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밍(Ming)의 호출을 받고 최근 완료된 거래의 리스크 리포트 자료를 챙겨 도착한 회의실은 평소와 달랐다. 열 명 안팎의 부서 책임자 중 웃는 사람은 없었다.
“문 잘 닫았나요? 컨퍼런스콜 녹음기능은 다 끄고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100억 달러 가까운 막대한 손실을 입은 CDO(부채담보부증권) 비즈니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1000억 원, 1조 원도 아닌 무려 10조 원 손실이라니. 자산 규모 기준 미국 2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Merrill Lynch)에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화이트보드에 온갖 복잡한 구조가 그려지고, 어마어마한 금액의 흐름이 적히고, 날짜가 적혔다. 자신감 넘치던 뉴욕 맨해튼의 금융맨들은 자신과 부서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격앙된 반응이 터지기도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맨해튼의 배터리파크시티(Battery Park City)에 갑자기 겨울이 찾아온 듯했다. 사실 토론과 대책회의, 책임 추궁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입사 2년차인 나조차도 몇 개월 전 동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우리 정말 이런 거 팔아도 괜찮은 걸까?”
이미 늦었다. 여러 채권을 묶어 유동화한 신용파생상품인 CDO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쓰나미는 이미 코앞에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시작, 전 세계는 금방 얼어붙었다.

메릴린치의 CEO 스탠 오닐(Stan O’Neal)은 사임을 발표했다. 나와 함께 회의실에 있던 몇몇 부서장들도 해고되거나 스스로 떠났다. 이듬해인 2008년 가을 무렵,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에 합병됐다.
조직 구도와 문화가 다른 두 기업의 합병은 쉽지 않았다. 메릴린치 측 사람들은 뱅크오브아메리카 시스템이 메릴린치의 복잡한 금융상품을 처리하지 못한다며 불만이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측은 메릴린치 측 사람들을 “금융위기를 초래한 뻔뻔한” 이들로 취급했다.
내 옆자리의 데이나(Dana)는 자리를 잠시 비웠다 돌아오더니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봤다.
“이럴 순 없어. 너무 불공평해.”
데이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국 문화가 아직 낯설고 영어가 서툰 나를 도와준 사수 같은 동료였다.
“데이나, 네게 빌린 책을 어떻게 돌려주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그때,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던 내 입에서 툭 나온 바보 같은 말.
“니 맘대로 해.”
이것이 데이나와 나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회사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금융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뉴욕 월가의 직장인으로서 보람을 느끼려면 돈을 사랑하거나 돈 버는 일에서 재미를 알아야 한다. 탐욕이든 아니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 열정도 애정도 찾지 못했다.
내가 회사에 나가는 거의 유일한 이유는 뉴욕의 좋은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돈이 있어야 음식 값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이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호기심은 빵 반죽처럼 불어났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프렌치, 이탈리안, 스페인 음식 등 다양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요리도 해줬다. 밥 한 끼 차려주는 일이 직장생활보다 재밌었다.
내 머리엔 경제, 금융, 돈보다 요리 생각이 가득했다. 요리 관련 잡지는 거의 다 구독했다. 뉴욕타임스의 주옥같은 기사는 거의 읽지도 않으면서 수요일 푸드섹션만은 잊지 않고 챙겼다. TV도 요리 프로그램만 봤다.(당시 유튜브엔 지금처럼 콘텐츠가 많지 않았다) 뉴욕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면 주방을 힐끔힐끔 쳐다봤고, 분위기를 봐서 주방투어를 부탁하기도 했다.

내 머릿속의 생각은 뭉근히 익어가고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은행이 아니라, 저쪽의 주방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생각은 물러터질 만큼 무르익었다. 맨해튼의 이중생활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이다.
“요리사가 돼야겠어.”
“응? 요리? 갑자기? 왜?”
말을 꺼내자마자 뜨거운 기름에 물방울이라도 떨어진 듯이 질문이 쏟아졌다. 정말이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때까지 난 “왜 그런 결정을 했어?” 따위의 질문을 받을 일 없는, 누가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괜찮은 결정을 내리며 굴곡 없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그럭저럭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장학금 받고 대학교에 입학해 경영학을 전공하고, 외국계 금융회사에 취직해 회사 생활도 그럭저럭 잘했다. 한 번 본 TOEFL과 GMAT 점수가 운 좋게도 잘 나와서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에서부터 사귀다 함께 유학을 온 남자친구와 결혼도 했다. 뉴욕이라는 멋진 도시에서 MBA를 졸업하고,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취직했다. 20대 후반에 이미 억대 연봉을 받았다. 거의 20년 전 일이다.
이렇게 살아온 내게, 많은 사람이 “요리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요리라는 새로운 길에 대한 걱정보다는 당시 최고 핫했던 금융가를 떠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려 조금은 불안했지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 내 마음이 설레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데이빗 창(David Chang), 와일리 듀프린(Wylie Dufresne) 등의 유명한 요리사를 배출한 맨해튼 소호(Soho)의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French Culinary Institute)를 운 좋게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플랫아이언 디스트릭트(Flatiron District)에 위치한 유명한 셰프의 작고 아담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쿠아빗(Aquavit), 코르통(Corton)과 같은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하는 행운도 따랐다.

