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막내아들 김청민이 유희에게 집을 선물했다. 인천 신도시에 있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집을 고를 때 생각한 1순위 조건이 ‘주방이 커야 한다’였다.

“엄마가 허름한 빌라에 살 때, 음식하기가 너무 좁잖아요. 아무리 (밥 연대) 하지 말라고 해도 안 할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웃음), 새 집 구할 땐 주방 크기 위주로 봤어요.”(김청민)

“‘어디 가자’ 그러더니 막내가 차를 몰고 가는데, 엉뚱한 쪽으로 가. 그러더니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네? 아들이 문 앞에서 춤을 추더니 이걸(카드키) 주는 거야. ‘엄마 여기다 대보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어안이 벙벙했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가 얼마나 쇼크를 받았는지…. 이렇게 해놓고(가전제품까지 다 갖춰놓고) 춤을 추는데 내가 얼마나 울었겠어.”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2016년 유희와 월간 작은책 안건모 편집장이 한 인터뷰 녹음파일을 들어보니, 집 자랑에 이은 아들들 자랑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결국 안 편집장의 입에서 “아오 배 아퍼. 그만 합시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유희는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막내가 제일 큰 ‘빽’이에요.”

유희의 삼형제는 밥묵차 활동의 든든한 ‘빽’이었다 ⓒ유희 페이스북

삼형제는 ‘밥묵차’ 운영에도 큰 후원자였다. ‘밥묵차’ 멤버들도 아들들이 매달 100만 원에서 200만 원 가까운 큰돈을 후원해왔다고 알고 있었다.

막내아들 김청민은 그 얘기를 듣고 “엄마한테 5만 원만 드려도 주변에는 500만 원쯤 드린 걸로 알려진다”며 웃었다. 그냥 여윳돈 생길 때마다 용돈 조금씩 드린 것뿐”이라고.

그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삼형제의 용돈이 ‘밥묵차’ 재정의 큰 기반이었음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게 받은 용돈은 ‘거의 전부’ 음식 재료비나 밥차 기름값으로 쓰였으니까. 그리고 엄마에게 드리는 용돈이 다 그렇게 쓰인다는 걸 알면서도, 삼형제는 계속 돈을 보냈다.

“사실 민망하죠. 더 큰 돈을 후원해주신 분들도 계신 걸로 아는데…. 그리고 매번 쌀을 보내주시는 농부 분들도 있고, 채소에, 고구마에, 철마다 좋은 특산물들 보내주시는 분들도 정말 많이 있어요. 그런 분들보다 아들들이 더 잘했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유희의 집으로 쌀이며 감자며 철마다 식재료를 보내준 수많은 후원자들. 김청민은 그들의 정성에 비하면 아들들의 지원은 큰 게 아니라고 말했다. ⓒ유희 페이스북

나 좀 안아주세요. 그대들이 힘 주실 차례입니다. 하하. 동지니까요.”

2022년 11월 유희가 페이스북에 쓴 글. 넘치는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강철여인’이라 불린 그녀가 올린 뜻밖의 글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올린 글이었다.

암 투병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녀의 부탁대로 ‘힘을 주기 위해’ 모였다. 2023년 1월 유희를 응원하기 위한 ‘토요일은 밥이 좋아’ 행사가 열렸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 유희의 밥으로 용기를 얻었던 80여 명의 사람들이 민주노총 인천지부 지하강당에 모였다.

“(응원 행사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간 아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늘 엄마가 자랑스럽긴 했지만, 엄마 참 잘 살았다’고 말했다. 행사에서 사람들이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너무 자랑스럽다, 신문에 나온 걸 보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한다고. 아들 셋이 그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이 났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행사 이후에도 ‘밥값을 갚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유희를 향했다.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치료비 봉투를 들고 유희의 집으로 찾아왔다. ‘감사패’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내주고, 공장에서 여럿이 ‘응원’ 현수막을 들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유희의 밥으로 응원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이제 그녀를 응원했다 ⓒ유희 페이스북

꽃을 좋아하는 유희를 위해 철마다 피는 꽃들을 계속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그뿐인가. 한우며, 산나물이며, 과일이며, 전국 각지에서 보내준 음식과 선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달됐다.

“전국을 돌며 동지들에게 먹여주신 밥그릇 수만큼은 더 사셔야 합니다. 아마 100년은 되겠지요?” (‘사드 반대’ 투쟁 중인 소성리에서 보내온 응원 편지)

유희는 투병 중에도 ‘밥 연대’를 멈추지 않았다. ‘밥묵차’ 멤버들의 힘으로 밥을 짓고 현장으로 찾아갔다. 유희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때는 동행해서 차 안에 앉아 지켜보거나, 현장 사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곤 했다. 유희의 곁에는 막내아들 청민도 함께였다.

“투병 중에도 ‘밥묵차’를 몇 번 나가셨거든요. 마약성 진통제까지 드실 때니까 (엄마가 나가는 게) 너무 싫은데, 또 막상 같이 가보면 ‘말리면 안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요. ‘이게 엄마 삶의 이유구나. 엄마는 이걸로 힘을 얻는구나.’ 그래서 저도 몇 번 쫓아다녔죠.”

