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산재’ 보장을 항한 여정은 우연에서 출발했다. 그날따라 기사 제목에 써 있는 ‘대물림’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아들은 엄마 잘못 만난 죄밖에 없어요”…’대물림된 반도체 산재 직업병'(2021년 5월 20일자 서울신문)

산재 직업병이 대물림되다니, 제목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다. 기사를 자세히 읽어봤다. 삼성반도체 출신 여성노동자 3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태아산재’를 신청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들은 모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면서 임신 중 유해화학 물질을 취급했고, 후에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엄마들은 10대 때 삼성반도체 공장에 입사해 최소 8년에서 최대 12년을 근무했다.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은 2021년 5월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엄마의 업무상 유해환경으로 인해 선천성 질환이나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녀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산재보상보험법에선 건강손상 자녀들에 대한 산재보상 즉, ‘태아산재’를 보장하지 않았다.

“국회는 2세 질환에 대한 산재법을 만들어 우리 자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달라.”(위 기사 중 피해자 발언 발췌)

임신 중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환경에 의해 배 속 태아가 아플 수도 있다니. 그래서 국가가 나서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보상해야 한다니. 산업재해 기사를 다룬 적도, 육아 경험을 해본 적도 없는 내가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부끄럽게도, 이전까지 나는 임신노동자의 건강은 물론 배 속 태아의 안전을 염려해본 적 없었다. 임신노동자 하면 가장 먼저 사무직이 떠올랐고, 회사에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정도만 잘 보장해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반도체 공장에 임신노동자가 거의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고 있을 줄은, 회사에서 ’친히‘ 임부용 방진복까지 마련해주면서 임신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뜻밖의 문제의식을 갖게 된 난 이 여정에 합류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해 5월부터 기획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슬픔’을 통해 ‘태아산재’를 보장하는 산업재해보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집중 보도했다.

2021년 5월 20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열린 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 ⓒ반올림 제공

희정 작가도 나와 비슷한 부채 의식을 느꼈던 걸까. 희정 작가는 임신노동자의 노동권과 ‘태아산재’ 문제를 다룬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오월의봄)을 이달 출간했다. 작가는 책 도입에서, 노동전문 작가였지만 그동안 임신노동자의 노동권 문제를 놓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들이 이상을 호소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자녀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자녀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됐다. 이들이 수정란, 정자, 태아와 같은 상태로 존재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반도체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건강을 묻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도 임신한 노동자의 건강을 염려해본 적이 없었다.(<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8쪽)

일명 ’태아산재‘는 그동안 문제로 인식조차 되지 못한 문제였다. 희정 작가가 책 제목을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누군가에겐 아직도 생소한 ‘태아산재’라는 개념을, 어떤 이들은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증명했다.

여성가족부는 2017년 산업재해보상보험에 대한 특정 성별 영향분석 평가를 실시했다. 보고서는 여성의 업무상 질병 인정률(36.5%)이 남성(46.8%)에 비해 10% 정도 낮은 수치를 보이는 등, 산재 인정 과정에서 성별 격차가 있다고 밝혔다. 산업재해 인정 기준이 제조업에서 발생하는 사고성 재해에 대한 보상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점이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은 건 사회가 여성노동자의 안전과 건강권에 무관심한 탓이 컸다.

이 때문이었을까. 내가 만난 ’태아산재‘ 피해자들도 업무상 유해환경으로 인해 자녀가 아플 가능성을 애초 생각하지 못했다. 아픈 아이를 보며 원인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엄마들이 할 수 있는 건 자책뿐이었다. 이현주 우송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는 피해자들이 숨는, 혹은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기자와 인터뷰 당시 이렇게 설명했다.

“태아산재의 의미가, 아이가 아픈 게 엄마 탓이 아닌 업무상 요인에서 비롯된 산업재해라는 걸 인정해주는 차원이잖아요.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가 선천적으로 아픈 부분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본인을 탓합니다. ’내가 그 회사를 다녀서 우리 애가 아프구나‘라는 식으로요. 인식 전환 차원에서도 태아산재를 잘 정착시킬 필요가 있는 거죠.”

