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의 빈자리. 안방 침대 옆 머리맡에는 영정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노인은 양복을 입고 미소를 띠었다.
“아직도 우리 아들이 영해면(소재지)에서 매일같이 여기(본가)까지 자러 와요. (그날 이후로) 혼자 못 자. 아들 며느리 없었으면 (남편 없이) 나 혼자서 못 살았지….”

경북 지역을 집어삼킨 최악의 산불이 발생한 지 어느덧 두 달. 아내 원순희 씨는 여전히 혼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이별, 유가족들은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신응국(향년 69세) 씨는 2011년부터 14년 동안 영덕군청 영해면사무소 소속으로 일한 산불감시원이다. 그는 지난 3월 25일 이웃한 의성군 지역의 산불진화 작업에 투입됐다.
영덕군 전역에 불지옥이 펼쳐진 그날 밤. 신 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경북 영덕군 7번 국도 옆 산길에서 불에 타 숨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그가 몰고 온 트럭은 전소됐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의 무전기와 핸드폰이 불에 탄 채 발견됐다.(관련기사 : <‘불탄 숲’에서 사라진 남자… 그의 마지막을 추적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아직 풀지 못한 비밀이 많다. 특히 책임기관인 영덕군이 답해야 할 질문들도 남아 있다. 첫 번째는 ‘왜 철수 명령을 서두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평소에 오전 10시에 출근해갖고 틀림없이 오후 7시 되면 집에 들어와요. 왜 그날은 영덕도 아니고 의성에 불 끄러 가가지고 제 시간에 안 보냈냐 이 말이야. 오후 7시에 영덕 왔으면 그런 일 없어요. 다치면 다쳤지, 죽지는 않았어. 그게 너무 안타깝다 이거야.”(아내 원순희 씨)
3월 25일 영덕군청 산불예방전문진화대(이하 산불진화대)와 산불감시원 13명은 의성군 산불 진화 현장에 파견됐다. 오후 5시 40분경, 이들은 영덕군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미 불길은 의성군에서 청송군을 지나 영덕군 지품면으로 무섭게 번지는 중이었다.
20년차 베테랑 진화대원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늦은’ 결정이었다.
“영덕으로 불이 넘어올 기세를 보이면, 애초에 철수 명령을 낮 12시 전에 내려줘야 되자네. 우리는 그것도(불이 영덕으로 넘어온 줄도) 모르고 거기(의성)서 오후 5시 40분까지 불을 껐다니까.”(산불진화대 강재덕 대원. 가명.)

이웃한 청송군의 경우 애초에 산불감시원을 의성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하지 않았다. 직접 불을 끄는 역할을 하는 산불진화대만 3월 22일부터 의성군에 파견했다. 하지만 25일 당일에는 산불진화대도 낮 12시경 청송군으로 복귀 조치했다.
의성 산불이 청송군으로 넘어가고 있는 징후를 확인하고, 사전에 군 차원에서 진화인력 전원 복귀 조치를 한 것이다. 청송군의 최초 발화 시점은 당일 오후 4시 35분경이다.
“산불감시원들은 애초에 직접적으로 불을 끄는 인력은 아니잖아요. 산불감시원은 나이도 70세로 제한돼 있고, 직접적으로 불을 끄고 몸을 써야 하는 산불진화대에 비해, 직접적으로 산불 현장에 투입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애초에 의성 산불 현장에 투입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청송군청 산림자원과 담당자)


