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되게 보고 싶네. 정말.”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그가 말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의 시선이 머무는 허공 어디쯤에서, 누군가 그 말을 듣고 있다는 듯이.

지난여름 어느 날 저녁, 민중가수 박준을 만나러 명동성당 앞으로 갔다. 비정규직·해고·산재 노동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한 거리공연. 수십 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그는 그날도 여전히 마이크 앞에서 서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박준이 유희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이곳, 명동성당이었다.

“팔구십 년대 명동성당은 ‘데모의 메카’ 아니었습니까. 당시에 저는 명동성당 청년회 활동을 쭉 했어요. 88올림픽 전후로 빈민운동이 워낙 크게 일어났고 노점상 투쟁도 명동성당으로 오셨으니까, 그때 명동성당에서 ‘누이’를 처음 만났죠.”(박)

1990년 명동성당 들머리에 열린 집회. 유희와 박준이 처음 만난 곳도 이곳 명동성당이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제공

박준은 한 살 터울의 유희를 ‘누이’라 불렀다. 1980년대 초반 스물세 살 나이에 노점상을 시작한 유희는, 1980년대 후반 노점상 운동을 시작했다. 유희는 전국노점상연합에서 활동하며, 1995년에는 최초의 여성 부의장 자리까지 맡았다.

박준이 기억하는 당시 유희의 모습은 ‘전사’ 그 자체였다.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들 앞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던 모습”. 1995년 ‘이덕인 열사 투쟁’ 때도 박준은 유희의 ‘헌신’을 지켜봤다. 인천 아암도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반년 가까이 이덕인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지키며 투쟁했다.

유희 역시 그 중심에 있었다. 현장에 모인 시민들을 위해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먹였다. 유족들의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싸우며 그들을 돌본 것도 유희였다.(관련기사 :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유희가 노점상을 접고 노점상 단체 활동도 그만두면서, 한동안 박준은 유희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이나 흘렀을까. 민중가수로 활발히 활동하던 박준은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유희를 다시 만났다. 유희는 그곳에서 ‘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박준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유희를 집회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유희는 ‘밥’을 나누고 있었다. ⓒ유희 페이스북

너무 오랜만이라 “꿈꾸는 듯이” 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가갔다. 많은 얘기가 필요하진 않았다. 눈빛만 봐도 아는 세월을 함께 보냈으니. 짧은 안부를 나누고 누이에게 물었다.

“누이! 장사는 어떻게 하고 이걸(밥 연대) 하시는 거야?”
“에이, 장사는 장사고 이건 이거지.”

누이다운 대답이었다. 만나지 못한 동안 누이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을 산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남을 위해 밥을 하겠다고 생각한 게, 또 그걸 실천하며 산다는 게 놀라웠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은 거예요. 노동자, 빈민, 장애인들 투쟁하는 현장에 계속 밥차를 몰고 가시고…. 그 밥 한 끼가 얼마나 소중해요? 지금 되돌아보면 변함이 없으신 거죠. 한때가 아니라 늘상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가슴’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박)

박준과 유희는 수많은 현장에서 계속 만났다. 박준은 기타를 메고, 유희는 국자를 들고. 정말 친남매처럼 애정 넘치는 욕(?)도 주고받으며, 서로 정을 나누고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경찰한테) 디지게 맞기도 많이 맞고, 머리통 터지고 손이 찢어져도 우린 포기할 수 없었어. 피 터지는 전쟁 하고 명성(명동성당) 농성장 들어오면, 떡~하니 쭈니(박준)가 앰프를 설치해놓는 거야. 오후 집회 하라고. 너무 고마웠던 거 모르지? (…)

어언 30여 년이 지났는데 쭈니는 늘 그 자리. 난 돌아 돌아 다시 길 위에 있으니, 이 또한 질긴 인연 아닌가? 고마우이! 늘 그 자리 있어줌에 든든하고. 우리 10년 후에도 건강하게 길 위에 있자구. (2017년 8월 유희 페이스북 글)

늘 집회 현장에서 만나 친남매 같은 정을 나눈 유희(왼쪽)와 박준. 2015년. ⓒ유희 페이스북

가끔 어느 현장에 가기 전에, 유희가 박준에게 연락을 할 때가 있었다. 그곳에서 누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 ‘공부’하기 위해. 유희는 그냥 밥만 지어다 주는 게 아니라, 투쟁하는 사람의 사정을 최대한 알고 이해하고 연대하려 애썼다.

