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자들은 선캡을 쓰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인 척했을까? 왜 기자들은 무분별하게 유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오명을 얻었다. 보도준칙을 지키지 않고, 해오던 관습대로 취재하다 기레기가 됐다. 무엇보다 데스크 중심의 취재 지시 문화가 크게 작용했다. 데스크는 과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현장 기자들에게 무리한 지시를 내리곤 한다.

나는 여기에 이유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수습 교육에 따른 ‘상명하복’ 문화다. 종편을 포함한 주요 언론사 대부분이 수십 년째 똑같은 방식의 도제식 수습 교육을 답습하고 있다.

오늘 글은 ‘나는 왜 종편을 떠났나’ 주제보다는 ‘나는 왜 한국 언론계를 떠났나’ 주제에 더 어울릴 듯하다. 해묵은 수습 교육 제도 뒤에 가려진, 현 한국 언론의 작동 방식을 짚어볼 예정이다.

인권도 저널리즘도 없는수습 교육

1주일치 짐을 담은 캐리어를 끌고 새벽 4시쯤 서울 서대문 경찰서에 도착했다. 2011년 10월이었다. 긴장이 돼 한숨도 못 잤다. ‘새벽 6시부터 2시간마다 보고하라 통보만 받았지, 나머지는 맨땅에 헤딩하듯 알아가야 했다.

수습기자들이 경찰서에서 기거하는 2 기자실은 말이 좋아 기자실이지 자취방보다 못했다더러웠다.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이불들이 뒤엉켜 있고, 몇 개 없는 베개에는 누런 얼룩이 가득했다.

좁아도 너무 좁았다. 열댓 명의 사람이 5평도 안 되는 곳에서 피부를 맞대고 자고 있었다. 남녀 구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캐리어는 문 밖에 두고 몸만 안으로 구겨 넣었다.

수습에서의 수는
닦을 수(修)가 아닌
짐승 수(獸)였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끼리는 그렇게 불렀다. 나는 앞으로 년간, 서울 곳곳의 2 기자실을 전전하며 동물에서 기자로 환골탈태해야 했다.

수습 시절의 서대문 경찰서 2진 기자실 화장실 모습 ⓒ 이명선

새벽 4시 30분. 알람이 하나 둘 울리기 시작했다. 자고 있던 수습기자들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일단 가장 착해 보이는 수습기자를 뒤쫓아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관상을 잘 봤다. 고참이었던 그는, 흔쾌히 오늘 자신만 따라다니라고 했다.

형사 당직실 앞에는 졸린 눈을 비비고 서있는 수습기자들이 많았다. 다들 행색이 남루했다소매는 검은 떼에 절었고, 머리는 기름에 떡져 있었다. 수습 기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여유의 정도였다. 발을 동동거리는 건 대다수 나 같은 신출내기들이었다.

“일단 이거 베껴 적어요. 오늘 아침 형사 당직실에서 준 사건이에요.”

그가 건네준 것은 주취폭력 사건 개요였다. 딱 봐도 언론에 보도될 만한 건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옆 테이블과 말다툼이 붙어 서로 치고받은 사례였다. 사건 관계자의 나이와 성, 발생 시각, 위치 등이 적혀 있었다. 급한 대로 일단 받아 적었다. 첫 보고가 코앞이었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공채 1기로 입..”

보고 형식 몰라? 정확히 10 뒤에 형식 갖춰서 다시 전화해.”

전화가 끊기고 멍하게 꺼진 수화기를 바라봤다. 반말에 일단 놀라긴 했지만, 대화를 복기해봐도 잘못한 것은 없어 보였다. 사건 개요를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오늘의 선생을 자처한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욕 안 들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네요. ‘마포라인 누구입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해야 해요.”

솔직히 이해는 안 됐지만, 방송 연습의 한 과정이라 여겼다. 엄격한 만큼 배우는 것도 크리라 믿었다하지만 야단맞듯 지시를 받은 것은 약과에 불과했다수습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막무가내식 수습기자들의 취재로 경찰들 또한 고역을 겪었다 ⓒ 단비뉴스

상명하복체화시키다

수습 교육의 생리는 군대와 닮았다

반인권적인 일과 불법 업무 방식이 많았다하루 2~3시간 수면, 10 안에 전화받기, ‘다나까어미 사용하기 등이 그랬다. 다른 업계에서 ‘이런 식으로 신입 사원을 교육한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단독’을 붙여 내보낼 만한 뉴스들이 수습 기간 내내 매일 벌어졌다.

보고할 말끝에 붙였다가미친X’라는 욕을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기도 했다말을 더듬을 정도로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요’를 붙여 말한 것이다. 왜 ‘다나까’ 어미만 사용해야 하는지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차 ‘절대복종’ 상태로 길들여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당 노동에 해당하는 규제도 많았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6일간 매일 20시간이 넘게 근무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 일이다.

엄청난 교통비 또한 수습기자의 몫이었다. 내 첫 담당 구역은 서울 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로 다른 수습기자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음에도 월 150만 원이 넘는 택시비가 나왔다. 2시간마다 보고하기 위해서는 택시를 자주 타야 했다. 또한 잠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택시비는 고스란히 내 학자금 대출 위에 얹어졌다.

