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사람들이 빈손의 사람들을 죽였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흰 옷의 사람들을 죽였다.

학살.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빨갱이’로 의심받았다. 참혹한 죽음이 남긴 오랜 침묵. 학살을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가족을 잃은 사람도, 무엇 하나 보지도 듣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가 2000만 명 내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무 명 중 한 명 꼴로 하루아침에 집에서, 마을에서, 일터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 청주 분터골 민간인학살 현장. ⓒ셜록

진실은 침묵 속에 잠자고 있었다. 잠자고 있을 뿐이었다.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말하지 못하는 동안 더 깊고 깊은 상처 속으로 켜켜이 가라앉았다. 학살은 70년 전에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70년 전 시작해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비극이다.

학살로 부모를 잃은 자식들은 지난 70년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단순히 ‘연좌제 등 사회적 차별 때문에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는 수준의 문장으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한 순간에 생계부양자가 사라진 데서 오는 가난,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 마을 공동체의 차별과 배제, 국가의 지속적인 감시와 관리, 지난했던 진실규명 투쟁, 사과 없는 국가의 외면…. 삶의 모든 것이 투쟁이었다.

유족이라 말하지 못하는 유족. 슬픔도 원망도 침묵 속에 가둬야 했던 삶. 구자환 감독은 그들의 삶을 쫓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2015), <해원>(2018), <태안>(2022)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레드툼>(2015), <해원>(2018), <태안>(2022) 포스터들 ⓒ레드무비

구 감독은 지금도 혼자 기록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유족들을 만나러 전국을 다니고, 그 결과물들을 ‘다큐몹’(https://www.youtube.com/@documob) 채널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이들의 말[言]은 70년 전 학살의 순간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침묵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야 사람들의 귀를 찾아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그 죽음 아래 쌓여온 말들.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다큐몹은 그들의 말을 차곡차곡 함께 기록할 예정이다.

피학살자 유족들의 고통에는 언제나 ‘현재’밖에 없었다. 이들의 70년 인생에는 지난날 냉혹했던 시대가 남긴 흉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두 문장의 글에 함부로 옮겨담을 수 없는, 인생의 골짜기마다 새겨진 원한의 이야기들을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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