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라졌고, 그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검은 숲’에 남았다.
땅 위엔 타고 남은 타이어 조각과 녹슨 구릿빛 철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나무들은 새까맣게 변했다. 무언가를 모조리 태우고 남은 회색 잿가루가 ‘그날’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줬다. 화마(火魔)를 피해 달리던 산불감시원 신응국(1956년생) 씨의 마지막 하루를.
길가에는 종이컵에 담긴 술 한 잔. 신 씨의 첫째 아들 신정우 씨 부부가 지난달 올리고 간 술이다. 비극의 자리에도 무심한 풀이 돋았다. 어느새 한 뼘이나 자란 풀이 종이컵을 가렸다. 종이컵 안엔 바람에 날아온 모래가 켜켜이 쌓여 있다.

지난 3월 경북 지역을 집어삼킨 최악의 ‘괴물’ 산불. 신응국 씨는 지난 3월 25일 밤 이곳에서 죽었다. 시체검안서에 적힌 사인은 “화재사”. 그는 영덕군청 영해면사무소 소속 산불감시원이었다. 그날 신 씨는 이웃한 의성군 지역의 산불진화 작업에 투입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그는 어디로 가려 했을까. 그날 밤 그의 눈앞엔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었을까. 지난 14일,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그의 마지막 행적을 쫓기 시작했다.
추적을 시작한 곳은 ‘영덕문화원'(경북 영덕군 영덕읍) 앞 주차장 네 번째 칸. 신 씨의 회색 코란도 스포츠 차량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그리고 차에 오르는 그의 등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

사건이 일어난 3월 25일 오전 10시. 영덕군청 소속 산불예방전문진화대와 산불감시원 총 13명은 의성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됐다. 오후 5시 40분쯤 돼서야 영덕군청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의성군에서 시작한 산불이 청송군을 거쳐 영덕군 지품면으로 번지던 시점이었다.
영덕군청 산불예방전문진화대 소속 강재덕(가명) 대원이 스타리아 승합차 운전대를 잡았다. 신 씨를 포함해 산불감시원 8명이 그 차에 탔다. 목적지는 최초 집결지인 영덕문화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10년 경력의 베테랑 진화대원인 강 대원조차 입에는 침이 마르고 손에는 땀이 흘렀다.


일단 출발. 차는 불길을 피해 내달렸다. 도로엔 연기가 자욱했다. 차창 밖에는 성난 불길이 밭과 나무를 마구잡이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미 전기가 끊겨 도로변 가로등에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달리면 달릴수록 더 불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불에 타죽은 산짐승들이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피할 여유도 없었다. 도로 위 장애물들을 차로 그대로 들이받으면서도 무작정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의성에서) 출발을 해버렸기 때문에 불에 갇힌 상태였어요. 어쨌든 돌파를 해야 되는 거고. 내가 진짜 (운전하면서) 땀을 그렇게 많이 흘려본 게 처음이라니까. 차 안에 있는데 불기둥이 한 번 싹 오잖아요. 옷이 다 타버려요. 직접 불이 안 닿았는데도 복사열에 의해서 타버린다니까.”
불은 삽시간에 영덕을 삼켰다. 영덕에는 25m/s 이상의 강풍경보가 발효됐다. 오후 7시 18분 ‘영해면 대리’에 주민대피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됐다. 신응국 씨의 집도 영해면 대리에 있다. 그의 과수원 한 곳도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불과 12분 뒤인 오후 7시 30분에는 영덕군 9개 전체 읍면에 주민대피 명령이 공고됐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 불이 영덕 전체로 번져나가는 데 약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신응국 씨의 아내 원순희 씨도 대피명령에 따라 아들네가 있는 면소재지로 서둘러 몸을 옮겼다.
“아들이 영해면(소재지) 아파트 사니까 거기로 가서 오후 8시 40분쯤 (남편한테) 전화를 했거든요. ‘절대로 (영해면 대리에 있는) 집으로 오지 마라. 우리도 대피 왔으니까 당신 (집으로) 오면 큰일 난다. 지금 난리가 났으니까 영덕(읍내)에서 자고 온나’ 내가 이 소리까지 했다니까. 본인(신응국 씨)이 ‘알았다’ 캤어요.
안 캤으면 저도 죽었다니까요. (남편이 실종된 줄 알았으면) 내가 찾으러 갔겠죠. 전화도 안 되지, 전깃불도 다 꺼져 버렸지, 무슨 일이 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날 살리려고 (그랬는가), 집으로 안 오겠다고 ‘알았다’ 한 거죠. 그래가 내가 (남편이) 영덕(읍내)에서 자고 오는 줄 알고 (25일 밤에) 아들 집에서 잤다니까요.”

