거수경례를 하며 출근점호를 하는 권위적인 조직문화도 기관사들의 심리 위축과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는 2003년 9월 실시한 도시철도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그대로 드러났다.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정신건강 ‘건강군’은 단 2.3%뿐. 기관사의 40%는 고위험 스트레스군이었다.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은 ‘2인 승무 실시’를 요구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군대식 현장 탄압 중단과 인원 충원도 요구했다. 억눌렸던 현장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났다.
그런데 예상 못한 걸림돌이 나타났다. 2004년 7월 전국 지하철공사 5개 노동조합이 함께 벌인 ‘궤도연대’ 파업으로 노조 집행부 상당수가 구속, 해임된 것. 그 여파로 정신건강권 투쟁도 주춤해졌다.
하지만 비극의 시계는 사정을 봐가며 흐르는 게 아니었다. 기관사들에게 전해진 두 건의 부고. 2005년 10월과 2006년 4월, 불과 반년 사이에 7호선 기관사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기관사 모두 공황장애와 불안장애 등으로 고통받아왔음이 알려졌다.
노동조합은 노동부로부터 역학조사 권고를 이끌어내 2007년 기관사 임시건강검진을 시행했다.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산업의학과에서 진행한 국내 최초의 대규모 전문조사였다.
조사에 응한 836명의 5~8호선 운행 기관사들 중,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는 일반인보다 7배나 많았다. 주요 우울증 비율은 2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비율도 4배 높았다. 사고를 경험한 기관사의 17.7%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 당시 서울도시철도공사 사장은 음성직. 음 사장은 2005년 9월 취임 직후부터 에너지 절감에 힘을 쏟았다. 승강장 조명 절반 끄기, 에스켈레이터 가동 중단, 냉난방기 사용 제한 등 극단적인 절전 정책을 펼쳤다.
시민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승무와 역무 노동자들은 민원인들의 항의를 직접 받으면서 엄청난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기관사들은 ‘1인 승무’의 단골 명분으로 쓰이는 자동운전도 할 수 없었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뿐만 아니다. 서울도시철도공사는 2007년 정원을 단계적으로 20%까지 줄이는 구조조정 계획인 ‘창의조직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비스지원단’이란 퇴출조직까지 만들었다.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서비스지원단에 배치된 노동자들은 부정승차 단속, 포스터와 스티커 붙이기, 불법 홍보물 수거 등 기존 업무와 상관없는 일들을 하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서비스지원단 근무자 30명과 현장 근무자 30명을 비교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비스지원단의 자살 시도 경험은 13.3%로 현장 직원(3.3%)보다 4배 높았다. 심한 우울증 증상도 현장 직원은 6.7%가 보인데 반해 서비스지원단은 30%나 됐다.
노동조합은 ‘집단 산재신청’ 투쟁을 시작했다. 기관사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사회이슈화 하면서, 기관사들에게도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했다.
2003년 8월에 사망한 기관사 임○○이 2006년 9월 산재승인을 받았고, 이후 서○○을 포함해 사망한 기관사 4명도 산재승인을 받아냈다. 2007년 12월엔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기관사 7명 등 총 11명이 산재승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으로 현장은 크게 위축됐고, 기관사들도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는 또 ‘죽음’이었다. 2012년 다시 기관사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3월 사망한 기관사 이○○의 경우 공황장애 진단서를 내고 전직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처지였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은 ‘도시철도노동자 건강권 쟁취와 시민안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서울시와 함께 해결방법을 모색했다. 서울시는 2012년 7월 ‘서울시지하철 최적근무위원회’를 발족했다. 최적근무위원회는 1년 뒤 7개 분야 53개 실행과제를 권고하고, 서울시는 2018년까지 권고사항을 이행하겠다고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최적근무위원회가 논의 중이던 2013년 1월에도 또 한 명의 기관사가 자살했다. 그는 ‘무사고 운전’에 자긍심을 갖고 있던 6호선 기관사 황○○이었다. 한 승객이 출입문에 끼이는 사고가 난 뒤, 감당하기 어려운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황 기관사는 ‘FM’이었습니다. 승무일지도 엄청 꼼꼼하게 쓰고 기계에도 해박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승객이 억지로 타려다가 출입문 사고가 나서 연착되는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걸 관리자들이 교육 때마다 안 좋은 사례로 얘기한 겁니다. 사실 이 친구 잘못도 아니었는데도, 계속 거론되니까 자긍심이 무너진 거죠. 시름시름 앓다가 (정신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대요.”
