췩- 췩- 췩- 췩- 췩- 췩- 췩- 췩-.
한창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곳은 사무실 옆에 딸린 작은 방. 무슨 소린가 가만 귀를 기울여보니, 아, 압력솥에서 김 나오는 소리다.
“지금 혹시… 밥을 하고 계신가요?”
“네, 맞아요.”
내 앞에 앉은 서선정이 겸연쩍은 듯 웃는다. 그리고 덧붙인 말.
“사실 사무실에서 제가 (직원들) 밥을 해준 지 5년 됐어요. (…) 늘 세상에 뭐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살려고 해요. ‘언니’에 비하면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서)

서선정은 1990년대 초반, 전국노점상연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시절. 일반 회사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잠시 일을 쉬고 있을 때였다. 친척의 부탁으로 “용돈이나 번다는 생각으로 몇 달만 다니자”며 시작한 일이었다.
서선정이 맡은 일은 회계 관리.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시 노점상 단체의 상태는 “이름만 있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첫날 출근해서 보니, 월세는 한 3개월 밀려 있고 회비는 어느 지역에서 냈는지 안 냈는지 알 수도 없었어요. 사무처장님이 주머니에서 3만 원을 꺼내 주면서 ‘이걸로 우선 필요한 거 사세요’ 하시더라고요. 장부 하나, 볼펜, 자, 이렇게 직접 사와서 일을 시작했어요.”(서)
출근한 지 사흘 만에 ‘위기’가 닥쳤다. 사무실에서 간부들끼리 싸움이 난 것. 회의 중에 일어난 의견 충돌이 감정싸움에 몸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쪽에서 의자가 날아가면 저쪽에선 재떨이가 날아왔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그땐 그랬지’ 같은 장면이다.
“너무 놀랐어요. 제가 눈을 이렇게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까, 사무처장님이 보기에 ‘얘, 내일부터 안 나오겠다’ 싶었나 봐요. 저보고 빨리 집에 가래요. 근데 또 다른 간부는 ‘우리가 원래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잘 설득해야겠다’ 생각했대요. 그래서 그 와중에 저를 ‘집에 보내야 된다’, ‘붙잡아야 된다’ 옥신각신 또 2차 싸움이 난 거예요.(웃음)”(서)
결국 서선정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책상 밑에 숨어 있었다. 속으로는 ‘용돈벌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워야겠다’ 생각하면서.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첫 출근 날 받은 ‘3만 원’. 볼펜 사고 남은 돈을 돌려주고 그만두려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됐다. 돌려주지도 못하고 떼먹을 수도 없는 ‘3만 원’ 때문에, ‘다음 사람 구할 때까지만 있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간부들은 아무래도 새로운 사람을 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언니’를 알게 됐다.
유희 언니. 서선정은 유희 언니 덕분에 세상을 바꾼다는 게 뭔지, 동지를 지킨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용돈벌이’ 삼아 얼떨결에 시작했다가, 사흘 만에 끝날 뻔했던 노점상 단체 활동. 그 활동을 10년 가까이 이어가며 활동가로 살 수 있었던 건 유희 언니 덕분이었다.

서선정과 유희가 처음 만난 그때, 유희는 서울 청계천에서 공구 노점을 하고 있었다. 1959년 서울 금호동에서 태어난 유희. 스무 살에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경제활동에 손을 놓고 있었다. 두 살 터울로 셋째까지 낳고, 스물세 살에 노점상을 시작했다.
어느 날 중부시장을 갔다. 닭똥집을 파는 아주머니를 봤다.
‘저걸 받아다 팔면 장사가 되겠다.’
유희는 아이를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창피해서 좌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성거리다 손님이 와서 “어머, 이거 누가 팔지?” 하면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가요” 하고 좌판으로 갔다. 당연히 먹고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1980년대 초였다. 아이를 맡기지 못하는 날은 업고 장사를 했다. 몇 년 뒤에는 청계천 세운상가 앞에서 노점을 했다. 공구도 팔고 카메라도 팔았다.
정부는 88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노점 단속에 나섰다. 탄압이 거셀수록 저항도 뜨거웠다. 1980년대 후반 폭력적인 단속에 맞서며 노점상들도 ‘조직’을 갖춰나갔다. 유희 역시 이 시기에 ‘노점상 운동’에 함께하게 됐다.
유희는 1990년대 초반 전국노점상연합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다. 서선정이 유희를 만난 게 이 즈음이다. 서선정은 그때를 “노점상 활동가들이 많이 배고팠던 시절”이라 기억했다. 자기 장사만 한다 해도 배불리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활동가들은 동분서주하며 ‘투쟁’까지 병행해야 했다. 그렇다고 단체에서 모두에게 활동비를 준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항상 배가 고팠어요. 차비가 없는 건 기본이고, 굶는 것도 다반사였죠. 저는 상근자라고 급여를 조금 주긴 했어요. 그런데 제 활동비로 매일 다른 분들 밥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만 나가서 밥을 먹기도 미안하고, 다 같이 굶는 날이 다반사였던 거예요.”(서)
그때부터였다. 유희가 나섰다. 노점상 활동가들과 ‘함께 먹을 밥’을 짓기 시작했다.