팬에서 불이 솟구치고, 셰프가 소리를 질러대는 영화나 리얼리티쇼와 달리 실제의 주방은 대체로 조용하다. 여러 개의 칼날이 도마에 닿고, 음식이 팬과 냄비에서 익어가며, 오븐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요리사들은 오전 아홉 시 즈음에 출근해 1m 남짓한 폭의 각자의 조리대 앞에서 그날 저녁 메뉴에 올라가는 재료를 준비한다. 레스토랑이 오픈하는 오후 다섯 시에 가까워지면 주방은 조금 시끄러워진다. 시계 안의 복잡한 톱니바퀴가 착착 돌아가듯, 십여 명의 요리사들은 서로 몸 하나 부딪히지 않고 바쁘게 주방을 오가며 요리를 준비한다.
셰프는 각 요리사의 준비 상황을 파악하고, 소스의 맛을 체크한다. 요리사들은 본 경기에 나가기 전 운동선수들처럼 약간의 흥분 상태에서 지난 일곱 시간 동안 자신이 준비한 재료들을 다시 확인하곤 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를 소개할 때 ‘요리사’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연봉은 월가 시절에 비해 거의 십 분의 일로 줄고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내 배경 이야기를 듣더니, 왜 이 힘든 일을 하냐고 물었다.
“이곳은 정직하거든.”
난 금융업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었던 당시의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진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번드르르한 말을 풀어놓는 것이 앞서던 그때의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지 싶다.
레스토랑은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곳이다. 1분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정신 차려!”를 외치는 곳이다. 그런 정직함이 좋았다. 나의 부족함과 게으름을 숨길 수 없는 곳,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곳. 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열심히 일하고 나면 모두가 나의 땀을 인정해주던 곳. 레스토랑이 그래서 좋았다.

지난겨울,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글쓰기 모임 ‘창밖은 겨울’에 참여해 열 편의 요리 에세이를 썼다. 요리 이야기에 나의 추억을 섞고 생각을 엮어 그동안 정리하고 싶었던 요리에 대한 이론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다 쓰고 보니, 에세이 열 편 중 여섯 편에 뉴욕 금융가의 추억이 녹아 있었다. 요리에 대한 나의 가장 애틋한 추억은 월가에서 주방으로 삶의 방향을 틀어버린 그 시절과 강하게 연결돼 있다.
“요리와 금융에 대한 이야기를 셜록에 연재해보시면 어떨까요?”
‘창밖은 겨울’ 모임이 끝나갈 무렵, 셜록의 박상규 대표가 내게 말했다. 금융회사와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니, 글로 풀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내가 금융업계를 떠난 지 벌써 20년이 다 돼간다.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에게 맞지 않아 스스로 떠나온 금융계와, 내가 좋아서 찾아간 요리 세계를 연결해 글을 써보라고?
“한 편당 20만 원씩 원고료를 드릴게요. 직접 찍으신 사진도 같이 주시면 25만 원이요. 다섯 편만 일단 써보세요.”
박상규 대표의 제안에 웃음이 났다. 돈을 준다니 좋아서 웃은 것도, 내가 글 연재 제안을 받았다고 기뻐서 웃은 것도 아니다. 그냥 삶이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돈을 내고 글을 쓰겠다고 온 내가, 돈 줄 테니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을 줄이야!
“그래요. 다섯 편. 써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쓴다고 요리 세계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마침 요즘 쉬어가는 시기여서 큰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일 앞에선 언제나 ‘해보자’고 하는 내가 아닌가. 일단 글 다섯 편을 써보기로 했다.
맛깔난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MSG 덜어낸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해 준, 이 길의 매력과 정직함. 그것을 그냥 담담히 문장들로 쌓아보고 싶다.
주방에서 울리던 칼질 소리가 정직한 한 그릇의 음식이 돼 누군가의 식탁에 놓였듯이,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소리가 누군가에게 삶의 맛을 전하는 진솔한 글이 되길 바라며 첫 번째 글을 마무리해본다.

이선용 작가 vera.lee@mokum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