주변 사람들도 그의 변화를 느꼈다. 더 없이 깔끔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수염도 안 깎고 다니고 웃음도 보이지 않더니, 그런 마지막을 맞았던 것이다.
비극의 명단은 계속 업데이트됐다. 9개월 뒤, 또 7호선 기관사 정○○이 목숨을 끊었다. 한 달 전인 2013년 9월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의 심리상담과 치료를 지원하는 ‘도시철도 힐링센터’가 문을 열었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노동조합은 투쟁을 통해 공사 측으로부터 ‘기관사 근무환경개선단’ 발족을 약속받았다. 2014년 2월 활동을 시작한 근무환경개선단은 두 달 후 ‘기관사 근무환경 종합대책(안)’을 발표했다. 장시간 연속운전 해소, 근무형태와 평가제도 및 근무환경 개선을 제시하고, 발전과제로 2인 승무 및 무직급 단일호봉제 실시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종합대책’은 기관사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2014년 9월, 7호선 기관사 송○○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 동료들과 관계가 좋았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지다가 자살에까지 이르자, 동료 기관사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년 7개월 뒤인 2016년 4월, 6호선 기관사 김○○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분은 호소를 했어요. 혼자 말 못하고 병원 다니면서 십몇 년 앓아오다가 노동조합 간부한테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얘기 듣고 지부장이 같이 아는 병원에 가서 상담받자고 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집에 가서 죽은 겁니다.”

동료들은 물론 노동조합으로서도 충격이 컸다. 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기관사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죄책감. 노동조합은 ‘기관사 사망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서울시에 제안했다. 그동안 최적근무위원회 등에서 논의했지만 이행이 안 된 사항들을 점검했다. 특히 5~8호선도 2인 승무를 하기 위해 애썼다.
“다른 나라들도 6량 이내는 1인 승무가 있지만 대부분 2인 승무 시스템이어서 우리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전 전문가와 의사들도 2인 승무를 권장했다. 하지만 ‘비용’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승무원 증원이 필요한 문제였다. 난색을 표하던 서울시는 여행이나 병원 치료 등에 쓸 수 있는 ‘힐링카드’를 만드는 걸로 노조의 요구를 무마했다.
여전히 노동조합은 2인 승무를 기관사 정신건강 문제 대책 중 ‘1순위’로 두고 있다. 지하철 5~8호선과 마찬가지로 1인 승무인 인천지하철과 부산지하철에서도 2013년과 2016년 각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서울도시철도(5~8호선)보다 20여 년 먼저 개통한 서울메트로(1~4호선)에서는 기관사 자살사건이 지금까지 2건 있었다. 5~8호선에서 2003년부터 약 14년간 9건의 자살사건이 일어난 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수다. 1~4호선에는 실외구간이 있고 2인 승무여서, 기관사들의 심리적 압박감을 덜어준다고들 진단한다.
2017년 이후 5~8호선에서 자살한 기관사는 없다. 그렇다고 기관사들의 정신건강이 좋아졌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를 안고 아슬아슬하게 10년을 보내왔다’는 말이 더 맞겠다.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은 2020년 1월, “서울교통공사가 일방적으로 운전시간을 늘려 최근 2명의 기관사가 공황장애에 걸렸다”고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승민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다시 오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로 다시 현장을 억누르는 분위기가 됐다”면서, “언제든 다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이라고 걱정했다.

정승민이 모는 열차는 정확히 2분마다 승강장에 들어섰다. 귀가 얼얼한 소음 속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와 마주치는 승강장의 형광등 불빛이 강렬했다.
“터널이 폐쇄적이어서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쳐요. 사측은 전방주시 하라고 하지만 저는 후배들한테 가급적이면 정면을 보지 말라고 해요. 전체적으로 보고 시선을 분산시키라고요. 지금은 스크린도어도 있으니까요.”
자동운전이라고는 하는데,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출입문을 닫고, 냉난방기를 작동하고, 안내방송을 하느라 그는 바쁘게 양손을 움직였다. 여러 계기판과 각종 CCTV를 보느라 눈도 바빴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상태로 길게는 3시간 넘게도 운전을 한다고 하니, 상상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달리는 열차가 말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스케줄표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사들은 ‘안녕한 오늘’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고. <끝>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