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아이들’의 희망이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열다섯 살 박수빈(가명) 군은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없었다. 식도가 폐쇄된 채로 태어나 출생 하루 만에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오른쪽 눈도 발달이 늦어 여섯 살 때까지는 거의 한쪽 눈으로만 생활했다.

열여덟 김민준(가명) 군은 벌써 네 번째 수술을 겪었다. 막 걷기 시작할 때 받은 방광 수술과 세 살 무렵 받은 선천성 지방종 제거 수술, 초등학생 때 받은 신장 조직검사를 위한 개복 수술, 신장질환 악화를 막기 위해 작년에 받은 편도 절제 수술까지. 왼쪽 신장 없이 태어난 김 군의 오른쪽 신장은 제 기능을 10%밖에 하지 못한다.

스물네 살 이준효(가명) 씨는 ‘선천성 거대결장증’을 앓고 있다. 대장의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 기능을 잘 못한다. 그는 돌이 갓 지났을 때, 제 기능을 못하는 대장을 잘라내고 소장과 직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는 배변조절이 어려워 일상에서 크고 작은 불편을 겪었다.

이들의 엄마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삼성반도체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 엄마들은 모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면서 임신 중 유해화학 물질을 취급했고, 후에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엄마들은 10대 때 삼성반도체 공장에 입사해 최소 8년에서 최대 12년을 근무했다.

엄마들이 취급한 유해화학 물질 중 상당수는 생식독성을 띤 물질이다. 생식독성물질은 사람의 생식기능, 생식능력 또는 태아의 발생·발육에 유해한 영향을 주는 물질을 말한다.

즉, 이들이 취급한 유해화학 물질이 자녀의 선천성 장애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반도체 사업체에서 일하는 30대 여성 노동자들이 다른 직종 여성 노동자보다 최대 94% 가까이 더 자연유산 진료를 받는다는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민준(가명) 군이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바라보고 있다 ⓒ주용성

아픈 몸으로 태어난 아이를 보며 자책만 하던 엄마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한 계기였다. ‘선천성 무신장증’과 ‘식도폐쇄증’을 앓는 박수빈 군을 낳은 김성화(가명) 씨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저는 회사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가족력 때문에 아이가 아픈 걸까 고민했죠. 저나 남편한테서 원인을 찾고, 서로 자책하는 걸 반복했어요. 그런데 저랑 남편은 둘 다 너무 건강하거든요. 주변에 알아보니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본인이 아프거나 혹은 유산한 사례가 참 많더라고요. ‘정말 회사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셜록 <식도 폐쇄, 무신장증.. 반도체 아이를 아십니까> 2021. 7. 19.)

‘내 탓’을 넘어선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의식. 이런 인식의 변화가 다른 엄마들에게도 일어났다. 세 엄마들은 2021년 5월 20일 “엄마의 직업병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하지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상법)은 엄마의 업무상 요인으로 인해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산재보상법상 보험급여는 근로자만 받을 수 있는데, 노동능력이 없는 태아는 아예 청구권이 없다고 봤다.

사실 반도체 노동자 출신 엄마들보다 앞서 ‘태아산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이들이 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2012년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는 자녀에 대한 산업재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했다. 약 10년 전 일이다.

2009년~2010년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았다. 비슷한 시기 5명의 간호사가 아이를 유산했다. 간호사들은 자연스럽게 업무 환경을 의심했다. 하지만 자녀의 질환은 엄마 ‘본인의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약 10년간의 행정소송 끝에 2020년 4월 ‘아이의 치료비를 근로자인 엄마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산재보상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한 몸’, 즉 ‘본성상 단일체’로 취급된다. 태아는 모체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모와 함께 근로현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새 길을 개척한 아버지도 있다. 삼성LCD 노동자 출신 최현철(가명, 41) 씨는 2021년 12월 1일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해 선천성 희귀질환을 앓는 아이에 대한 태아산재를 인정해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그의 아들 최지후(가명, 15) 군은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앓고 있다. 이 병은 시각신경 이상, 난청, 심장질환, 생식기 이상, 발달장애 등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게 특징. 1만 명당 한 명 꼴로 앓는 선천성 희귀질환이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해 7월부터 진행한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아픔’ 프로젝트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는 산재보상법 개정을 촉구했다.

