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카리스마’는 유명했다. 밥차를 가로막는 경찰이나 용역들 앞에선 울분을 토하며 맞서고 싸웠다. “국통을 집어던지고 싶은 적도 많았다”고 할 정도로 뜨겁게.
유희는 투쟁 현장의 ‘큰언니’였다. 노동자들에게 쓴소리 하는 경우도 많았다. 주눅이 들어 있는 이들 앞에서는 직접 마이크를 잡고 투쟁을 독려하기도 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이는 이들에게는 “그 따위로 할 거면 집어치우라”는 호통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도 했다.
불같은 성격만큼 정도 많고 눈물도 많았다. 특히 단식투쟁이나 고공농성 등 극단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유희는 속상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참사 유가족들 볼 때. 세월호 가족들의 농성 현장에도 (밥묵차가) 많이 갔어요. 자식 잃은 엄마가 노숙농성을 하는데 천막도 없이 바닥도 제대로 안 깔고 처절하게 했거든요. 그런 모습 보면 눈물 나잖아요. (유희 쌤도) 보면 울기부터 하는 거야. 그 엄마들 붙잡고.”(최헌국)


유희는 그런 이들이 하루빨리 단식을 멈추기를, 땅으로 내려오기를, 편안한 집에서 잠자고 밥 먹는 일상을 되찾기를 기도했다. 유희의 기도에 빠지지 않던 이들 중에 ‘장애인’들도 있다. 유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장애인 동지’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해왔다.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수리야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서 활동하던 2016년에 유희를 처음 만났다. 큰 집회를 앞두고 밥 연대를 부탁한 게 시작이었다.
수백 명이 모이는 큰 집회는 물론, 크고작은 농성 등 갑작스런 요청에도 유희는 밥을 지어 연대했다. 밥 연대가 없었다면 삼시세끼를 김밥으로 때웠어야 했을 1박 2일 농성. 유희는 끼니때마다 인천에 있는 집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새로 밥을 해서 가져왔다.
“저녁에 투쟁문화제 끝나면 거의 10시거든요. 그때까지도 현장에 계세요. 본인 발언도 하시고, 모든 일정이 끝나야 집으로 가세요. 그 시간에 집에 가서 또 100인분 아침식사를 준비하셔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오시는 거예요. (유희) 언니는 거의 잠을 못 주무시는 거죠.”(수)

밥을 먹이는 것 자체가 ‘투쟁’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2018년 장애인들이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농성을 벌일 때였다.
“농성장이 건물 11층이었어요. 김밥 한 줄 못 먹고 있었죠. 그래서 (유희) 언니가 밥을 해가지고 왔는데, 올라올 수가 없는 거예요. 저희가 농성장을 비우고 내려올 수도 없고. 그런데 언니가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이러면서 막 싸워서 밥을 가지고 올라오신 거죠.”(수)
또 한 번 세종시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농성할 때. 건물 안에서 농성을 한 지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장애인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유희에게 연락을 했고, 유희는 바로 밥을 해서 세종시로 달려갔다.
유희가 농성장 밖에 도착했다는 걸, 안에서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밥을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막는 쪽과, 무조건 들어가서 먹이겠다는 쪽이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같이 “밥 줘!” “밥 줘!” 외쳤다. 결국 승자는, 유희였다.

밥 나눔이 끝나면 유희는 마이크를 잡고 “화끈한” 발언으로 힘을 주기도 했다. “늘 챙겨주는 어머니처럼” 응원하고 격려하는 이야기 속에 꼭 빠지지 않는 말이 있었다.
“발언할 때마다 마무리는 이거예요. ‘밥이 힘이다.’ 그 얘기는 안 빼놓고 하시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밥으로 힘 주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어딜 가봐도 여러분같이 잘 싸우는 동지들이 없다’ 하시면서, 밤늦게 남아 있는 동지들한테 힘 불어넣어주시고.”(수)
장애인들이 전국적으로 모이는 집회가 1년에 못해도 서너 번. 수리야는 그때마다 많게는 칠팔백 명분의 밥을 부탁해야 했다. 그럴 때는 재료비 명목으로 얼마의 돈을 유희에게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돈이 말 그대로 재료 값에도 못 미친다는 걸 수리야도 알고 유희도 알았다.
재료비조차 못 줄 형편이라 유희에게 부탁을 하지 않으면, 그녀가 먼저 알고 연락을 해왔다. “야! 왜 전화 안 했냐!” 호통부터 듣고 나면, 어김없이 유희가 ‘밥묵차’를 끌고 나타났다.
“‘반드시 밥은 먹으면서 투쟁해야 한다.’ 이게 언니의 모토였어요. ‘저 사람들 어떻게 밥 먹게 할까? 누가 밥을 먹일까? 내가 해야지.’ 이 생각밖에 없으셨던 것 같아요.”(수)
반짝이는 하얀 모자에 빨간 앞치마를 전투복처럼 차려입고, 밥차에는 따듯한 밥과 국을 실어 온 모습이 지원군의 사령관같이 든든했습니다. (…) 유희 동지의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투쟁의 양식이고, 투쟁의 생명이었습니다. (유희 장례자료집,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애해방열사_단 공동대표 박김영희 추모글)


