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제 아이가 산업재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평생 아픈 것도 가슴에 한이 되고 아들에게 한이 되는데, 산재마저 인정받지 못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꼭 시행령을 바꿔주세요.”(태아산재 피해자 김은숙 씨)

‘반도체 아이들’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시민 800명이 힘을 모았다. 시민 803명은 28일 ‘태아산재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에 대한 의견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태아산재’는 부모의 업무 환경 탓에 발생한 자녀의 선천성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지난 한 달 동안 시민들의 이름으로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추진했다.

2022년 11월 28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태아산재법 시행령 촉구 기자회견’ ⓒ셜록

일명 ‘태아산재법’은 내년 1월 12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유해환경으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해 보험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다.

<셜록>은 지난해 5월부터 기획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슬픔’을 통해 ‘태아산재’를 보장하는 산업재해보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집중 보도했다. 태아산재 피해자 부모들과 각계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산재보상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통과됐다.

그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17일 개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다. 신설안으로 ‘제34조의2(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를 제시했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유해인자는 ▲화학적 유해인자 17종 ▲ 방사선, 고열작업에 따른 물리적 유해인자 ▲임산부의 업무 수행 중 노출과 자녀의 건강손상의 관련성이 의학적으로 인정된 대표적 유해인자 등이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추진하고 있는 시행령은 유해요인을 협소하게 규정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화학적 유해인자 선정 과정에서 애초에 1484개의 화학물질을 고려해놓고선, 막상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에선 단 17개의 화학물질만 포함한 것이다.

시행령이 오히려 법률의 제정 취지를 후퇴시키고 있는 상황. 이에 <셜록>과 반올림은 “태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을 폭넓게 인정하도록 시행령을 바꿔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작성해 지난달 21일부터 약 한 달 동안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김보경 기자(오른쪽)가 28일 ‘제대로 된 태아산재법 시행령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셜록

‘태아산재법 시행령 입법예고안’ 의견서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먼저, 유해화학 화학물질을 더 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가 추진하고 있는 시행령안은 근로기준법상 임산부 사용이 금지되는 화학적 유해인자 17종 중 단 5개(납, 벤젠 등)만 포함한다. 현행 근로기준법 시행령에선 임산부 등의 사용금지 직종으로 비소, 황린, 불소, 염소 등 화학적 유해인자 17종을 취급하는 업무를 명시하고 있다.

반올림은 “현행의 의학적 연구 수준에서 태아건강손상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의학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화학적 유해인자를 넓혀서 산재신청의 접근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는, 태아에게 기형을 유발할 수 있는 약물을 추가로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장에서 취급하거나 노출되기 쉬운 항암제, 살충제, 소독제, 제초제 및 마취제도 유해인자에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반올림은 “살충제, 제초제 등은 공원관리 노동자가 다량으로 취급하고 있으나, 보호장비 지급이나 착용관리가 취약해 반드시 유해요인에 추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은 유해요인에 대한 사회적 인정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태아산재 관련 의학 연구가 부족한 상황인 걸 고려할 때 엄격한 의학적 기준이 아닌, 사회적 인정기준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가운데)가 28일 ‘제대로 된 태아산재법 시행령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셜록

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태아산재법 시행령 입법예고안’ 의견서 제출에 지난 한 달간 803명(중복 제외)의 시민들이 함께했다. <셜록>과 반올림은 28일 오후 고용노동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장교동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는, 제대로 된 시행령 제정과 역학연구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은 <셜록>과 반올림을 비롯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가 함께 개최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출신 김은숙 씨는 이날 기자회견에 발언자로 참여했다. 김 씨는 1991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약 8년을 일하다 임신 11주차에 퇴사했다.

김 씨의 아들 A 씨는 신경이 미발달해 대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선천성 거대결장증’을 앓고 있다. A 씨는 대장 전체를 잘라내고 소장과 직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배변장애로 일상 속 크고 작은 불편함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김 씨 역시 삼성반도체 퇴사 이후 여러 질병을 얻었다. 김 씨는 갑상선암, 류마티즘, 수두증, 뇌전증, 자궁 이형성증을 앓으며, 최근 5년 동안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현재도 일주일에 두 번씩 재활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다니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다리를 보여주며) 나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지만, 더 가슴 아프고 제일 힘든 건 우리 아이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태아산재법이 통과돼 아이만이라도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태아산재법 시행령에서 반도체 산업의 독성물질을 다 빼버리면서 아이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 아이가 태아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시행령을 잘 만들어주세요.”(김은숙 씨)

김은숙 씨의 발. 장애 때문에 김 씨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발이 떨렸다. ⓒ셜록

발언자로 참여한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는 고용노동부를 향해 태아산재 관련 역학연구를 촉구하기도 했다.

조 노무사는 “어떤 유해요인이 어떻게 태아의 건강손상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해 연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고용노동부가) 뒷짐만 져선 안 된다”며, “고용노동부는 태아산재에 대해서도 직종별 역학연구를 통해 위험도를 분석하고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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