박준이 놀란 때가 또 있다. 바로 유희의 노래를 듣고. 오랜 세월 어르신들을 위한 노래봉사와 모금공연을 해오며 ‘부평스타’라 불린 유희 아닌가.(관련기사 :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집회에서도 밥뿐만 아니라 노래로 연대할 때가 있었다.

대개 노동자 집회에서는 이른바 ‘민중가요’를 부르기 마련. 하지만 그녀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바로 그녀의 레퍼토리가 민중가요가 아니라 ‘트롯’이었기 때문이다.

박준은 집회 현장에서 노래로 연대하는 유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희 앞에선 트롯을 부르지 않겠다”는 찬사가 나올 만한 실력이었다. 사진은 2018년. ⓒ유희 페이스북

“저는 누이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어요. 깜~짝 놀랐어요, 진짜. 한번은 ‘내가 이제 누이 앞에서는 뽕짝은 안 부를게’ 그런 얘기도 했어요. 너무 잘하시니까.”(박)

민중가수인 박준도 때때로 트롯 몇 곡을 레퍼토리에 넣기도 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하는 ‘나그네 설움’이나, “가~련다 떠나련~다”로 시작하는 ‘유정천리’. 공장에서 쫓겨난 중년 노동자들이 그 노래를 듣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듣는 분들한테 내 마음이 전달될 수 있으면, 트롯이면 어떻고 민중가요면 어때요?”(박)

노동자 투쟁 현장, 빗속의 노래연대 ⓒ유희 페이스북

유희의 파격적인(?) 무대는 ‘집회 현장에선 민중가요만 불러야 한다’는 오래된 관념을 깨뜨려줬다. 덕분에 ‘생각의 틀’을 깨게 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민중가수 임정득이다.

“첫인상은 한마디로 ‘저분은 누구시지?’였어요. 까만색 큰 차(에쿠스) 있잖아요, 되게 좋은 차를 타고 (집회 현장에) 오시는 거예요. 오셔서 밥을 막 나누시고, 또 마이크 잡고 트롯을 막 불러요.(웃음) 잘 모를 때는 그냥 ‘되게 재밌는 분이시구나’ 생각했어요.”(임)

참 특이하다 생각하며 호기심을 가졌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자꾸 유희를 만나게 됐다. 임정득이 노동자 투쟁 현장 어딜 가든, 까만 세단과 유희의 밥이 함께했다.

그 꾸준함이 두 사람을 가까워지게 했다. 유희에게 든든한 ‘멤버’들과 밥차가 생기고,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라는 멋진 이름이 생긴 뒤에도 두 사람은 늘 현장에서 만났다.

둘이 특별히 더 친해지게 된 계기도 있다. 2018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유희가 임정득에게 요양병원 어르신 ‘위문공연’을 같이 가자고 했다. 노래봉사를 꾸준히 해온 유희에겐 익숙한 일이었지만 ‘민중가수’ 임정득에게 위문공연은 좀 생소했다.

유희는 요양병원 어르신들을 위한 노래봉사를 오랜 세월 해왔다. 2019년. ⓒ유희 페이스북

그런데 그 요양병원이 좀 특별(?)했다. 일터에서 쫓겨났다가 긴 투쟁 끝에 어렵게 복귀한 노동자들이 계속 병원 측과 힘겨운 갈등을 겪고 있는 곳이었다. 임정득은 그제야 유희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사실은 그곳 노동자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공연이란 걸.

“사실 고민을 좀 했어요. 전 트롯도 못 부르는데. 근데 언니 카리스마가 ‘갈래?’ 이게 아니라 ‘가자! 좋잖아!’ 이런 식.(웃음) 가서 언니는 반짝이 옷에 긴 부츠 신고, 저도 방방 뛰면서 재밌게 노래했어요. 언니가 그런 요청을 나한테 해준 게 고마운 거예요.”(임)

현장투쟁으로 힘들어 할 때, 유희 동지가 먼저 제의해왔다.

