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배송된 식재료를 보자마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리 가슴살은 여섯 개가 필요했는데, 도착한 건 하나뿐이었다. 주문을 잘못 넣은 내 착오였다. 당근도 신선하지 않고 푸석해 보였다.
오늘의 메뉴는 오리 가슴살 구이. 그릇에 부드러운 당근 퓌레를 깔고, 그 위에 껍질을 바삭하게 구워낸 오리 가슴살을 올리는 근사한 프랑스 요리다. 평소 인기 많던 메뉴인데, 핵심 식재료에서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

준비할 요리가 많아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 먼저 근처 식자재 마트에 전화를 돌려 냉동 오리 가슴살을 겨우 확보했다. ‘냉동‘이 마음에 걸렸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부랴부랴 찾아간 마트 매대에서 마침 싱싱한 당근을 발견했다. 아침에 배달된 푸석한 당근이 머리에 스쳤지만, 굳이 새로 사지 않았다.
‘싱싱하진 않아도 상한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어떻게든 맛을 내면 되겠지.’
내가 운영하던 ‘목금토 식탁‘은 일주일에 사흘, 하루 여섯 명의 낯선 이들이 모여 함께 요리하고 음식을 나누는 소셜다이닝 공간이었다. 약 1시간 30분 동안 손님들이 서너 가지 요리를 완성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당근 퓌레는 내가 미리 만들어두고 손님들은 오리 가슴살을 익히는 과정만 함께할 예정이었다.
손님들이 오기 전, 당근을 노릇하게 볶아내 퓌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정성껏 익혔음에도 당근 특유의 산뜻하고 기분 좋은 달콤한 맛이 올라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는 버터와 크림을 쏟아붓고 향신료도 평소보다 강하게 털어 넣었다. 원재료의 산뜻함 대신 묵직한 향신료의 향기로 덮인 그럭저럭한 맛의 퓌레가 완성되었다.

뒤이어 오리고기도 말썽이었다. 냉동 고기를 녹이자, 핏물이 흥건히 흘러나왔다. 이렇게 수분이 빠져나간 고기는 껍질을 바삭하게 익히기 어려울뿐더러 육질이 텁텁하고 질겨지기 마련이다. 다급한 마음에 종이타월을 두껍게 말아 고기를 꽁꽁 감싸놓았다.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일단 수분이 잡히기를 기도했다.
모임은 그럭저럭 잘 흘러갔다. 손님들은 내가 준비한 향신료와 버터 향 가득한 퓌레를 그릇 바닥에 예쁘게 펴 바르고, 직접 노릇하게 익힌 오리 가슴살을 올렸다. 다채로운 가니쉬까지 곁들이니 제법 그럴싸한 플레이팅이 완성되었다.
손님들은 포크와 나이프로 오리 가슴살을 잘라 입에 넣었다. 이제 탄성이 터져 나올 시간. 평소, 이 요리를 내는 날이면 목금토식탁의 주방은 늘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득했다. 훈제 오리 맛에만 익숙했던 분들은 오리고기 본연의 맛에 놀라워했고 “이 퓌레가 정말 당근이라고요? 당근만으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퓌레를 남김없이 싹싹 긁어 먹으며 혹시 더 없는지 묻던 손님들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탄성은 터지지 않았다. 포크를 움직이는 손님의 손은 눈에 띄게 무거웠고, 식탁은 조용했다. 손님들은 예의 바르게 침묵을 지켰다. 뿌옇게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처럼 답답한 저녁이었다.
손님들이 떠난 자리에는 밍밍한 맛의 당근 퓌레와 육즙이 다 빠진 퍽퍽한 오리 가슴살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비주얼은 완벽했을지언정, 싱싱하지 않은 재료와 급한 대로 타협한 대체품으로 채워진 접시가 정직한 맛과 감동을 줄 리 만무했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2018년 문을 연 ‘목금토식탁‘은 지인들의 입소문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았다. 뉴욕 월가 출신 요리사라는 나의 독특한 이력은 음식에 멋진 아우라를 입혔다. 나의 이력 덕에 여기저기 불러주셔서, 강의와 발표할 기회도 많았다.
목금토식탁과 나의 이야기가 몇몇 잡지와 방송에 자연스레 노출되면서, 이젠 모임 공지를 SNS에 올리면 하루이틀 만에 매진되기 일쑤였다. 목금토식탁은 처음부터 과분할 만큼 순항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요리 자체보다 내 배경과 분위기를 소비한다는 착각, 내가 내놓는 음식에 모두가 만족할 거라는 방심. 그 오만이 결국 ‘괜찮을 거야‘라는 한마디로 매대의 싱싱한 당근을 지나치게 만들었지 싶다.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눈을 가리고 지나친 이 감각. 낯설지 않다.

