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이었습니다. 제 페이스북 피드에 한 사람의 부고가 떴습니다. 몇 시간 뒤 또 접속해보니, 몇몇 사람들이 애도의 글을 올렸습니다. 누가 돌아가셨나 보다, 그냥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추모의 글은 계속 올라왔습니다. 게시물을 올린 이들은 대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수십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습니다.
‘대체 어떤 분이 돌아가셨길래?’
그때부터 게시물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처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마다 고인에 대한 기억을 곱씹으며, 진심으로 애통한 마음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던 한 단어. 바로 ‘밥’입니다. 애도 게시물을 올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바로 고인이 차려준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해본 사람 치고, 유희 동지의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요?”(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추모의 글 중에서)
저는 그녀를 몰랐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도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어봤다는 그녀의 ‘밥 한 끼’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게 더 미안했습니다. 얻어먹어서 미안한 게 아니라, 얻어먹은 적이 없어서 미안했습니다. 그녀가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해본 사람”들의 곁에서 밥을 짓고 나눠온 30년 세월. 그 세월 동안 저는 그녀의 ‘현장’에 있어본 적 없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외상 밥값을 갚는 마음으로, 그녀가 남긴 이야기들을 모아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유희’입니다. 1959년생. 그녀는 노점상이었습니다. 30년 전인 1990년대부터 그녀는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밥을 나눴습니다. 최정환 열사와 이덕인 열사의 죽음을 겪으며, 투쟁 현장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습니다.
2000년대에는 공장에서 쫓겨난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으로 밥을 지어 나누는 등 노동자들의 투쟁에 본격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검정색 ‘세단’에 밥을 싣고 전국의 농성장을 누볐습니다.
‘밥묵자’라고 부르던 이름은, 2017년 조리설비가 갖춰진 밥차를 마련하면서 ‘밥묵차’로 바뀌었습니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그 차로 방방곡곡 다니면서 ‘투쟁하는 사람이라면 안 먹어본 이가 없다’는 밥을 지었습니다.
노동자들만 찾아다닌 게 아닙니다. 쪽방촌과 판자촌을 다니며 음식과 연탄을 나눴습니다. 전국의 요양원을 다니며 목욕봉사와 ‘노래’ 봉사를 한 세월도 20년이 넘습니다. 많이 가져서 나누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트롯가수로 ‘알바’도 하고, 주점 주방일도 하면서 밥을 지었습니다. 나누기 위해 벌고,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나눠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녀의 식당은 언제나 ‘길’ 위에 있었습니다. 숨 막히게 더운 여름날.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햇볕과 칼바람을 피할 길 없이 길 위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밥을 지었습니다.
권리를 빼앗기고 존엄을 짓밟힌 사람들 곁으로, 그녀는 밥차를 몰고 나타났습니다.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삶터를 빼앗긴 빈민들, 참사의 진실을 밝히자는 부모들, 우리 산과 강을 지키자는 주민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자는 시민들을 위해 그녀는 밥을 나눴습니다.


밥값은 따로 없습니다. 그냥 “잘 싸우면” 됩니다.
“먹어야 싸우지! 싸워서 이겨야지!”
그녀는 “잘 싸우는” 사람들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은 바로, 가장 간절하고 가장 절박한 사람입니다. “잘 싸우는”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말은 곧, 가장 고통받고, 가장 눈물겹고, 가장 쓸쓸한 이들을 사랑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를 엄마(?)나 천사(?) 같은 이미지로만 상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땡. 틀렸습니다. 그녀는 ‘욕쟁이’ 큰언니입니다. 경찰과 용역들도 겁먹게 만드는 ‘싸움짱’이고요, 원칙 앞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강철여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의 배꼽을 노리는 ‘코미디언’이고, 무대를 찢어버리는 가창력과 퍼포먼스의 ‘명가수’입니다.
오렌지색 앞치마에 국자를 들고 밥을 나누다가, 반짝이 옷에 가죽부츠를 신고 트롯을 부르던 사람. 웃기도 잘하고, 웃기기는 더 잘했던 사람. 안타까운 투쟁을 지켜보며 울기도 잘 울지만, 싸움이 붙으면 어느새 최전선에서 ‘욕 폭탄’을 날리고 있던 사람. 언니 같고 누님 같은 말 한마디로 힘을 주고 다독이지만,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이들에겐 불같은 호통과 ‘등짝 스매싱’을 날리던 사람. 그 모두가 그녀였습니다.


“밥 먹었니?”
“밥 먹고 합시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우리는 밥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밥하는 일, 밥하는 사람을 그만큼 귀하게 여기고 있나요? 특히 여성들에게 밥 짓는 일은 ‘일도 아닌 일’로 하찮게 여겨진 세월이 길었습니다.
그녀의 밥을 먹어본 사람들은 아마도, 밥 짓는 일과 밥 짓는 사람의 가치를 한번쯤 더 되새겨보지 않았을까요? 그 역시 그녀의 삶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기회일 겁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나서야 그녀가 남긴 이야기들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7월 10일부터 8월 13일까지, 열다섯 명의 사람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그녀의 구술이 담긴 문서와 영상 기록, 녹음 파일도 구해서 찬찬히 읽고 보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서적과 논문 자료들도 여럿 읽고 참고했습니다.
취재를 마친 지금, 한 가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녀가 한 일은 단순히 밥을 짓고 나누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
그녀에게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모두 혼자 시작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같이 밥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밥은 못 지어도 나눌 때 돕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쌀값에 보태라며 돈을 보내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철마다 식재료를 보내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수직의 조직이 아니라 수평의 연대가 그녀를 튼튼히 떠받쳤습니다.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 크든 작든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라도 보태겠다는 마음. 그 선한 마음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일을 그녀가 해온 겁니다. 촘촘한 연대의 그물망으로 작고 약하고 힘없는 목숨들을 지탱하는 일. 그 중심에 그녀가 있었습니다.


“윤석열 파면”을 외친 지난겨울의 광장을 기억합니다. 손에 손마다 응원봉을 들고 모인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 직접 거리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없는 ‘선결제’ 릴레이로, 커피차와 오뎅차로, 핫팩 나눔과 난방차로 함께했습니다.
연결과 연대를 통해 함께 지킨 민주주의의 광장. 어쩌면 지난겨울 우리가 광장에서 목격한 그 기적 같은 순간을, 그녀는 매일같이 만들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겨우내 광장에 서서 질문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한강 작가)
그리고 확인했습니다. 현재를 돕는 과거를. 산 자들을 구하는 죽은 자들의 반짝이는 뜻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자리에서는 늘 이 노래가 불립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고 편안해지고 인간다워졌다면, 우리의 자리 아래엔 그들의 사랑과 명예와 이름이 보료처럼 깔려 있을 겁니다. 그들의 삶과 뜻을 다시 기리는 것으로, 오늘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 합니다.

하늘을 짓는 여자, 유희.
2024년 6월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5세. 그녀의 묘비에는 “밥은 하늘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녀가 직접 묘비명으로 써달라 한 말입니다. 맞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밥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짓는 사람입니다. 땅에서 디딜 곳 없이 밀려난 사람들에게, 평등한 하늘을 나눠준 사람입니다.
가장 낮은 곳을 지키며, 가장 높은 밥을 지었던 그녀의 삶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