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당할 게 뻔한 기획 보도여서 동료에게 일을 맡기는 게 미안했다. 맞은편에 앉은 김보경 기자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게요.”

고소 공포보다 막힌 코 뚫는 게 급해 보였다. 내가 “괜찮겠냐?”고 물자 김 기자는 또 짧은 코맹맹이 소리로 “아니, 뭐…” 하며 웃었다. 

비염이 있는 김 기자의 코맹맹이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다. 출장 가는 ktx 안에서, 함께 밤샘하는 작업실에서, 회의실에서, 술집에서, 기사 다시 쓰라는 내 요구에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어버버 할 때… 김 기자는 어김없이 코를 훌쩍였다.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그날의 “아니, 뭐…” 콧소리는 유난히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코는 뚫어주지 못하더라도 <셜록>에서 일하는 동안엔 취재의 길이라도 잘 열어줘야겠다고, 나는 제법 꼰대 같은 생각을 했다. 

상대는 <동아일보>, 하나고등학교, 검찰, 하나은행 등인데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겠나. 미안하면서도 믿음이 가는,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기획 ‘입시에서 채용까지, 동아 가족이 남긴 그림자’는 그렇게 출발했다.

2017년 여름, 김보경 기자를 처음 만났다. <셜록>과 카카오가 탐사보도 기자학교를 열고 교육생을 모집할 때였다. 인생에선 우연한 타이밍이 중요할 때가 있는데, ‘김보경과 친구들’이 그 기회를 잡았다. 

2019년 여름, 대구 영남공고 사학비리 문제 취재할 때 모습.

이들은 자기들이 면접 마지막 순번이라며 오히려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거꾸로 면접’이 진행됐고, 거의 만담 수준의 온갖 말들이 오갔다. 그땐 김보경에게 비염이 있다는 걸 몰랐다. 김보경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김보경은 대학 3학년이었다. 

기자학교도 끝나고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갔다. 2018년 2월, 우연한 타이밍을 잡아 나와 만담을 즐겼던 ‘김보경의 친구들’을 서울 합정역 인근으로 불렀다. 일단 고기부터 왕창 먹였다. 난 다 계획이 있으니까, 일단 배불리 먹였다. 

2차 맥줏집에 가서 내가 친구들에게 툭 던졌다.

“여기서 누가 제일 성실해요?”

친구들은 모두 “김보경이 제일 어린데, 가장 성실하다”고 말했다. 오케이, 이걸로 고깃값이 아깝지 않게 됐다. 이때도 김보경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코맹맹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김보경은 종종 코만 훌쩍였다. 

얼마 뒤 김보경에게 직접 전화했다. 내가 “나중에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더니, 김보경은 “지금 보자”고 했다. 그날 만나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김보경은 고양시에서 내가 사는 서울 마포까지 튀어왔다. 정말 ‘당장 튀어왔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총알처럼 날아 왔다. 

김보경은 “주말에 카페 알바를 하며 언론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주말에 일하면 월 얼마를 받습니까?”

“30만원 정도요.”

“내가 그 돈 줄 테니까… <셜록>에서 알바 해볼래요?”

2018년 3월, 김보경은 <셜록>에서 ‘왓슨’과 주로 소통하는 알바를 시작했다. 그때 김보경의 꽤 심한 코맹맹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 약도 없다는 불치병, 비염이 분명했다.

알바를 해도 서로 얼굴 볼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때 되면 급여만 지급했다. 친구들이 가장 성실하다고 했으니, 일은 믿고 맡겼다. 김보경에게 회사 메일 관리를 맡기고 급여도 올려줬다. 

대구 영남공고 취재할 때, 강철수 교사와 함께.

<셜록>이 양진호 위디스크 회장을 보도할 때, 김보경이 내 ‘오더’를 받고 기사 하나를 썼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뭘 쓰긴 썼다. 첫 기사여서, 당연히 엉망이었다. 

해가 바뀔 무렵 회사 메일을 관리하던 김보경이 사고(?) 하나를 쳤다. 김 기자가 조심스럽게 전화로 걸어, 공기 반 코맹맹이 반 소리로 말했다.

“저기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몰랠 동물을 안락사 한다는 제보가 왔는데요. 이미 제가 좀 알아봤어요…”

어쭈, 이 친구 봐라. 그 좋은 제보를 받고선 선배들에게 공유하기 전에 본인이 꽉 움켜쥐고 밑취재를 진행한 거다.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기특했다. 내 눈치를 살피는지 김 기자는 코맹맹이가 더 심해진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케어> 문제… 제가 취재해봐도 될까요?”

회원과 회사 메일 관리하던 알바생이 제보를 움켜쥐고 취재를 허락해 달라는 상황. 이걸 거부하면 무능한 사장이다. 나는 오케이 했다. 김보경의 취재를 위해 때로는 운전을 해줬고, 취재비를 지원했다. 함께 밤샘을 하기도 했다. 비밀 안락사의 책임자 박소연 <케어> 대표는 김보경에게 무너졌다.

이쯤되면 더 볼 것도 없다. 알바생 김보경은 수습기자가 됐다. 그때부터 나랑 숱하게 대구를 오가며 영남공고를 취재했다. 영남공고 허선윤 이사장은 구속됐고, 학교는 정상화 됐다. 김 기자가 많은 힘을 보탰다. 내가 준 건 월급과 법인카드뿐이다. 

사장인 나와 갑자기 대구로 출장 간 김보경 기자. 일명 ‘쓰레빠’를 신고 있다.

2019년 9월, 김보경 기자는 수습을 마치고 <셜록>의 정식 기자가 됐다. 2021년 4월, 김 기자는 나와 함께 <동아일보>, 하나고, 검찰, 하나은행을 상대로 한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고소당할 확률이 99.999 정도 되는 사안이다. 상대방은 딸 문제를 거론하면 대개 그렇게 했다. 5일 아침, 마지막으로 김 기자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집에선 걱정 안 하십니까?”

“집에선 뭐.. ㅎㅎ 괜찮습니다.”

메신저에 목소리 전달 기능이 없으니, 나는 김 기자의 코맹맹이 소리를 못 들었다. 하지만 상상은 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만나 벌써 5년이 흘렀다. 김보경 기자는 그동안 많이 성장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셜록>은 김 기자 덕분에 쑥쑥 자랐다. 회사만 커진 게 아니다. 사람도 얻었다. 

최근 모 변호사와 모 의원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내가 똑같은 말을 했다.

“김보경 기자 잘 있죠? 나 김보경 기자 너무 맘에 들어!”

2019년 여름, 서울 연남동 카페에서. 김보경 기자와 둘이 찍은 사진은 이게 유일하다. 하긴, 노동자가 사장이랑 꼭 사진 찍을 필요는 없지 뭐. ©정성은

좋은 동료와 일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곧 김보경 기자와 나는 함께 경찰에 출석할 거다. 최근 내가 다시 “괜찮냐?”고 물었다. 김 기자는 “아니, 뭐…” 하며 또 웃었다.

어김없이 코맹맹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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