엄마 김혜주(가명) 씨와 아들 김민준(가명) 군이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바라보고 있다 ⓒ주용성

태아산재 부모들과, 또 그들과 함께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노력으로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산재보상법 개정안이 2021년 12월 통과됐다. 산재보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유해환경으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해 보험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다. 일명 ‘태아산재법’은 내년 1월 12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이 경우 그 출산한 자녀(이하 “건강손상자녀”라 한다)는 제5조제2호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할 때 해당 업무상 재해의 사유가 발생한 당시 임신한 근로자가 속한 사업의 근로자로 본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법안 제정 취지를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7일 개정된 산재보상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다. 시행령 안에 ‘제34조의2(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를 신설한 것. 문제는 해당 규정에서 인정하는 유해요인의 범위가 너무 좁은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유해인자는 ▲화학적 유해인자 17종 ▲ 방사선, 고열작업에 따른 물리적 유해인자 ▲임산부의 업무 수행 중 노출과 자녀의 건강손상의 관련성이 의학적으로 인정된 대표적 유해인자 등이다.

고용노동부는 건강손상자녀 화학적 유해인자 선정 과정에서 애초에 1484개의 화학물질을 고려했다. 하지만 유해성, 취급사업장 수, 동물실험 유무 등을 기준으로 화학적 유해인자 27개만 남겼다. 입법예고된 시행령안은 여기에서 더 줄여 단 17개의 화학물질만 포함했다.

이를 두고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은 9월 28일과 10월 17일 두 차례 입장문을 발표해, “태아산재보상법을 무력화하는 고용노동부의 시행령 정치”라고 규탄했다.

반올림은 “해당 시행령은 태아의 건강에 미칠 수 있는 1484가지 화학물질 중 17가지만 담은 것으로 판단기준을 매우 협소하게 인정했다”면서, “피해자들이 산재신청조차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반올림은 “법의 (개정) 취지에 맞으려면 고용노동부가 말하는 단 몇 가지 유해요인이 아니라 자녀의 건강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유해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셜록과 반올림은 시민들의 이름으로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추진한다 ⓒ셜록

시행령안이 유해화학물질을 협소하게 인정하면서, ‘반도체 아이들’의 희망 또한 10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이에 <셜록>과 반올림은 법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시행령 제정을 요구하고자, 시민들의 이름으로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추진한다.

고용노동부는 행정절차법에 따라 다음달 28일까지 산재보상법 시행령 입법예고(안) 관련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태아산재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시행령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서를 시민들의 이름으로 제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올림은 태아산재법 시행령에서 인정해야 하는 화학적 유해인자 요인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반올림은 우원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 노원을구)과 함께 산재보상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마련했다.

가. 이산화황, 일산화탄소, 이황화탄소, 1,3-부타디엔, 2-브로모프로판, 사염화탄소, 시안화 은 칼륨, 벤젠, 스티렌, 톨루엔, 크실렌, 메틸파라벤, n-프로필 파라벤, 폴리염화비닐, 프탈레이트, 테트라브로모비스페놀A, 트리페닐인산, 옥타메틸사이클로테트라실록산, 가솔린, 리그로인, 스토다드 솔벤트, 솔벤트 나프타, 납, 니켈, 수은, 유기수은, 카드뮴 등 인간대상 역학연구가 있고 동물실험에서 선천성 기형 발생과의 관련성이 명확한 물질

나. 태아나 자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해성·위험성이 있어서『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자의 노출기준』에서 생식독성 물질 또는 생식세포 변이원성 물질로 분류된 물질

다. 『근로기준법 시행령』 별표 4 임산부 사용금지 직종에 포함되는 취급물질

<셜록>은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왓슨’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진하려 한다. 의견제출 취지에 동의하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연결된 서식에 성명과 주소, 전화번호를 기재하면 된다.

수빈이, 민준이, 준효, 지후…. 태아산재법은 이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반도체 아이들’의 고통이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대로 된 태아산재법이 이들의 희망을 지키고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더 많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시길.

[☞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일명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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