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별명이 많았다. 개국 전부터 대중의 관심이 대단했다. 내가 입사했던 2011년 가을, 회사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대략 이러했다.

불법, 편법, 날치기,
귀태(鬼胎), 수구..

이 단어들을 조합하면 이런 말이 나온다. ‘불법 날치기로 탄생한 귀태 방송사’. 노이즈 마케팅이었다면 대성공이다. 세상에 우리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보수 성향 언론과 시민, 당시 한나라당, 거의 모두가 종편 반대편에 섰다.

종편 4사가 모두 같은 상황이었다(지금의 JTBC는 꿈도 못 꿨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니, 우리를 없는 취급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회사 코앞으로 만난 시민도 그랬다. “이번 설에 뭐하세요?”같은 간단한 질문에 “종편하고는 인터뷰 안 해요”라는 답변을 듣곤 했다.

시청률 0%대로 시작한 종편이 개국 5년 만에 언론 지형을 바꿔놓았다. 제작비가 적게 드는 낮 시간대 ‘토크 시사 프로그램’으로 보수층을 빠르게 흡수했다. ⓒ 이명선 기자

정작 취재가 필요한 순간일수록
철저히 종편 기자임을 숨겨야 했다

특히 호남지방이나 집회 시위 현장에 나갈 때 그랬다. 마이크, 노트북 등에 새겨진 회사 로고를 가리지 않으면 취재가 불가능했다. 취재를 위해 기자 신분을 숨겨야 한다니, 정말 코미디다.

한 지상파 기자가 최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겪은 일을 나도 경험했다. 회사 로고를 뗀 마이크를 들고 마치 종편 기자가 아닌 것처럼 몰래 중계 방송을 했다. 그것마저 들킬까 봐 초고속으로. 우리를 거부한 곳은 이 밖에도 많았다. 진보 시민단체에서도 종편은 찬밥 신세였다.

“안녕하세요. 000 보도국에서 전화드립니다. 정부에서 통과한 시행령에 대해 여쭤 볼 말씀이..”

 “죄송합니다. 종편 취재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저희 단체 원칙입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제대로 보여준 것도 없는데 왜 벌써부터 싫어할까’란 생각이 들어 미간이 찡그려지기도 했다. 퇴사할 때는 광화문 쪽으로 용변도 안 보겠다는 각오로 나왔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큰 동력이 되기도 했다. ‘더 열심히 해서, 당신들의 걱정에 좋은 보도로 응답하리라’ 이렇게 다짐했다. 경찰서나 관공서에 출입처 하나 없었지만, 발로 뛰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는 정신으로.

안타깝게도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회사의 보도는 날이 갈수록 퇴행했다. 미디어 지평의 새로운 막을 열겠다는 개국 때 포부는 거짓말이었다.

정치 이념적인 보도는 물론,
카더라 뉴스, 막말 보도까지
쉽게 방송으로 나갔다

열심히 하려 해도, 정성을 다할 물리적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보도 양에 비해 기자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지시대로 기사를 쓰기에도 숨이 찼다. 해가 뜨기 전 출근했다가 별이 뜨면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대중의 불신에 더욱 불을 지핀 것은 2013년 5월에 방영된 5∙18 왜곡보도였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북한 게릴라군이 남파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나갔다. 한심했다. 기본 중에 기본인 팩트가 취약했다. 제대로 된 확인 절차 없이, 제보자의 말을 그대로 방송으로 옮겼다.

기자들이 나서 허술한 ‘뉴스 취사선택 기준’에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기수도 황당한 보도에 성명서를 쓰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해당 프로그램 책임자에 대한 징계는 미미했고, 저널리즘 정신을 잃은 뉴스는 계속 터져 나왔다.

페트병으로 얻어 맞는 ‘기레기’ 신세

시간이 지날수록 ‘편파방송’ ‘왜곡방송’이란 악명은 거세졌다. 특히 정치 뉴스에서 그랬다. 선거철이면 종편은 불균형, 불공정 보도로 세간의 무수한 질타를 받았다. 나는 선거 무렵이면 자주 기러기처럼 정치부로 파견을 갔다. 아래는 18대 대선 때 겪은 일이다.

2012년 겨울, 대선취재팀 막내였던 나는 ‘마크맨’ 역할을 많이 맡았다. 마크맨이란 주요 정치인들을 전담 취재하는 사람을 말한다. 취지 대로면 담당 정치인의 기사를 총괄해 써야 하지만, 나는 후보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해 보고했다. 대부분이 유세 일정과 후보의 말이었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경우는 패션도 보고 대상이었다.

사건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따라 경기도 한 중소도시로 갔을 때 벌어졌다. 많이 추웠지만, 유세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날 마지막 일정이었다. 회사로 복귀하기 전에 시민 인터뷰까지 마쳐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유세가 끝나자마자 바로 마이크를 들었다. 서둘러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인터뷰 의사를 묻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 종편 XX새끼들아. 빨리 꺼져! 이거 던져버리기 전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욕도 욕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정말 무언가 들려 있었다. 겁이 났다. 남자의 얼굴은 잔뜩 화난 것처럼 보였다. 같이 있던 카메라 기자 선배와 오디오맨은, 내가 걱정이 됐는지 자신들의 몸으로 나를 가렸다. 남자는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가 그 남자에게 다가가 상황 정리를 시도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고 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뭘 하겠다는 거야, XX. 그냥 꺼지라고. 꺼져! 종편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금방 가겠습니다.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

선배의 말이 잘려나가는 동시에, 그는 무언가를 내게 던졌다. 페트병이었다. 허공을 가른 페트병은 내게로 날아왔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남자 손을 떠난 페트병은 정확히 내 머리를 가격했다.