내가 미국 뉴욕 메릴린치에 입사했던 2006년, 메릴린치는 월가에서 CDO(부채담보부증권) 비즈니스에서 만큼은 가장 빛나는 이름이었다. 발행 규모는 독보적인 선두였고, 그 수익은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난 입사와 동시에 매주 2~3개의 신규 CDO 발행을 위한 회의에 참여했다.
물론, 이제는 모두가 알듯이, 이런 폭발적인 발행 뒤에는 어두움이 깔리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새로 발행되는 CDO의 최상위 안전 등급인 슈퍼 시니어 트랑쉐(Super Senior tranche)의 매수자를 찾지 못하게 되고, 메릴린치 내부 CDO 트레이딩 데스크에서 떠안기 시작했다.
그 누적금액이 점점 커지자, 슈퍼 시니어 트랑쉐만 사들이는 특별 트레이딩 데스크를 만들어 팔려나가지 못하는 슈퍼 시니어 트랑쉐를 그곳에 쌓아 놓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어느새 30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메릴린치에서의 마지막 CDO 발행 회의가 생생히 기억난다. 회의의 결론은 간단했다. 이번 거래의 슈퍼 시니어 트랑쉐도 우리 장부에 넣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부서에서 이번 발행도 승인하며 회의는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와 상사에게 물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괜찮아, AAA 등급이잖아.”

대답과는 다르게 그 표정이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상사도 알고 있던 거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CDO 발행 1위 은행이라는 빛나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이 승인은,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게 만드는 오만이었다. 마트 매대에서 싱싱한 당근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나처럼, 그도 그렇게 지나치고 있던 것이다.
“썰물이 빠져야 비로소 누가 수영복 없이 헤엄쳤는지 드러난다. (You don’t find out who’s been swimming naked until the tide goes out.)” – 워런 버핏, 1994년 주주총회 발언에서.
2008년 9월, 썰물이 빠졌다. 그리고 메릴린치는 260억 달러어치의 슈퍼 시니어 트랑쉐 손실을 안고 수면 위에 그대로 드러났다.
뉴욕 금융가에서 그 참극을 겪었음에도 나는 어쩌자고 이 작은 목금토식탁 주방에선 더욱 쉽게 들통날 오만을 부렸을까. 손님들이 남긴 오리고기와 퓌레를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코르통(Corton)‘에서 일하던 시절의 수셰프 다비드(David)가 떠올랐다.
다비드의 이력서에는 알랭 파사르 셰프의 아르페주(Arpège), 안도니 루이스 셰프의 뮤가리츠(Mugaritz) 등, 미식가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레스토랑들의 이름이 가득했다. 요리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주방을 이끄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자기 레스토랑을 열지 않았을 뿐, 이미 최고의 요리사였다.
그럼에도 다비드는 매일 아침 뉴욕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의 농부 시장으로 나갔다. 농부와 함께 요즘 작황은 어떤지, 신선한 재료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갓 수확한 것들을 직접 만지고 냄새 맡은 뒤에야 주방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매일 재료의 상태를 직접 보고 만진 사람에게,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물음은 필요가 없었다.
새벽 시장에서 돌아와 오늘 발견한 신선한 재료에 대해 신이 나서 말하던 다비드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다비드가 매일 새벽 시장에 나갔던 것은 어떤 의지나 전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겸손하자고, 근본을 잃지 말자고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그저 요리가 흥미로웠던 것 같다. 어제보다 더 나은 맛을 찾고 싶은 그 열정이,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자리에 있는지조차 돌아볼 겨를 없이, 그를 낮은 곳으로 이끌며 언제나 배우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아닐까.
설거지를 마쳤다. 그릇에 묻어 있던 저녁의 흔적을 모두 하수구로 흘러내려 보내니,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도 함께 정리가 되는 듯했다. 목금토식탁이 별 탈 없이 순항 중이라는 안도감만으로, 이렇게 쉽게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안이함에 빠져버리다니. 그날 저녁 오셨던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빚진 마음으로, 다시 내가 왜 주방에 서 있는지 기억해보게 되었다.