유희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가장 사랑했다. 장애인 집회나 농성 현장이라면 빠지지 않고 찾아가려 했던 이유 중 하나.
“전장연 집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참여한다. 장애인들은 어디 가서 밥을 먹기 더 힘드니까. 친정 같은 곳이기도 하고.”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유희가 장애인 투쟁 현장을 ‘친정’이라 표현한 이유. 아마도 유희의 밥 연대가 출발한 계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95년 최정환 열사와 이덕인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유희는 밥을 지어 나누기 시작했다. 최정환, 이덕인 두 사람은 모두 ‘장애인’ 노점상이었다.
어머니의 눈. 유족의 눈. 피눈물 흐르는 그 눈. (…) 젤 먼저 달려가 유족들을 위로하며 함께 영안실서 먹고 자고, 가족들의 음식 챙기기, 건강 살피기, 집회 모시고 다니기. (…) 그분들이 나를 인정하고 기대고, 맘을 안정시킬 때까지. (유희 페이스북 글, 2019년 2월)
30년 세월이 흐르도록 유희는 이덕인이란 이름을 ‘눈물’로 간직해왔다. 해마다 추모제에 참석해 그리움을 나눴고, 열사의 부모님과의 인연도 오래도록 이어가며 그들을 보살폈다.
“너무 추운 날, 덕인이가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길병원 영안실에서 6개월을 살며 장례투쟁 했다. 인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덕인이의 영정을 들고 진상규명을 외쳤다. 26년이 지난 오늘, 너무 추운 날에 길거리에 또 나와서 이 죽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게 처참하다.” (유희 발언, 이덕인 26주기 추모제, 2021년 비마이너 인용)

유희는 우물쭈물하는 걸 싫어했다. 생각하는 즉시 행동에 옮겨야 한다. “아침에 ‘오늘 어디 갈까?’ 생각하면 손은 벌써 쌀을 씻고 있다”고 할 정도로. 누군가 와달라 손 내밀면 거절도 못했다. 또 ‘밥묵차’가 출동하지 않아도 집회 현장을 찾아 힘을 보태기도 했다.
“‘(농성장) 어디 어디 다니셨어요?’ 하면, 너무 많아. 그냥 모든 농성장은 다.(웃음)”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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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49재 자료집에 기록돼 있는 현장들만 옮겨 적어도 이 정도. 기록으로 남은 것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많은 현장에서 유희는 밥을 짓고 나눴을 거다.

2022년 11월 췌장암을 진단받은 뒤에도 연대를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제발 치료에만 전념하길 바랐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밥묵차’ 멤버들이 대신 밥을 했다. 유희는 현장까지 같이 가서, 주로 차 안에 앉아 밥 나눔을 지켜보곤 했다.
“겨울이었을 거예요. (밥 나눔 현장에) 그렇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당신은 꼭 나가야겠다는 거예요. 하얀 롱패딩을 입고 이렇게 담요를 두르고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보고 있었는데, 살짝 보니까 혼자 조용히 눈시울을 좀 붉히는 것 같더라고….”(최헌국)
최헌국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삶과 죽음은 모두 신의 뜻. 목사로서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희가 어떻게든 병을 물리치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그녀가 사랑하는 현장에 더 오래 머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투병 중 유희가 페이스북에 매일같이 올린 기도문에는 자신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없었다. 누군가의 건강, 누군가의 평화, 누군가의 승리를 기도하는 문장만으로 가득했다.
“저는 꿈이 없어요. 밥을 하다가, 봉사를 하다가, 노래를 하다가 쓰러지면 최고 좋고, 아프더라도 짧게 아프자. (…) 내일 죽어도 나는 덤으로 사는 거니까. 열심히 살아야겠다. 정말 많이 베풀어야겠다.”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유희는 2024년 6월 18일 눈을 감았다.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 그녀가 30년간 눈물로 기억해온 이덕인의 무덤 바로 뒤편에 유희의 묘소가 마련됐다.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박경석은 그녀의 죽음에 “하나의 고리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장애인, 빈민, 노동자, 참사 유가족 등 “투쟁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 유희는 저마다의 이유로 투쟁하는 여러 사람들을 ‘밥’을 통해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해왔다.
“유희 동지 활동을 보면 ‘빈곤’이란 키워드가 관통하고 있잖아요. 현장 투쟁들을 어떻게 연대라는 힘으로 연결할까 하는 데서 그 활동은 꼭 필요한 거였죠. 그 연결고리가 바로 먹는 문제였고, 밥을 매개로 하나의 ‘연대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박경석)

연결과 연대. 유희라는 한 사람이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유희의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내가 가진 작은 것 하나라도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선한 마음’들이 유희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유희를 도와 밥을 짓거나 현장에서 배식을 돕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농사짓는 사람은 쌀과 채소, 과일을, 바닷일 하는 사람은 해산물을, 장사를 하는 사람은 양념이나 식기를 보냈다. 유희의 집으로 끊임없이 배달됐던 그 많은 택배 상자 안에 그들의 ‘선한 마음’이 담겼다.
“노숙인들한테 한 달에 한 번 주먹밥 봉사를 해요. 너무 재밌는 게, (배우) 맹봉학이 결혼하면서 축의금 대신 쌀을 받았는데, 그 쌀을 다 나를 줬어요. 나는 그걸로 또 (농성장에) 밥을 해 가고. 쌀 몇 포대는 나비봉사단에 줬더니, 봉사단에서 또 주먹밥 100개를 해서 다시 나한테 줘요. (투쟁하는 사람들) 농성장에 갖다주라고.”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유희가 한 일은 그저 ‘밥묵차’를 운영했다는 것 하나만이 아니다. ‘선한 마음’으로 이어진 연결과 연대의 그물망으로 작고 힘없는 목숨들을 지탱하는 일. 그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유희 쌤을 보면서 느꼈어요. ‘아, 이분은 정말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었구나.’”(최헌국)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10화] 탄핵광장에 K-POP이 있듯 그 시절 ‘유희’가 있었다
[11화] 모두를 먹여살린 ‘욕쟁이언니’… 그녀의 마지막 기도
[12화] 할매들 손에 꽃이 피었다… 춤추며 싸우는 ‘언니’의 힘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