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아저씨, 안 무서워요? 빨갱이란 소릴 듣고도?”

젊은 여성 노점상이 노수희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도 노수희는 서울 청계천 주변을 돌며 노점상들의 손에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사흘 전에도 왔던 곳. 그때는 노점상 중 누군가가 ‘여기 빨갱이가 나타났다’고 신고를 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런 소리야 뭐 항시 듣고 삽니다.”

노수희는 능청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역시 포장마차를 하던 노점상이었다. 때는 “군사작전 하듯 노점상을 쓸어버리던” 1980년대 후반. 단속이 강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저항도 거세졌다. 노점상들은 전국노점상연합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단속에 맞서기 시작했다.

노수희는 여성 노점상에게, 왜 단속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 왜 노점상 단체로 뭉쳐야 하는지 유인물에 들어 있는 내용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성 노점상이 또 물었다.

“근데 어디서 돈이 나와서 이런 걸 해요?”
“각자 우리 돈 내서 하는 겁니다.”

아직 회원들이 많지도 않지만, 회비 관리 같은 조직의 체계가 갖춰지기 전이었다. 초창기 활동가들은 자기 돈을 부어가며, 급할 때는 “일수 돈도 얻고 달러 빚도 얻어가며” 활동했다.

얘기를 들은 여성 노점상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인 듯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에도 한번 들르세요.”

다음 만남에도 여성 노점상은 노수희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노수희는 똑 부러지는 성미에 총기 넘치는 그녀의 눈빛이 인상에 남았다. 그 여성 노점상의 이름은 ‘유희’였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유희 ⓒ유희 페이스북

세 아들을 낳고 스물세 살에 시작한 노점상. 그때는 단속반이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면, 노점상들은 돈을 걷어서 주머니에 찔러넣어 줘야 했다. 유희는 돈을 걷는 총무 역할을 했다.

유희의 나이 서른 즈음에 ‘노점상 운동’이란 걸 처음 만났다. 노수희와 양연수 같은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노점상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걸 알기 시작했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자기 점포가 있으나 없으나, 모든 인간에게 보장돼야 하는 권리. ‘생존권’이었다.

활동가들은 유희에게 집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무시무시한 ‘데모’?

“어이구, 저 데모 안 가요!”

그럼 대신 다른 데를 한번 가보자고 했다. 장사를 잠깐 접고 일단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서울 돈암동 ‘철거촌’이었다. 88올림픽 전후로 정부는 서울 시내에서 두 가지를 싹 ‘쓸어버리려’ 했다. 하나는 길거리의 노점상. 또 다른 하나가 ‘산동네’였다.

유희의 눈앞에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다. 곳곳에 부서진 집과 얼기설기 임시로 엮어놓은 천막.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유희는 거기서 놀라운 장면을 봤다. 여덟 살에서 열 살 되는 아이들 한 무리가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저런 애들도 자기 집을 지키려고 저렇게 싸우고 있구나. 유희는 소름이 돋았다.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유희는 양연수에게 말했다.

“저, 같이할게요.”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유희는 전국노점상연합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똑 부러진’ 성미답게, 뒤로 빼는 법이 없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선동하는 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행동거지가 화끈하고 확실했어. 여장군이여, 여장군. 항시 생각이 긍정적이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한순간 고민하다 딱 잊어버려. 내가 언제 그랬냐 싶게.”(노)

그리고 유희가 “노점상 운동에 집중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그날도 서울 도심에서 노점상 집회를 마치고 행진에 나선 때였다. 당시 문화국장을 맡고 있던 유희는 메가폰을 들고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전경들은 노점상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날렸다. 여성 노점상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쓰러진 노점상의 사지를 들어 연행했다.