‘메인메뉴’는 주로 김치였다. 김치찌개만 끓여도 한 끼 든든히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사무실로 김치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노점상 회원들이 자기가 파는 채소들을 갖다주는 날도 있었다. 요리사는 언제나 유희. 서선정은 자연스레 설거지 담당이 됐다.
“오이 같은 거 들어오면 언니가 무쳐서 반찬 해주고. 호박이나 양파가 있으면 된장 풀어서 찌개 끓이고, 묵은지가 많을 때는 김치찜, 김치볶음, 김치찌개 이런 거 해주고. 언니 음식은 항상 맛있었던 기억이 나요. 언니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덕분에 항상 점심시간이 즐거웠던 거, 그런 기억이 나요.”(서)
그야말로 ‘한솥밥’을 먹은 지 석 달. ‘다음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일하겠다던 서선정의 생각도 차츰 바뀌었다.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유희 언니의 밥을 먹으면서 ‘아, 동지란 이런 거구나’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나도 어렵고 너도 어려울 때 서로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는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까. 출근 사흘째 되던 날 저를 두고 ‘얘가 내일 나올 것이냐, 안 나올 것이냐’ 싸웠던 분들, 또 유희 언니랑 같이 밥 해먹었던 사람들은 아직 연락하고 지내요. 그 동지들이 제일 그립고요.”(서)
노점상 단체 동지들을 위한 밥을 하던 유희. 그런데 1995년, 한 ‘사건’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밥을 짓기 시작했다. 바로 최정환 열사의 죽음이었다.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은 서울 방배역 부근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다. 1994년 6월에 서초구청의 살인적인 노점단속으로 한쪽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치료비를 받기는커녕, 장사를 다시는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이듬해인 1995년 3월, 최정환은 또 한 번 단속을 당해 스피커와 배터리 등을 빼앗겼다. 서초구청을 방문 압수된 물품을 찾으러 구청으로 갔지만 욕설과 비아냥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무기는 자신의 ‘목숨’밖에 없었다. 최정환은 온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최정환은 약 2주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최정환) 열사가 분신하고 영안실에 천여 명의 동지들이 모였는데, 음식을 대접하려니 돈도 없고. 그냥 직접 해보자, 굶길 수는 없으니. 큰솥에다 국 끓여 밥해서 나눴죠.” (유희 구술, <노들바람> 2019년 겨울호, 조재범 기록)
열사의 억울함을 풀자며 모여든 노점상과 장애인, 학생과 시민들. 잘 먹어야 잘 싸운다는 유희의 생각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 솥을 걸고 국을 끓였다. 밤새 솥 앞을 지키며 밥을 지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나중에는 생각도 잘 안 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더 이상의 죽음이 없었다면 유희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해 늦가을, 또 한 번의 ‘열사’ 투쟁이 시작됐다. 스물여덟 살의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이었다.

인천 송도 앞바다의 작은 섬 아암도. 1995년 인천시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며 용역 1500여 명을 투입해 노점들을 철거했다. 노점상들은 망루 위에 올라 저항했다. 경찰은 망루에 물대포를 쏘고 돌멩이를 던졌다. 음식물 반입과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했다. 이덕인은 고립된 망루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가 11월 25일 밤이었다.
이덕인이 시신으로 발견된 건 사흘 뒤. 진눈깨비가 “심란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당시 전국노점상연합 상근활동가였던 최인기는 책 <가난의 도시>에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1995년 11월 28일 몹시도 추운 겨울날 탑골공원에서 조정래 작가 노벨문학상 추천 발대식 및 서명대회가 열렸다. 양연수 씨가 추진한 이 행사에 조정래 작가와 출판사 관계자가 참석했고, 행사를 마친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당시 인천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사람들이 걱정되어 모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노점상 단체의 여성 부의장 유희 씨의 입담으로 분위기가 다소 좋아졌다.(…)
“삐삐 왔네. 확인하고 올게.”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가난의 도시> 84쪽)

노점상 활동가들은 인천으로 달려갔다. 전국노점상연합 부의장을 맡고 있던 유희도 함께였다. 연대하러 온 학생과 노동자들도 병원 영안실에 모여 시신을 지켰다. 다음 날, 경찰은 병원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얼마나 무섭게 들어오는지. 벽을 뚫고 저 높은 데서 유리가 깨지면 저기서 사다리 타고 들어오고. 경찰들이. 그리고 들어오면서 막 피가 팍팍 튀겨가지고, 그때 실명된 학생도 있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못하고 못 찾어. 피가 막 이렇게 좌아악 솟구치고 쏟아지는데 막 응급실에 데려가고.” (유희 구술, 비마이너 2019년, 최예륜 기록)
‘강제 부검’ 후 경찰은 이덕인의 사인이 ‘익사’라고 밝혔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시신에 선명하게 남은 구타의 흔적과 시신을 묶은 밧줄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농성이 시작됐다. 다음 해 4월까지 5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장례를 미루고 ‘진상규명’ 투쟁을 벌였다.
연대하기 위해 농성장에 모인 노점상, 장애인, 대학생과 노동자들. 유희는 특히 시신 탈취를 막다가 피 흘리고 경찰에 끌려간 대학생들이 눈에 밟혔다. 자기 일처럼 달려와 준 고마운 사람들이 밥을 굶으며 싸우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유희는 또 현장에 솥을 걸었다.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