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깡다구’를 증명하는 일화는 또 있다. 1992년 대선에 당선된 김영삼이 아직 ‘당선인’이던 시절, 노점상들은 ‘기습시위’를 계획했다. 유희와 여성 노점상 몇이 선발됐다. 장소는 김영삼이 장로로 있던 교회. 일요일 아침 유희 일행은 일찍부터 교회에 들어가 있었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오자 김영삼이 건장한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교회로 들어왔다. 노점상들은 그를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노점상들의 호소를 담은 문서를 건넸다.
“이거 좀 봐주세요! 우리 노점상들이 이렇게 당하고 있습니다. 대책을 좀 마련해주세요.”
김영삼이 문서를 받았다. 그런데 문서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옆에 있던 수행원에게 넘겨버렸다. 그걸 본 유희가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게 대통령이면 나는 영부인이다! 봐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무시하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경호원의 주먹이 유희의 명치에 한 방 꽂혔다. 유희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경호원들이 유희 일행을 거칠게 밀어냈지만, 이대로는 못 간다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며 드러누워 버텼다.
경찰들이 출동했다. 교인들이 지켜보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의 폭력을 쓰기도 난처했다. 결국 정보과 형사가 나중에 꼭 답변을 받아주겠다고 노점상들을 설득해 ‘상황’은 종료됐다.
몇 개월 뒤 답변이 왔다. ‘민원을 잘 검토해보겠다’는 뻔한 대답이었다.

‘깡다구’로 기억된 유희지만,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집회에 나갔다가 혹시나 ‘돌아오지 못할까’ 불안한 마음. 그 마음을 유희는 한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집회를 나갈 때, 이것이 좀 위험한 집회다 (생각되면), 새벽에 목욕을 하고, 어디 빚진 건 없나 (돌아봐요).”(유희 구술, 서울시립대방송국 JBS 1996년)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 때도, 1995년의 ‘5․18특별법’ 제정 투쟁 때도, 그리고 그 시절 수많은 노점상, 철거민, 노동자, 대학생 ‘열사’ 투쟁 때도 유희는 앞장서서 싸웠다.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니까. 사람이 그런 걸 보면 더 악이 생겨서 더 하게 되잖아요. ‘종로에 가면 늘 유희가 있다’ 할 정도로. 최루탄 냄새를 맡다가 ‘아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할 정도로. 방송차 위에서 중심도 되게 잘 잡았던 거 같아.(웃음) 나는 국회의원들이 그 법(5․18특별법)을 만들었다고 생각 안 해요. 종로에 나왔던 그 수만 명 시민들의 힘으로 됐다고 생각하고….”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조덕휘의 기억 속 “강철여인”이란 표현도, 노수희의 기억 속 “사람 챙기기 선수”란 표현도 모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덕휘는 거짓 없이 동지들을 대하고 한 가지 일에 끝까지 집중하는 유희를 보며 자신도 많이 배웠다.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나누던 모습에서도.
“쾌활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일할 때 보면 굉장히 차분해요. 그리고 아무래도 집단 안에서 좀 소외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참 잘 챙기고 화합시키는 지도력이 있는, 정말 얼마 안 되는 사람이지. 정의롭고 잔정도 많고.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에요.”(조)
노수희는 포장마차를 비울 때가 많았다. 노점상 회원들을 모으기 위해 전국으로 돌아다니거나, 그 때문에 수배자가 되거나, 수배 끝에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노수희의 포장마차는 유희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수희의 부인 혼자서는 끌지 못하는 무거운 포장마차를 유희가 함께 끌어주고, 장사를 펴주고, 직접 음식도 하고 서빙까지 도왔다.