다비드는 지금도 이른 새벽 시장으로 나가고 있을 것이다.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열었고, 미슐랭 2스타를 받았다. 2025년 ‘더 베스트 셰프(The Best Chef)‘의 세계적인 셰프 명단인 ‘월드 클래스(World Class)’ 카테고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렇지만, 미슐랭 별도, 세계 최고 셰프 명단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이 그에게 쏟아내는 빛을, 다비드는 자기 안의 빛나는 열정과 마주하느라 미처 볼 겨를도 없을 테니까.
나도 내일은 새벽공기 한 번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그나저나 요즘 주식시장이 참 뜨겁다. 이제는 조심스레 발을 들여야 할 시간으로 보이는데, 본업까지 제쳐두고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괜찮을 것“이란 확신과 낙관의 끝엔 뭐가 있을지. 괜히 마음이 쓰이다가도, 정작 주식도 하지 않는 내가 별 걱정을 다 한다 싶다. 난 그냥, 주식 시장 말고 새벽 시장에나 다녀와야겠다.
오리 가슴살 구이와 당근 퓌레 (2인분 / 약 1.5시간)

재료
“신선한” 당근 1개 (손질 후 무게 200g)
무염 버터 3 Tbsp (40~45g)
큐민 씨 1/2 tsp
펜넬 씨 1/2 tsp
코리앤더 씨 1/2 tsp
물 1컵 정도
“신선한” 오리 가슴살 1개
식용유 조금
무염 버터 1 Tbsp,
타임과 통마늘
소금/후추
(옵션) 가니쉬로 올릴 구운 채소와 각종 허브
조리법
당근을 작은 한입 크기 정도로 잘라 냄비에 넣고 버터 2 Tbsp과 함께 아주 낮은 불에서 뭉근하게 익혀주세요. 버터가 녹으면 불을 아주 낮게 조절해서 뚜껑을 덮고 천천히 당근이 푹 익도록 합니다.
이때 소금으로 조금 밑간을 해주세요. (약 5~8분 정도) 주걱으로 당근을 눌렀을 때 당근이 부서질 정도로 익으면, 큐민, 펜넬, 코리앤더 씨를 넣고 한 번 빨리 볶아주세요.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머지 버터를 모두 넣어 잔열로 버터를 녹여줍니다. 이제 냄비의 모든 재료를 믹서에 넣고 곱게 퓌레로 갈아주세요. 이때 필요에 따라 물을 넣어 농도를 조절하세요.
오리 껍질에 칼집을 냅니다. 칼집은 가슴살이 드러나지 않고 지방만 드러나도록 냅니다. 팬을 약한 불에 올리고, 팬이 살짝 데워지면 최소한의 식용유를 뿌려준 후, 오리 가슴살을 소금으로 간을 한 후 칼집을 낸 껍질 쪽이 팬에 먼저 닿도록 놓아주세요. 오리 가슴살을 약한 불에서 익히는 이유는 오리 껍질을 태우지 않으면서 최대한 지방을 빼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리 기름이 고이면, 기름을 따라 내며 계속 오리 가슴살을 구워주세요. 오리 기름이 상당히 빠져나오고 껍질이 노릇노릇하고 바삭하게 익을 때까지 오리를 뒤집지 않고 익힙니다. 오리 가슴살이 두꺼운 경우에는 배스팅(basting)이 필요합니다. 오리에서 나온 기름에 버터, 타임과 통마늘을 넣고, 팬을 살짝 기울여 큰 숟가락으로 기름을 떠서 오리의 살에 이 기름을 조심스럽게 뿌려가면서 오리 가슴살을 골고루 익히는데요, 이 과정을 배스팅이라고 합니다.
오리 가슴살을 뒤집어서 반대편 살 쪽도 익혀주세요. 오리 가슴살이 다 익으면 식힘망에 올려 3~5분 정도 레스팅(resting)을 합니다. 레스팅은 열로 과하게 수축했던 고기의 겉면과 근육을 이완시켜 고기의 육질이 부드럽게 하고, 가운데로 몰렸던 육즙이 이완된 살에 골고루 퍼져 고기를 더욱 촉촉하게 만들어줘요.
레스팅이 끝난 오리 가슴살을 먹기 좋게 썰어주세요. 따듯한 당근 퓌레가 깔린 그릇에 간단한 가니쉬들과 함께 올려 요리를 완성합니다.
이제 맛있는 피노누아 한 잔을 와인잔에 따라 함께 맛있게 즐겨주세요.

이선용 작가 vera.lee@mokum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