그 시각 신응국 씨 일행을 태운 승합차는 불길을 피해 캄캄한 도로 위를 앞만 보며 내달렸다. 간신히 불지옥을 건넌 이들은 25일 오후 8시 56분께 영덕문화원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1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지만, 불길을 피해 돌고 돌아 오느라 꼬박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신응국 씨는 영덕문화원 주차장에서 강 대원과 포옹을 나누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그때만 해도, 이제 살았다고, 죽을 고비는 넘겼다고 안도했다.
그 모습이 강 대원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의성 산불 진화 현장에서 받아온) 초코파이하고 초콜릿 일고여덟 박스를 (신응국 씨) 차에 실어 담았다니까. 나중에 과수원 일 바쁠 때, 인부들 주고 싶다고 해서. 그러고 나서 신응국 씨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살려줘가 고맙다’ 하고 (차 몰고) 갔는데 그래….”
그 시각 영덕군 전역에 주민대피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산불감시원들은 영덕문화원에 세워둔 각자의 차를 몰고 흩어졌다. 소속 읍면으로 이동해 주민 대피를 도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신 씨도 ‘주차장 네 번째 칸’에 주차된 본인의 차에 올라 탔다. 그의 차는 곧 ‘7번 국도’ 북쪽 방향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신 씨가 달린 그 길을, 기자도 그대로 쫓았다. 두 달이 지났지만 눈앞의 풍경은 그날의 참상을 짐작케 했다.
도로 양옆에는 불에 타버린 검은 나무들이 한가득. 5월의 신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무 아래도 흙과 재만 뒤섞여, 흑백사진처럼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불탄 나무를 이미 베어내, 밑둥만 처참하게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불바다’로 변했을 그날 밤 7번 국도의 모습이, 설명할 것도 없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신 씨가 발견된 곳은 7번 국도 위에 있지 않았다. 영해면사무소까지 가려면 7번 국도를 타고 한참 더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날 밤 신 씨는 생사가 달린 몇 번의 갈림길을 ‘원치 않게’ 마주했을 것이다.
영덕문화원을 떠나 7km쯤 달려온 시점, 신 씨는 7번 국도 위에서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났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향한 표지판은 ‘매정교차로’를 가리켰다. 찰나의 순간. 신 씨는 첫 번째 선택을 내려야 했다. 불지옥인 7번 국도를 관통해 나갈지, 아니면 일단 앞이 보이는 길로 빠져나갈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만, 살기 위해선 결정해야 했다.
신 씨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매정리 뱡향. 매정리를 지나면 곧 동해 바다가 나온다. 불길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바다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7번 국도는 오후 9시 58분부터 통제됐다.
또 한 번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원래대로라면 영덕제2농공단지 방향으로 합류해 해안 쪽으로 향했어야 했던 경로. 신 씨는 다시 한 번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어 좁은 산길을 올라갔다. 불길과 연기에 방향감각을 잃은 걸까. 아니면 농공단지 길마저 이미 불바다로 변해 있었던 걸까.
산길을 200m 이상 달렸다. 신 씨가 몰던 트럭은 산 중턱 비포장도로 위에서 멈춰섰다.
“7번 국도가 멀쩡하겠냐고요, 그 바람 부는데. 영덕문화원에서 해산할 때 (책임자가) ‘(읍면으로) 가지 마세요’, ‘차라리 여기 있으세요’ 이래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7번 국도로) 가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거하고 똑같은 건데. (당시 불길이 번져 있던) 지품면하고, 요기 7번 국도 하고 (거리가) 얼마나 차이 난다고. 불 날아오는데 5분도 안 걸렸다는대.”(아들 신정우 씨)

차가 멈춰선 곳에서 신 씨는 ‘마지막 결단’을 했다. 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차를 돌릴 수도 없는 좁은 길. 아마도 더 이상 차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길 앞쪽이 불구덩이로 변한 상태 아니었을까.
신 씨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갈 셈으로 차 뒤쪽을 향해 뛰었다. 보이는 거라곤 검은 연기와 붉은 불길밖에 없는 산길에서, 맨몸으로 마지막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운전석 문을 열고 한 발을 밖으로 내디딜 때, 그의 가슴은 얼마나 떨렸을까. 그리고 얼마나, 뜨거웠을까.
트럭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는 핸드폰과 무전기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30m도 채 가지 못하고 풀숲에 쓰러졌다.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신응국 씨의 가족들은 그가 영덕읍내에서 자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튿날이 돼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가족은 3월 26일 오전에야 실종신고를 접수했다.
남편 신 씨를 찾아나선 아내는 강 대원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강 대원은 “형수님 걱정하지 마이소, 어디 잘 숨어 있을 겁니다” 하고 애써 농담을 던지며 불안한 마음을 지웠다.
“나는 (3월) 25일, 26일, 27일 (의성부터 영덕까지) 불 끄러 다니느라 (신응국 씨가 사망하신 줄도) 몰랐다니까….”
경찰은 다음날인 27일 오전 10시께, 신 씨를 발견했다. 양팔이 접힌 채 웅크리듯 옆으로 쓰러진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트럭은 ‘전소’된 채 발견됐다. 주변에서 새까맣게 탄 신 씨의 핸드폰과 무전기도 발견됐다.
“실종 신고하고 나서 핸드폰 위치를 조회해보니까 제일 가까운 기지국이 매정리 인근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거기 주변을 계속 찾았어요. 여기가 (기지국으로부터) 반경 2km나 되니까 여기인 줄 몰랐죠. 발견 당시에 (사고 현장) 도로 입구에서 전기공사를 해서 막혀갖고 들어올 수도 없었어요. (…)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안 보여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자기 마지막 모습을.”(아들 신정우 씨)