유희는 노수희의 수배 생활만 도운 게 아니다. 유희 자신도 수배자가 돼 쫓긴 적이 있었다.
수배령이 내렸다. 어느 날 종로에서 2천 명 단위 집회를 열었다. 본부에서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유희는 당당하게 가고 싶었다. 단상에서 다른 대표가 연대사를 했다.
“늘 이 자리에서 사회를 봤던 유희가 지금 수배 중에 있다. 현 정권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이런 굴레에 가둬 놓고 있다.”
그 연대사를 듣던 유희가 군중 속에서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군중들이 “와!” 환호성을 질렀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유희는 두 달 정도 ‘도망자’로 지냈다.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했다. 유희의 집에는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집에는 아이들밖에 없었다.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중학생이던 큰아들은 오히려 형사들에게 따졌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어요? 우리 엄마는 남들 위해서 옳은 일 하는 사람인데, 아저씨들이 왜 우리 엄마를 찾아요?”
유희가 나중에야 정보과 형사를 통해 들은 얘기다.
수배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노점상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제기동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는 유희의 주머니에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넣어주면서 굶지 말고 다니라고 했다.
서초구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한 노점상은 유희에게 집 열쇠를 주면서, 자기는 밤에 장사하고 아침에나 들어가니까 언제든지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그는 20만 원이라는 ‘거금’까지 줬다.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그 집에서 한 달 반 정도 숨어 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쫓기며 살 순 없었다. 활동도 활동이고 어린 아들들도 문제였다. 유희는 경찰에 자진 출석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받으러 가는 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경찰서 앞에는 노점상 수백 명이 모여서 경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무사히 조사를 받고 나왔다. 다행히 몇 십만 원짜리 벌금형으로 마무리됐고, 수배는 풀렸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전국노점상연합 간부들 중에 구속을 피한 건 유희가 유일했다.

흑이면 흑. 백이면 백. 활동가로서 유희는 ‘회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원칙에 맞으면 무조건 밀어붙이고, 원칙에 어긋나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성격. 조직적 결정을 실천하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만큼, 원칙에서 벗어난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도 매섭게 했다.
“잔머리를 안 굴리거든. 주춤주춤 머릿속으로 재고 자시고 이런 게 없어. 옳은 일에는 앞뒤를 안 가려. 투쟁 나가서는 언제든지 앞장을 섰고, 우물쭈물하는 간부들이 있으면 ‘뭐하는 거야!’ 큰소리로 야단도 치고, 그런 기억이 나네.”(노)
정 많기로 유명하고 사람 챙기는 데 선수였지만, 그런 유희도 동료들을 용서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특히 ‘거짓말’을 못 참았다. 조직 안에서 부당한 일이 생길 때도, 유희는 나이와 직책을 불문하고 호통을 쳤다. ‘등짝스매싱’이 날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등짝스매싱은 내가 제일 많이 맞았을 거야, 진짜. (세상 뜨기 전) 최근까지도 맞았으니까.(웃음) 친하니까 더 많이 때린 거지.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물론 몸싸움은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만. 나는 ‘좀 쉬어라’, ‘본인도 좀 챙기면서 해라’ 잔소리를 많이 했지. 너무 아까운 사람이잖아요. 정말 괜찮은 사람이고. 그래도 애정이 있기 때문에 싸웠어.”(조)
전국노점상연합 부의장 활동은 1997년까지 이어갔다. 이후 2000년 전후로 유희는 노점상을 그만두게 된다. 노점상 단체 활동도 자연스레 마무리됐다. 돈암동 철거촌 아이들을 보고 ‘같이 싸우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10년 세월도 더 지나 있었다.
2000년대 초 40대가 된 유희는 언니가 살던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와 노래방, 민속주점 등을 운영했다. 갑자기 구두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1년쯤 일본에 살다 오기도 했다. 지역 봉사단체에서 활동하며 이웃들을 위한 노래봉사, 목욕봉사, 음식봉사 등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밥을 지어 나누는 ‘밥 연대’를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밥차를 하겠다는 거야. 이게 쉬운 게 아니잖아. 내가 하지 말라 그랬어요. 근데 뭐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정 그러면 한번 해봐라 했지만, 솔직히 금방 포기할 줄 알았어. 아, 근데 해내더라고. 정말 대단한 끈기고, 유희 아니면 못하는 일이지.”(조)
유희의 밥 연대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국 팔도에 ‘밥묵차’의 바퀴 자국이 남았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해본 사람 치고, 유희 동지의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요?”(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추모글 중)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가져서 나누는 게 아니었다. 조덕휘는 유희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밥 연대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노점상 시절부터 사무실에서 밥을 지어 동료와 나누고, 열사 투쟁의 현장에 솥을 걸고 동지들에게 밥을 먹이던 유희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희는 (농성 현장에) 가서 밥만 해주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으로 독려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눈물 흘리고…. 난 그걸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나와. (…) (유희는) 참 어려운 일을 쉽게, 또 즐겁게 해낸 사람이고, 자기도 힘들지만 자기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 훌륭한 사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조)
노수희가 유희를 다시 만난 건 거의 20년 만이었다. 경북 성주군 ‘소성리’.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에 맞서서 시민들이 투쟁에 나선 곳. 노수희도 그곳에서 집회에 ‘연대’하러 갔다가, 밥차를 끌고 온 유희를 우연히 만났다. 노수희도 몇 번의 투옥을 겪으며 세상과 떨어져 있었고, 유희도 노점상을 그만두면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두 사람이었다.
“기가 막히더라고. 만나니까 반갑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집회가 끝나고 한 10분쯤 대화를 나눴나. 한동안 방황을 좀 했다고 그렇게만 얘기하더라고. 그러다가 다들 어렵게 투쟁을 하고 있는데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어서 이걸(밥차) 한다고…. 유희가 ‘죄송합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해서, 서로 손 붙잡고 눈물도 흘리고 그랬어.”(노)
유희는 2024년 11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투병 중에도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는 시동을 끄지 않았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밥 연대를 계속했다. 밥을 짓지 못할 지경이면, 조용히 집회에 참석해 연대의 인사를 건네고 오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노점상 집회 할 때, 저기 어떤 여자가 옷으로 칭칭 싸매고 왔어. 옆에다가 저 사람 누구냐 물었더니, 세상에, 유희라는 거야. 암이 걸렸다는 거야. 이따 가봐야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없어.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먼저 갔대. 그게 마지막…. 그때 유희라는 소리를 듣고 내가 뛰쳐나갔어야 하는데 그게 참 후회돼. 손 못 잡아주고 얘기 못해준 게….”(노)