유희 역시 “이단옆차기”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50대, 60대 되는 포장마차 엄마들이 옷을 벗은 거야. 어르신들이 팬티만 입고 울면서 현수막을 들고 나가는데…. 그때 ‘내가 분신을 하면 이 상황이 끝나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어떤 넥타이 맨 사람한테 내가 만 원을 주면서 “휘발유 한 통 좀 사다 주세요!” 그랬어. 근데 그 사람이 만 원 떼어먹고 안 가져왔어.(하하) (…) 그렇게 절실했지.“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다큐멘터리 ‘접어둔 포장마차 – 우리는 눈을 감는다’ 속 집회 현장. 강제진압에 맞서 옷을 벗고 저항하는 여성 노점상들(위).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엮은 노점상들이 눈물을 훔치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아래). 1996년. ⓒ서울시립대방송국 JBS

진압에 맞서 옷을 벗고 저항한 여성 노점상들. 몸을 보인다는 부끄러움보다, 노점상이란 삶이 준 모욕과 울분이 더 크고 깊었다. 노점상들은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엮어 버텼다. 알몸으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도 울고, 차마 그걸 볼 수 없어 고개 숙인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다큐멘터리 ‘접어둔 포장마차 – 우리는 눈을 감는다’ 속 집회 현장. 전경들은 노점상들의 사지를 들어 끌고갔다. 1996년. ⓒ서울시립대방송국 JBS

경찰의 발길질에 쓰러진 유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치료를 받고 나와봤자 경찰에 연행될 운명. 유희는 병원에서 도망쳤다. 흩어진 사람들이 다 명동성당으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희도 택시를 타고 명동성당으로 왔다. 노점상들은 이미 명동성당 들머리 안쪽에 대오를 갖추고 집회를 이어갔고, 경찰들은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갈 길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유희가 전경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 알아봤는지 그 전경이 몇 사람을 더 데리고 유희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들어와요!”

전경들에게 쫓기던 유희를 불러세운 사람은 근처 어느 식당 주인. 경찰들이 철수하고 나면 얘기해주겠다며, 식당 창고 안에 유희를 숨겨줬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노점상들이 농성을 끝내지 않는 한, 경찰들이 철수할 것 같지가 않았다. 에라이, 정면돌파다. 유희는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명동성당 입구 쪽으로 가니 역시나 전경 네 명이 이쪽저쪽을 팔을 붙잡아 세운다. 유희가 전경들에게 말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너네 부모가 노점상을 하는데 그렇게 단속을 하고 굶어죽게 생겼으면 어떡하겠냐. 이럴 수밖에 없는 우리 마음은 어떻겠냐. 그러니까 나 좀 그냥 보내줘. 응?”

유희의 설득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팔을 잡은 전경들의 손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저쪽으로 돌아서 빨리 가세요.”

그렇게 명동성당 안 노점상 무리에 합류했다. 그렇게 시작한 농성은 한 달간 이어졌다.

아마 1992년의 일로 짐작된다. 명동성당에서 보낸 한 달. 유희 모습을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찰떡같은 사이”가 되는 동갑내기 노점상 활동가 조덕휘다.

1990년 초반의 어느 날. 왼쪽부터 서선정, 유희, 조덕휘 ⓒ유희 페이스북

“전부터 유희라는 분을 알고는 있었죠. 1992년에 명동에서 집회를 하는데, 앞에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딱 눈에 띄더라고. 카리스마가! 그때부터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죠.”(조)

유희는 1993년 전국노점상연합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다. 유희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다. 조덕휘는 그녀가 누구보다 “연대의 관점이 뚜렷했다”고 기억했다.

“같은 노점상이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자기가 단속당할 때하고 남들이 단속당할 때하고 느낌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내 단속만 피하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유희 동지는 누가 단속을 당하든 늘 자기 일로 생각하더라고요.”(조)

노점상뿐만 아니라 철거민들의 투쟁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빈민,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연대하는 일도 유희가 맡아서 했다. 특히 ‘이덕인 열사’ 투쟁 때는 유희와 조덕휘가 연대사업을 도맡아서 이끌었다.

1995년 봄엔 최정환. 가을엔 이덕인. 그해 두 명의 장애인 노점상이 목숨을 잃었다. 열사의 억울함을 풀자고 모인 사람들을 위해 유희는 농성 현장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그때가 바로 이후 30년 뒤까지 이어진 ‘밥 연대’의 출발점이다.

1995년 두 번의 열사 투쟁. 그때가 30년 뒤까지 이어진 밥 연대의 출발점이었다. 사진은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시절. 윗줄 오른쪽 유희. ⓒ조덕휘 제공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지키고, 유가족들을 보살피는 일도 유희의 몫이었다. 경찰이 병원 영안실로 쳐들어와 시신을 탈취하는 믿을 수 없는 현장에도 유희가 있었다.