영덕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불바다로 변했다. 대원들의 복귀 목적지는 최초 집결지인 영덕문화원. 영덕군청 산불진화대 강재덕(가명) 대원이 승합차 운전대를 잡았다.
“의성에서 출발을 해버렸기 때문에, 불에 갇힌 상태야. 어쨌든 돌파를 해야 되는 거고, 브레이크 밟을 정신도 없었다니까. 그때는 막 내가 진짜 이 사람들(산불감시원들) 8명 (승합차에) 태워오면서, 땀을 그만큼 흘려본 게 처음이라니까.”(강재덕 대원)
오후 7시 30분에는 영덕군 9개 전체 읍면에 주민대피 명령이 공고됐다. 하지만 그 시각, 의성으로 파견나간 산불감시원들은 아직도 도로 위에서 불길에 쫓기고 있었다. 자칫하면 불길에 차량이 고립돼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간신히 불지옥을 건넌 이들은 오후 8시 56분께 영덕문화원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1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 하지만 불길을 피해가며 3시간을 넘겨 복귀했다.
영덕군이 답해야 할 두 번째 질문은, 영덕으로 돌아온 뒤 ‘왜 대피가 아닌 각자 해산을 명령했는가’ 하는 점이다.
파견 산불감시원들이 복귀한 영덕문화원 바로 옆이 ‘군민 대피장소’인 영덕국민체육센터였다. 두 곳은 직선거리로 약 46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걸어서 약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당시 영덕 일부 지역은 이미 통신과 전기가 끊긴 상태였다. 신 씨를 비롯한 파견 대원들은 각자 소속 읍면으로 복귀가 가능한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영덕군은 해산 명령 후 산불감시원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해 복귀하도록 맡겼다.
“7번 국도가 멀쩡하겠냐고요, 영덕문화원에서 해산할 때 (책임자가) ‘(소속 읍면으로) 가지 마세요, 차라리 여기 있으세요’ 이래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7번 국도로) 가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거하고 똑같은 건데.”(아들 신정우 씨)
이 같은 문제는 영덕군청이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사실확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출처 정혜경 진보당 국회의원실). 문서에는 인솔자(영덕군청 공무원)가 “영덕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이들에게 복귀지시를 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통상 파견 이후에는 소속 읍면으로 복귀하는 게 절차다. 특히 그날은 영덕군청의 지시로 군내 모든 산불감시원이 소속 읍면에서 주민대피를 도와야 했다. 기자는 신 씨와 함께 의성에 파견됐다 돌아온 산불감시원 3명에게 그날 복귀 상황을 물었다.
“연로한 사람이나 못 움직인 주민들 대피 도우라고 했더라고요. 저는 교통수단이 없어가, (영덕문화원에) 대기하고 있다가 다른 산불감시원들하고 같이 이동했습니더. 새벽 1시 반 정도 돼가 ○○면사무소에 도착했습니다.”(파견 산불감시원 A)
“(해산 이후) △△면사무소 소속 다른 산불감시원들과 같이 합류했습니다. (대피소인) 영덕체육관(영덕군민체육센터)으로 집결했지요.”(파견 산불감시원 B)
“(영덕문화원에서) 해산을 해가지고 각 읍면으로 복귀를 했죠. 각 읍면에서 우리 산불 담당자 지시를 받아가 주민대피 활동을 했죠.”(파견 산불감시원 C)
신응국 씨의 마지막 이동경로를 보면, 그 역시 본인이 소속된 영해면사무소로 복귀하려던 걸로 보인다. 그가 진입한 7번 국도는 영해면 대리에 위치한 그의 집과 완전히 반대 방향.

하지만 7번 국도도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신 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9시 58분부터 7번 국도도 통제가 시작됐다.
“이 사람(신응국 씨)은 책임감 때문에 (대충이) 안 된다니까. (해산 당시에도) 맨 마지막에 갔다니까. (의성에서 불길을 피해 가까스로 영덕에 도착한 때라) ‘아이고 강 사장(강 대원), 살려줘서 고맙데이’ 이러고 내한테 인사를 하고 갔다니까.”(강재덕 대원)
결국 신 씨는 어디로도 돌아오지 못했다. 7번 국도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길, 영덕읍 매정리 인근 산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불길을 피해 살아남으려 바다 쪽으로 향하다, 결국 화마를 피하지 못한 걸로 보인다.

기자는 지난 16일 영덕군청에 서면질의서를 넣었지만 29일 현재까지 답변서를 받지 못했다. 기자는 28일 영덕군청 산림보호팀장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팀장은 철수 명령이 늦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 “의성 산불 진화 현장에서 산불현장통합지휘본부의 지휘에 따라 복귀를 할 수 있는데, 그날도 통상적인 근로시간에 맞춰서 오후 6시경에 퇴근을 했다”고 설명했다.
영덕으로 돌아온 뒤 대피가 아닌 각자 해산 명령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25일 오후 9시경)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연락이 어려웠다, (공무원들은) 주민 대피에 신경을 쓰다보니 실질적으로 산불을 직접 끄는 산불감시원들은 본인 스스로를 지켜야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산불감시원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진 게)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취재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그래픽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