언론이 ‘금융권의 군대식 신입 사원 연수’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당시 버럭 따져 묻고 싶었다 ⓒ 박경득

그럼에도 가장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까닭 모를 취재를 할 때였다.

“경찰서에서 쓰는 음주 단속기 모델명이랑 모델번호 알아 와.”

“선배. 죄송한데 까닭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번에 말했지. 수습은 질문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필 이 지시가 떨어졌을 때는 퇴근 직전이었다. 왜 새벽 2시에 음주 단속기 모델명을 알아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심이 가는 것은 있었다.

시시콜콜한 질문으로
정신 교육 시킬 목적 같았다

취재의 목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경찰에게 이를 묻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거짓 보고를 했다. ‘공무 집행 보안상 알려 줄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선배에게 없는 말을 했다.

물론 배운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취재를 해냈다. 작은 팩트에도 집착하는 버릇도 이때 생겼다. 또한 경찰서 문턱도 못 넘었던 내가 형사 과장실도 척척 들어갔다.

‘군기 잡기’식 교육은 내 대거리 능력만은 분명 향상시켰다. 하지만 부작용은 컸다.

사수와 수습 모두
공감능력을 잃어갔다

사수는 수습에게 단기간에 취재를 가르쳐야 한다는 명목 때문에, 수습인 나는 어떻게든 야단을 피하기 위해 무리한 취재를 했다일례로 장례식장 취재가 그랬다.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임을 알면서도 나는 무리하게 ‘고인이 왜 돌아가셨죠?’라고 묻고 다녔다.

사수의 요구도 도를 더해갔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20대의 사연을 보고했을 때, 선배는 어떻게든 그 고인의 유서를 사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선배 본인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유로 지시를 내렸고, 나는 이 일로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사실 2시간 마다, 이른바 ‘얘기되는’ 사례를 찾는 것 자체가 무리다. 보도 윤리를 지키며 취재하다간 선배의 지시를 소화할 없다. 대학에서 배운 저널리즘은 이론 이야기에 불과했다몰래 서류를 촬영하거나 훔쳐 오는 무리수를 던지는 수습들도 부지기수였다.

세월호 참사에 언론도 책임이 있다는 여론은 많았다 ⓒ 검은티행동

해묵은 우월감만 양산하다

길고 긴 6개월간의 수습 교육이 끝나고 부서에 배치됐다. 울고불고, 누구는 병원에 실려가면서 버텨내 얻은 결과였다. 어리바리했던 우리의 모습도 얼추 기자다워졌다. 현장에 나가도 타사 기자들이 하는 만큼은 했다. 매일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선배들도 바뀌었다. 회사에 오면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긴장 상태를 유지했던 나도 점차 회사가 편해졌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는 긴장의 끈을 쥐고 있었다. 전화기 소리에 극도로 민감해져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잦았고 (퇴사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다) 데스크에 보고를 때면다나까 저절로 나왔다. 기사에 수정할 사항이 있어 데스크에게 말을 거는 일에도 손에 땀이 났다. 회의를 할 때는 더 했다. 나는 선배 말에 ‘네, 네’ 하기 바빴다.

상명하복 교육이
나도 모르게 체득된 것

데스크의 지시에 따라, 맡은 바를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 1 목적이 됐고, 출입처에서 낙종을 하지 않는 것이 2 목적이 됐다수습 교육 6개월 만에 나는 누군가 굴릴 때만 몸이 움직이는완벽한 수동적인 존재가 됐다하지만 이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는 많지 않았다.

되려 ‘극한의 경험을 해냈다’는
그릇된 우월감이 팽배했다

내가 선배에 자리에 오르면서 본 수습 교육의 실상은 참담했다. 데스크는 이따금씩 ‘오늘은 수습 재우지 말고 밤새 취재시키라’라는 지시를 했다. 기가 빠졌다는 이유에서였다. ‘내 수습 때는 더했다’는 식의 으스댐 또한 술자리에서 자주 목격됐다.

수습 교육을 제대로 완료했다는 것은 기자들에게 하나의 훈장이었다

수습 교육을 통해 조직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도록 훈련시켰다 ⓒ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코끼리 말뚝 뽑아라

어릴 때 말뚝에 묶인 코끼리는 커서도 말뚝을 뽑지 못한다. 어릴 때 뽑지 못했던 기억 때문이다.

현 수습 교육 목표는 상명하복,
‘알아서 기어’ 정신을 가르치는 데 있다

세월호 참사 때 기자들이 유가족을 배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취재했던 것도, 어쩌면 수습 교육과정 중 생긴 ‘무공감’ 내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데스크의 압박과 낙종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과도한 속보전까지 더해지면서 눈과 귀가 닫혔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교육된 기자는 경찰서장실 문을 차고 들어가는 깡은 있을지 몰라도, 회사의 부당함에 홑몸으로 맞대응하는 깡은 없을 이다.

‘좋은 기자가 되겠다’ 다짐 하나로 수십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으려 공부중인 예비 언론인들이 지금도 많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전근대식 방법으로 이들을 좋은 언론인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언론계의 낡은 시작점을 바꾸는 것이, 바로기레기오명을 씻는 진정한 시작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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