“아악..”

몸에서 튕겨나간 페트병은 남자에게로 다시 굴러갔다. 다행히 크게 아프지 않았다. 언쟁은 더 커졌고, 사람들은 더 모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인터뷰는 무리였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냥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회사가 나쁘면, 곧 내가 나쁜 거구나.’

데스크는 이 사실들을 알기나 할까.’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억울하고, 화도 좀 나고, 슬펐다.

아빠에게 나는 자랑스러운 기자였다

“우리 딸 왔어? 오늘 기사 잘 봤어. 수고했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 10시 넘어 집에 들어오면, 아빠는 늘 나를 반겼다. 어김없이 텔레비전은 회사 채널로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대선 후보의 마크맨이었다면, 아빠는 나의 마크맨이었다. 내가 쓰는 기사, 내가 입고 먹는 것 모든 것에 관심을 쏟았다. 아빠 관심은 입사 직후부터 시작됐다.

종편에 입사한 이후 부모님은 하루 종일 종편만 보셨다. 딸이 뉴스에 나올 때면, 휴대전화로 텔레비전을 찍으셨다. ⓒ 이명선 기자

2011년 겨울 수습기자 때 일이다. 말이 좋아 기자지, 당시 나는 그냥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노숙인 신세였다. 하루에 두세 시간 남짓 잤고, 끼니는 한두 번 겨우 챙겨 먹었다. 행색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소매가 볼펜 자국으로 얼룩지든, 바지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풍기든 말든, 상관없었다. 급한 것은 숙면, 또 숙면이었다. 빨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휴무일은 온전히 숙면할 절호의 기회였다.

“쿠우우우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늘 익숙한 기계음 때문이었다. 배가 슬슬 고파질 무렵, 문틈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헤어드라이기 소리였다. 범인은 아빠였다. 아빠는 머리카락이 아닌, 엉뚱한 것을 말리고 있었다. 내 옷이었다.

“아빠 뭐하세요?”

“우리 딸, 벌써 깼어?”

아빠는 헤어 드라이기로 내 옷을 말리고 있었다. 내가 잠자는 사이, 내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신 모양이다. 겨울인데 선풍기까지 꺼내셨다. 환갑의 아빠가 다 큰 딸의 옷을 말리고 있다니 코끝이 찡했다. 그때 내 나이는 26살. 다 컸어도 한참 전에 컸을 나이였다.

“어휴, 그냥 다른 옷 입으려고 했는데, 굳이 왜 세탁하셨어요?”

“우리 딸 명색이 기자님인데, 아무거나 막 입고 다니며 안 되지. 신경 쓰지 말고 더 쉬어.”

아빠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만하시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아빠는 “옷은 곧 예의”라고 했다. ‘님’자 소리 듣는 직업일수록 말끔히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옷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빠 기준에 맞는, 기자’님’ 다운 옷이 적었을 뿐이다.

아빠 말대로 옷은 거짓말처럼 금세 말랐다. 제아무리 오리털 외투라도, 아빠 손만 거치면 20~30분 안에 해결됐다. 드라이기가 고장 나면, 새 드라이기를 샀다. 아빠는 그렇게 수습 기간 반년 내내, 내 옷을 말렸다.

아빠는 여전히 모르신다

본격적으로 내가 카메라 앞에 나오기 시작하자 아빠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단독 기사를 쓰고,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딸을 보면서 뿌듯해하셨다. 그런 딸의 모습은 아빠 휴대전화에 차곡차곡 저장됐다. 아빠 지인들 중 내 리포트 영상을 안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문 1면 나왔던 최종 합격자 명단. 종편을 퇴사한 뒤에도 한동안 아빠 책상을 장식했다. ⓒ 이명선 기자 

자랑의 증거는 아빠 책상 위에도 있었다. 입사가 확정되고 신문 1면에 합격자 명단이 뜬 그 날, 아빠는 형광펜으로 내 이름을 칠했다. A4용지에 그 종이조각을 붙이고, 내 이름 석자를 붓 펜으로 정성스레 적었다. ‘밝고 착하게 살아라’ 명선(明善)이란 이름 또한 아빠가 지으셨다. 나는 아빠의 분신이자, 자랑스러운 기자님이었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우리 집 대문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달라졌다. 문밖에서 나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기자님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기자님조차 아니었다. 나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내가 누구인지, 내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따위도 중요치 않았다.

내가 종편이자, 종편이 나였으니 손가락질 받아 마땅했다.

쓰레기와 기자를 결합해 만든 신조어인 ‘기레기’. 내게는 아빠에게 말 못할 비밀이 참 많다. 아빠는 자랑스러운 그 기자님이 페트병으로 머리를 맞고 욕을 들으며 취재 다녔다는 걸 여전히 모르신다.

아빠가 형광펜으로 칠했던,
자랑스러운 딸은 사실 기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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