“경찰들이 침탈을 들어왔어. 병원 양쪽에서 사다리를 타고. 소름이 끼치더라고. (연대하러 온) 대학생들이 (머리가) 다 깨지고, 피가 천장으로 튀고, 다 잡혀가고…. 내가 이 역사를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에게 면목이 없겠다 해서, 1회용 카메라를 사가지고 사진을 찍었어.

처음엔 (빼앗길까) 무서워서 필름을 화장실 휴지통에다 숨겼어. 그랬다가 그걸 한 대학생한테 주면서 ‘혹시 내가 잡혀가면 이걸 한겨레 신문이나 전국노점상연합에 갖다주라’고 했어.

다행히 안 잡혀가고 상황이 끝났어. 그 대학생한테 필름을 다시 받아서 (미행을 따돌리느라) 택시를 네 번 갈아타고 현상소로 갔어. 현상을 했는데… 무슨 단합대회 사진이 나왔어. 거기서 내가 기절을 했어. 아, 이게 프락치구나.”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유희는 1995년 전국노점상연합 부의장을 맡았다. 노점상 단체 회원들은 여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간부와 지역장들은 남성이 대부분이었다. 지역장을 여성이 맡는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여성 부의장은 유희가 최초였다. “강단 있는 통솔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회원들이 대부분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조직 내부에) 여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유희 부의장이 등장하면서 우리 안에서도 어쨌든 여성의 문제가 좀 부각되는 계기가 됐죠.”(조)

전국노점상연합 최초의 여성 부의장 유희(왼쪽). 1996년 추정. ⓒ유희 페이스북

조덕휘는 유희가 부의장 직을 맡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알고 있었다. “금호동 꼭대기 산동네”에 살면서 노점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가 뻔했으니까.

유희는 부의장을 맡은 뒤 공구 노점을 접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그 역시 ‘활동’을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포장마차 장사는 밤에 시작하니, 낮 시간은 온통 활동에 쏟을 수 있었다.

낮에는 활동하고, 해지면 포장마차 열고.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포장마차도 주로 단골 장산데, 새벽 서너 시까지는 열어놔야 되니까. 그 와중에 단체 사무실은 서울에 있어도 부산에서 일이 터지면 내려가야죠. 지방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유희 동지가 다 했지.”(조)

어디선가 노점상 단속이 벌어질 때마다 간부들은 현장에 ‘출동’해 함께 싸웠다. 그들이 맞서야 하는 상대는 주로 용역들. 말이 용역이지 ‘깡패’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저항은 하지만 “피를 보는 건” 늘 노점상 쪽이었다. 싸우고, 맞고, 노점을 빼앗기고, 구청에 가서 찾아오고, 또 단속을 당하고, 또 싸우고, 또 쓰러지는 일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다.

그런 현장에서 보여준 유희의 ‘깡다구’는 전설처럼 여겨졌다. 단속반 앞에서든 경찰들 앞에서든, 유희는 맨 앞에서 버티고, 들이받고, 싸웠다.

“경찰들한테 그냥 눈을 부릅뜨고! 막 해대는 거야! 경찰들이 우물쭈물 ‘아이 왜 그러세요’ 할 정도로…. 유희 동지가 나타나면 단속반들도 어설프게 못 달려들어.”(노)

노점상 단속 현장에는 몸에 문신을 새긴 ‘덩치’들이 동원됐다. 말이 용역이지, 깡패나 다름없는 자들. ⓒ최인기 제공

조덕휘는 “사례는 무지 많지만” 한 가지만 들려줬다. 유희가 철거촌 빈민들의 싸움에 연대하러 갔을 때. 용역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유희가 딱 버티고 서서 호통을 쳤다.

“너 이 새끼들아, 젊은 놈들이 이렇게 살면 안 돼!”

용역 중에는 “거칠게 놀던 친구들”도 많았다. 놈들은 문신을 보이며 겁을 주기 일쑤였다.

놈들이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난장을 쳐요. 근데 유희 부의장이 ‘팬티는 왜 입었어, 임마! 벗어봐! X만 한 게!’ 막 욕을 하니까 얘들이 쪽팔려서 물러나고.(웃음) 한번은 용역들을 잡아서 옷을 벳겨버린 거예요. 등짝에 문신 있는 걸 사진 찍으려고. 오히려 경찰들이 공포탄을 쏴서 상황을 정리하고…. (유희는) 그 정도로 대단했어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조)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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