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그래픽(CG)를 맡기러 10층에 내려갔다. 웬일인지 복도가 고요했다. 기분 좋은 수다 소리로 가득하던 평소와 많이 달랐다. 벽걸이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여느 날과 분명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픽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려는 현실이 됐다. 몇몇 사람이 울며 짐을 싸고 있었다.

그래픽실에 무슨 있어요?”

바로 옆 영상 편집실에 들어가 이유를 물었다. 급하게 낮 뉴스 마감 작업을 하던 영상 편집 기자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명선 씨, 오늘은 CG 많이 맡기지 마요.”

왜요?”

“그래픽실 사람들 절반 가까이가 이제 회사 못 나와요.”

나는 그래픽 의뢰서를 든 채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섰다.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 울먹이며 컴퓨터 책상 위를 정리하는 사람, 벌겋게 달아오는 얼굴로 화장실로 뛰어가는 사람. 여러 슬픈 모습의 사람이 내 옆을 스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내 동료인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거지.

발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한참 동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서있었다. 그래픽실 자리가 절반쯤 비었을 무렵이 돼서야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그래픽실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마우스 클릭 소리와 타자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어렵게 자리를 보전한 동료들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평소 그래픽 아이디어를 자주 논의했던 동료도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조용히 내 의뢰서만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카메라 기자, 편집 기자, CG 디자이너, PD, AD 모두 우리와 똑같이 고생하는 보도국 식구였다. ⓒ 이명선

어떻게 문자로 ‘불합격’ 통보하냐

탄식 섞인 웅성거림이 건너편 영상취재팀에서 흘러 나왔다. 영상취재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주, 자회사 입사 1차 불합격자 통보 이후, 영상취재팀은 초상집과 다르지 않았다. 2차 불합격자 통보 여파는 더욱 컸다. 예닐곱 명이자회사로 재입사하지 했다 통지를 받으면서, 전체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더 슬픔을 감추지 못한 것은 남은 자들이었다. 떠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위로조차 못한 채, 다시 현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뉴스는 때를 가리지 않았다. 종편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루 편성의 절반이 시사 프로그램으로 채워지는 종편에서 일은 없이 쏟아졌다.

내게도 알 수 없는 미안함 감정이 들었다. 어찌됐든 나는 남았고, 그들은 떠난다.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마지막이 될 인사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선배..”

“너도 공채1기고, 나도 개국 전에 입사했는데, 참..내 신세가..”

같이 애써서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개국 공신’이라 추켜세울 때는 언제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까

선배의 말 대로다. 많은 사람이 망할 거라는 종편을 여기까지 끌고 것은, 분명 선배와 같은 평범한 조직원의 노력 덕이 컸다. 연 1~2%에 불과한 임금 인상률에도 ‘언젠가 회사 매출이 흑자로 바뀌면 달라지겠지’라는 믿음에 참았던 우리었다. 나는 말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묵묵히 바닥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규모 인사 변화는 2014년 초, 회사가 ‘영상취재’ ‘영상편집’ ‘컴퓨터그래픽’ 등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세우면서 생겼다. 기존에 이를 담당했던 외주 회사의 인력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자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는 과정에서 불합격자가 나온 것이다. 사실 우리 회사를 제외한 방송사들은 이미 관련 자회사를 가지고 있거나, 아예 보도국에 관련 팀을 두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불법은 없었다. 회사가 기존 하도급 인력들을 원점에서 다시 심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은 사람들 모두, 합격을 굳게 믿고 있었다. 개국 때부터 함께한 공을 인정받을 줄 알았다. 10명이 훌쩍 넘는 규모가 회사를 떠날 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문자로 통보로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갑자기 길거리에
나앉을 수 있겠구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떠난 동료가 미래의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아지겠지, 바뀌겠지’라는 믿음으로, 회사 일에 충성했던 사람들까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평가 기준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취재 부서에서 선별된 기자들이 직접 하도급 동료들을 평가해 점수를 매겼다는 점이 알려졌다.

동거동락하며 같이 회사를 개국한 동료가, 나를 평가했다니.’

당사자들이 느낀 감정은 배신감에 가까웠다. 몇몇 카메라 기자 선배들이, 후배인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후배인 내가 언젠가는 자신을 평가할 수도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몰래 보따리 싸는 기자들

이 일은 내게 하나의 사건이 됐다. 회사에 대한 나의 신뢰는 이 사건 이후 확실히 깨졌다. 애사심도 산산조각 났다. ‘회사를 옳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의미 있을까’란 의심은 더 굳어졌다. 나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부품 같았다.

하루하루가 버거울 정도로 쏟아지는 일에 방전이 되는 조직원들은 늘어갔다. ⓒ 셜록

바쁘기도 바빴다. 별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했고, 집에 오면 뻗어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뉴스 특보>가 프로그램 정식 명칭인 것도 우습지만, 실제로 우리는 매일 특보 체제로 일했다.