“분회장님 원내 위문공연 한번 해서 ‘가오’ 좀 세워줄까요?”

(…) 강당에 어르신들 가득 모시고, 멋쟁이 우리 유희 동지 노래하랴, 신명나 춤추는 어르신 기분 맞추시랴, 사회 보랴. 어르신들 양말 선물도 챙겨오고! 감동이었다. (노조) 조합원들은 완전 힘 받고! (…) 고마운 그날의 유희와 함께하신 출연진들 감사합니다. (2024년 6월 청주시립요양병원 노동자 권옥자 페이스북 글)

반짝이 옷에 긴 부츠를 신고 트롯을 부르며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유희의 모습은 분명 낯설었다. 하지만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 그 무엇으로든” 사람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겠다는 “당차고 거침없는” 유희의 모습은 임정득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편견마저 깨트려줬다.

“형태만 다를 뿐이지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그건 언니가 자신의 중심에 늘 ‘투쟁하는 사람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밥이든 노래든 언니만의 방식으로 연대하겠다는 것.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닌데, 그런 힘이 언니한테 있었어요.”(임)

유희는 “일찍이 집회 현장에 없던 캐릭터”였다. 지난겨울 ‘윤석열 탄핵 광장’ 이후로 K-POP과 응원봉, 커피차와 선결제 문화가 등장하면서 집회 문화도 많이 다양해졌다. 하지만 이전에는 ‘집회 문화는 이래야 한다’는 오래되고 경직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실제로 ‘사건’도 한 번 있었다. 유희가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트롯을 부르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던 거다. 그가 공개적으로 유희를 비난하면서, 유희와 유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분노했다. 하지만 유희의 헌신과 진심은 얄팍한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유희는 ‘밥’과 ‘노래’로 일찍부터 증명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은 각자 달라도 우리는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 치고) 유희 언니의 밥을 한 번도 안 얻어먹은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는) ‘밥하는 아줌마’ 이렇게 낮게 보는 인식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밥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어려울 때 밥 한 끼 먹여준 사람이 제일 오래 기억나잖아요.”(임)

임정득이 유희를 만난 현장은 세상의 관심을 많이 받는 큰 투쟁 현장만이 아니었다.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현장, 한두 사람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유희를 만났다. 유희는 밥을 지어 와서 그들과 나누고, 또 작은 앰프 하나를 두고 힘찬 노래로 그들을 응원했다.

(작은 투쟁 현장의 노동자들이) ‘와! 십시일반 밥묵차가 우리한테 온대!’ 이런 걸 되게 자랑스러워했어요. 밥묵차 덕분에 현장의 기세가 정말 좋아지는 게, 말 그대로 투쟁의 힘으로 작용하는 게 저한테도 느껴졌으니까. (유희 언니를) 정말 고마워하고 존경했어요.”(임)

유희는 세상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게 가닿는 ‘작은 현장’을 더 걱정했다. 골목까지 찾아가는 밥묵차. ⓒ유희 페이스북

존경의 마음은 임정득에게도 있다. 유희가 살아온 지난 삶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20대 초반에 아이를 업고 노점상을 시작해, 가난과 싸우고 불평등에 맞서며 청장년 시절을 다 보냈다. 하지만 ‘잘 자라준 아들들’ 덕에 중년의 인생은 조금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다.

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하지만 유희는 끝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일에 변함이 없었다.

“언니가 진짜 온몸으로 싸우던(노점상운동) 시기가 지나고 나서,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되면 사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근데 언니는 항상 힘들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현장에 시선이 있었다는 게, 그게 되게 중요한 사실 같아요.”(임)

“이만큼 했으니 가족을 위해 편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같이 (사회)운동 했던 사람들도 그런다. (…) 나만 잘살겠다 생각 말고,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자. (…)

길바닥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보면 그 사람들의 애달픈 마음, 애절한 마음을 조금은 역지사지하며 헤아려보자. (…) 밥을 나누는 것도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거다. 조금만 따뜻한 시선을 가져주면 좋은 세상이 더 빨리 오지 않을까.”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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