가족들은 3일 동안 장례를 치렀다. 제 가족이 불길에 쫓기는 것도 모르고, 제 과수원이 잿더미로 변하는지도 모르고, 산불로부터 지역사회를 지키러 나갔다 목숨을 잃은 사람. 하지만 군민들이 그를 추모할 수 있는 분향소는 마련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다 오셨어요. 군의회 의장도 오고, 경북도의원도 오고. (김광열) 영덕군수가 장례식장에 왔을 때 ‘최대한의 예우’를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봤을 때 지금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일단은 순직이 인정돼야 해요. 그리고 어머님이 혼자 사셔야 되니까 군에서 도움 줄 수 있을 만큼만 보장해주면…”(아들 신정우 씨)

영해면사무소 뒤편 산불감시원 대기소. 신응국 씨는 2011년부터 14년간 산불감시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더 이상 신 씨의 무전기도, 근무복도, 산불감시 장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근무일정표에 적힌 신 씨 이름 위에는 까만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건 자필로 쓴 근무일지뿐이었다.
“베풀 줄도 알고, 남의 입에 잘 안 오른다 카죠. 입에 오를 게 없죠. 열심히 하고, 동료들끼리 사이 좋고. 근무시간, 자기 근무지 순찰, 뭐든 어김이 없었다니까.
출근이 오전 9시다 하면 그 사람(신응국 씨는)은 오전 8시 반 되면 (산불감시원 대기소로) 나와가 청소하고 준비해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장이 ‘나가시오’ 하면 사인하고 나가고… 어김이 없는 사람이었어요.”(강재덕 산불예방전문진화대 대원)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신 씨는 올해 5월까지만 산불감시원 일을 하려 했다. 그와 함께 동고동락해온 차필진(가명) 영해면 산불감시원 반장이 한숨과 함께 해준 말이다.
“원래는 올해까지만 (산불감시원) 하려고, 작년에 저기 밭을 또 새로 샀다니까. 이거(산불감시원) 올해 5월까지만 하고 아들내미하고 농사 짓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돼 버렸으니까….”
산불감시원은 지역 산림보호업무를 위해 산불이 많이 나는 봄철·가을철 시기에 지자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다. 유가족은 지난 4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산재 인정과 함께 유가족이 기다리는 것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순직 인정이다. 비록 공무원이 아니지만, 공무수행사망자로 순직이 인정될 수 있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 아닌 근로자가 공무수행 중 사망한 경우, 공무원과 동일하게 순직 인정 및 예우 등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있다.
“최대한의 예우”를 약속했던 영덕군.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지만, 유가족의 입장에선 변화된 건 없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기다리기만 하면 모두 해결되는지 유가족은 답답할 따름이다.
주불 진화에만 149시간이 소요된 경북 지역의 ‘괴물 산불’. 경북 지역 산림피해면적은 9만 9289ha로 집계됐다.(4월 18일 산림청) 서울시 면적의 1.65배다. 주택, 농업시설, 국가유산 등 총 8200개소가 불타고, 2941명의 주민이 대피했다(4월 12일 중대본 발표). 피해 복구비로 1조 810억 원이 추산됐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복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경북에서만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7번 국도 옆 산길에서 숨을 거둔 산불감시원 신응국 씨처럼.


봉분 없는 무덤. 유가족은 집 뒤 과수원 옆에 신 씨를 모셨다. 향년 69세. 시신이 온전치 못해 화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원순희 씨의 뜻에 따라 봉분 없는 평묘를 택했다. 신 씨의 묘는 그의 부모님 묘 사이에 자리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나라 일 하다가 돌아가신 건데,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첫째(손녀)는 누가 물어보면 ‘할아버지가 영덕군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이렇게 얘기해요. 할아버지가 손녀들한테는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아들 신정우 씨)
손녀딸이 어버이날에 갖다 놓은 카네이션이 신 씨의 묘를 지켰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