조덕휘는 유희가 병원에서 마지막 투병 생활을 할 때도 그녀를 보러 갔다. 다행히 그때는 의식이 있었다. 늘 그랬듯 별 것 없는 일상 이야기도 나누고, 정겨운(?) 욕도 들었다.
“내가 유희 칠순 때 노래 불러준다고 약속했었어. 외국 노랜데. 그거 기억하냐면서 핸드폰으로 이렇게 틀어줬어. 그랬더니 나한테 욕을 해가지고(웃음). 그게 마지막 대화였지.”(조)
다음 주에 또 찾아갔지만 의식이 없었다. 2024년 6월 18일 유희는 숨을 거뒀다. 향년 65세.
그렇게도 좋아하던 노란 후리지아꽃 한 다발 못 안겨준 것이, 일한다는 핑계로 소고기 한 점, 따끈한 밥 한 그릇 더 못 나눈 것이, 지난날 함께 울고 웃던 소중한 기억들을 더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조덕휘 추모글 중)
‘후리지아’의 꽃말 중 하나는 ‘영원한 우정’이다.

노수희가 유희를 먼발치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날, 유희는 이미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만약 건강한 시절의 유희를 다시 만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지금 밥 연대를 하는 그 정신, 변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라. 후회하지 말고 자부심을 가지고 해라, 얘기를 하고 싶지. (…) 정말 고맙고, 아마 하늘나라에 가서도 세상 일 잊지 않고, 먼저 간 여러 동지들 만나서 세상 얘기를 할 것이다, 호탕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노)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