내 탓을 넘어선 인식 전환을 이룬 부모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했다. 앞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태아산재를 신청한 엄마들이 바로 이들이다. 엄마들은 서서히 ‘회사 때문에 내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픈 건 엄마, 아빠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야.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어.”(<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104쪽)

엄마 김수정(가명)씨가 어린 시절 ‘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냐’고 묻는 아이에게 한 말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출신 김 씨는 18년 전 선천적으로 신장 없이 태어난 이주환(가명, 19) 군을 낳았다. 일상의 고통을 견뎌내고 전선에 뛰어든 부모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희정, 오월의봄, 2022. 10.) ⓒ셜록

분명히 더 많은 피해자들이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기자는 직접 사례 발굴에 나섰다. 인터넷 커뮤니티 수십 곳을 방문하며 의심 사례를 찾았다. 시민단체, 환우회, 노조 등 26곳에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아쉽게도, 통화는 대체로 짧게 끝났다.

“직업환경에서 태아가 위험할 순 있겠네요. 다만, 아직까지 아픈 아이를 출산했다고 알려진 사례는 없습니다.“

제보를 받는다는 글도 인터넷 사이트에 수차례 올렸다. 항공기 승무원, 보건의료업, 플라스틱 제조업, 미용사, 실험실 근무자 등 다양한 일상 직군의 사례를 찾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돌아온 응답은 없었다.

피해 사례를 찾는 일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오랜 기간 피해자들을 접촉해온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도 당사자 접촉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오히려 언론에 나서서 인터뷰 하시고, 산재신청도 하시는 분들은 과거보다 자녀의 건강이 많이 나아지신 분들이에요. 소아암이나, 소아백혈병 등 지금 당장 자녀의 병마와 싸우는 분들은 인터뷰 할 여유조차 없으시거든요.”

조 노무사 말대로, 부모의 업무 환경으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어도 현실적인 이유로 나서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상당수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직업환경이 자녀의 선천적 건강손상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애초에 의심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암흑 같은 상황에서, 삼성반도체 출신 여성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한 태아산재 신청은 한국 사회에 화두를 던졌다. 누구나 일하다 죽거나 다치면 산재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사회에서, 부모의 노동환경 탓에 선천적으로 아픈 아이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말이다.

‘태아산재법’ 국회 통과 이후인 2021년 12월 14일, 법 통과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대전 대청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김보경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 조승규 반올림 노무사, 이현주 우송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조성애 공공운수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 ⓒ김보경

이런 개인들의 노력으로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산재보상법 개정안이 2021년 12월 통과됐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고용노동부가 개정된 법의 시행령안을 지난 18일 공개했는데, 유해요인의 범위를 너무 좁게 인정했다. 고용노동부는 화학적 유해인자로 애초 1484개의 화학물질을 고려했지만, 시행령안에 단 17개만 반영됐다.

시행령안이 유해화학물질을 협소하게 인정하면서, ‘반도체 아이들’의 희망 또한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법은 통과됐지만, 해결은 아직 난망해 보인다. 현실적으로 피해자들이 산재보상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만 생겼을 뿐 달라진 건 없다. 태아산재 신청은 했지만, 산재로 인정될지는 미지수라는 의미다. 태아산재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은 여전히 약을 달고 살고, 엄마들은 여전히 아픈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지만, 나도, 반올림도, 희정 작가도 각자의 위치에서 계속해서 힘을 보태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태아산재 문제가 나의 잘못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359쪽

희정 작가의 소망처럼, 나 역시 기사를 쓰는 동안 생각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아픈 이유가 내 탓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고.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피해를 부정당하는 이 외로운 싸움에 작지만 굳건한 힘을 보탠 이유다.

 

※ 아이들을 살리자고 법을 만들었지만, ‘시행령 정치’ 앞에 가로막혔습니다.

내년 1월부터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산재보상법이 시행됩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의 시행령은 1484개 화학물질 중 단 17개만을 유해인자로 인정했습니다.

<셜록>은 ‘태아산재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진하고자 합니다.

수빈이, 민준이, 준효, 지후… 태아산재법은 이 아이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입니다. 제대로 된 태아산재법이 이들의 희망을 지키고,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더 많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세요.

[☞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일부개정안(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