심층취재는커녕 팩트 확인을 제대로 할 여유도 없었다. 하루에 최소 1~2개의 기사를 찍어내는 상황에서 스튜디오 출연, 중계, 때때로 시사 프로그램 진행까지 해야 했다. 점심 시간에 식사 대신, 링거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기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자연스레 이직으로 마음이 쏠렸다

안정적이고, 노동여건도 좋으면서, 기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있는 언론사에 가고 싶었다. 선배들은 이런 내게 아예 신입으로 지원을 하라고 말했다.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토익 점수와 한국어능력시험을 만들어 놓으라는 조언도 했다.

“너는 아직 젊으니까 경력 지원하지 말고 다시 지상파 공채 써. 시험 있는 날 내가 대신 근무 할게.”

왜요?”

“경력 출신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니? 여기 부장 중에 경력 출신인 사람이 몇 명이나 있냐? 말 잘하는 경력 기자가 이렇게 많은데 메인 앵커도 신문 출신이 주로 하잖아.”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실제로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계급을 구분 짓는 농담을 했다.

본보 출신이면 성골,
공채 출신이면 진골,
경력 출신이면 6두품

선배들이 이직하려는 이유는 또 있었다. 참기 어려운 임금 격차다. 실제로 선배들 일부는 나보다 연봉이 적었다. 출신 회사 연봉이 적었다는 이유에서다. ‘받은 만큼 일하겠다’는 말이 마냥 농담 같지 않았다. 다른 종편사 대표가 ‘기자들 간의 연봉 차이를 줄이겠다’고 선언했다는 증권가 정보지를 보면서 선배도 나도 부러워했다.

남몰래 이직 자리를 구하는 종편 기자들은 많았다. 다른 방송사 경력 기자 공채가 뜨면 보도국 분위기가 술렁였다. ⓒ 이명선

그렇다고 남몰래 이직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회사는 ‘경력 지원’을 단속했다

회사 차원에서 이직 최종 면접자 명단을 확보하려고 했다. 여기에 이름이 올린 기자들은 실제로 데스크와 일일이 면담을 했다. 다른 언론사의 최종 면접이 있는 날 휴가를 냈거나 위치 파악이 힘든 기자들의 명단이, 데스크 보고용으로 취합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경험은 내게도 있다. 부서 팀장 선배가, 내가 제주의 한 민영 방송사에 경력 지원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들킨 것이다. 그 선배는 경력 지원이 일종의괘씸죄 해당된다는 억지논리를 펼쳤다.

경력 지원은 사실 무근이었고, 사실이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웃지 못할 촌극은 더 있다. 헛소문을 퍼뜨린 선배조차 다른 신문사 경력 출신이라는 점이다.

늘어가는 것은 기자들의 노하우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들키지 않고 이직 시험을 치르는 방법이 고도화됐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면접 당일 모습들은 슬프기까지 했다.

선배, 면접 기사 어떻게 하실 건가요?”

“괜찮은 기획 기사 발제 해서 밀어 넣으려고.”

면접 중요한 취재 잡히면 어떡하시려고요?”

“미리 야근 바꿔놨어. 회사에서 밤새 일하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가면 딱 될 것 같아.”

회사가 이직하려는 기자들을 이해 못 했듯, 나 또한 회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기자들은 격무가 싫어서, 연봉이 적어서, 부끄러운 기사 쓰기 싫어서 이직을 꿈꿨다. 그럼에도 회사는 불만 있는 기자들과 협상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초창기에는 회사의 회유에 설득돼 다른 언론사 합격을 포기한 기자들이 그나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바꾸는 기자는 거의 없었다.

대체할 기자는 많다

한 번만이라도 언론사 문턱을 넘고 싶다

기자 준비생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언론계 또한 취업 한파를 피하지 못했다. 몇 년을 쏟아부어도 취업 절벽 앞에 고꾸라지는 청년이 많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도 ‘어디든 입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종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직장일 수 있다. 대기업에 준하는 초봉을 받고, 지상파로 이직하기 좋은 발판임은 분명하다. 경력 기자 중에서도 이직 회사를 가려가며 위인 없다. 종편 경력 기자 채용 공고가 뜨면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몰린다.

내일 당장 누군가 퇴사해도
대체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언론이 보여준 발군의 성과에서 언론의 희망을 봤다. ⓒ 이명선

이런 환경속에서 우린 과연 저널리즘의 꿈과 원칙을 구현할 수 있을까? ‘파이 뺏어오기’식 과열 경쟁 속에서 과연 방송사는 쉽게 선(善)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부러지는 답이 없다고 주저 앉을 수는 없다우리는 내일을 위한 나무를 심어야 한다. 포기부터 한다면 바뀌는 것은 없다. “여전히 계속 싸우고 있다”는 전 직장 사람의 말은, 그래서 반갑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언론인들의 자성 고백, 그리고 언론 통제에 대한 내부 고발은 분명 언론을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어렵게 종편 기획을 결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들의새로 고침 글이 작은 주춧돌이 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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