투병 중 밥 연대 현장에서 유희와 김청민. 2022년 12월. ⓒ유희 페이스북

“암을 고치려 하고 있지만, 지난 삶에 후회 없다. 순간순간 뜨거웠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 나처럼 누릴 거 다 누린 사람이 어디 있어. 오늘 바로 죽어도 여한 없다. 그저 너무 많이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청민은 엄마가 통원 치료를 받는 국립암센터 옆에 집을 얻었다. 진료 사이사이 몇 시간 비는 동안 엄마가 차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안쓰러웠다. 두어 시간이라도 누워서 편히 쉬길 바라는 마음. 엄마가 드나들기 좋게 1층 집으로 얻어서 진료 받는 날마다 그곳으로 모셨다.

어린 시절부터 청민은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투쟁!”을 외치는 걸 많이 봤다. 주먹을 꼭 쥐고 하늘로 뻗으면서 “투쟁!”이라 외치면 엄마는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이길 수 있어, 엄마. 투쟁!”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차 안에서도, 병상에 누운 엄마 곁에서도, 청민은 “투쟁!”을 외쳤다.

“1인실에 입원했을 때, 일주일 내내 엄마랑 같이 있었거든요. 나중에 이모들이 전해줬는데, 그때 엄마가 되게 행복했대요. 아들이랑 언제 또 이렇게 같이 있겠냐고. 되게 행복했대요.”

그리고, 2024년 6월 18일.

꽃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유희. 꽃신을 신고… ⓒ유희 페이스북

– 믿기지 않는 소식 보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 우리는 또 소중한 동지를 한 분을 잃었네요. 유희 동지, 그 당찬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 “밥먹고 가! 먹어야 더 열심히 싸우지!” 그 우렁찬 목소리가 영원히 그리울 것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늘 감사했습니다.

– 유희 언니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밥을 먹고 그 밥심으로 싸웠습니다. 언니가 주신 ‘밥심’… 잊지 않을게요.

– 유희 언니, 따스한 언니의 품이 좋았어요 계속 안겨 있고 싶었어요. 유희 동지… 감히 불러봅니다. 사는 동안 보여주신 길, 따라 걸을 수 있을까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여러 현장에서 동지들 먹이겠다고, 아프실 때도 동지들 보겠다고, 그렇게 만났던 시간들이 생각나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도. (…) 평화로운 안식을 빕니다.

– 유희 님, 매일 해주신 기도와 응원 덕분에 잘 버티고 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도 다른 외롭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버팀목이 되고 기도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밤낮으로 동지들 걱정하고 기도하며 애틋한 마음, 사랑, 베풂, 따뜻함, 열정….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울 겁니다. 보고 싶습니다.

– 유희 언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곳에서도 큰소리치며 이렇게 환히 웃고 계셔요.

– 또… 동지를 가슴에 묻는다. 유희 동지 누님 잘 가소….

– ‘밥묵차 누님’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노래 제목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해 떠나셨다. 고마웠습니다.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페이스북 추모 메시지 모음)

청민은 장례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 몰랐다. 더 놀랐던 건, 엄마와 친하지도 않고, 잘 알 리는 더더욱 없고, 그저 ‘밥 한 끼 얻어먹은 게 고마워서’ 왔다는 사람들이었다.

부고 기사를 보고 찾아왔다는 쪽방촌 사람들. 형행색색 ‘투쟁조끼’를 입고 온 수많은 청년들. ‘종교 대통합’이란 말이 나올 만큼 여러 곳에서 찾아와준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

“‘밥 한 번 얻어먹은 적 있어요’ 하면서 부고 기사 보고 찾아오신 분들을 보면서, 정말 고마웠고,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밥 한 번이 뭐길래, 도대체 뭐길래….’ 그게 정말 인상 깊었어요.”

유희는 자기 장례식에서 아무도 울지 않길 바랐다. 모두 웃고 떠들고 ‘밥 먹고’ 가길. ⓒ고인석 제공

청민의 눈에 그들은 인맥 때문에 형식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말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다들 많이 울고, 진심을 다해 애도하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 옆에서 엄마가 하는 일을 많이 봤지만, 솔직히 ‘(사회)운동’ 이런 쪽은 싫었어요. 엄마가 고생하는 게 싫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구나’ 싶어요. 엄마가 가시면서 알려주신 것 같아요. 가시면서 또 한 번 교훈을 주신 것 같아요.”

유희는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묻혔다. 묘비명, “밥은 하늘이다”. 유희가 생전에 가장 많이 한 말이자, 그녀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주길” 바란 한마디.

“(질문 : 묘비명을 생각해봤나?) ‘밥은 하늘이다.’ 딱 한마디다. (…) 밥은 하늘이라는 걸 가슴에 새겨달라. 밥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거다. 다 같이 밥을 먹기 위해서는 너도 십시일반하고 나도 십시일반해서 이 하늘을 서로 나누는 거지.”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밥은 하늘이다” 유희의 묘비명 ⓒ셜록

청민은 유희의 묘소 앞에 벤치를 설치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편히 앉아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그리고 상자에 생수와 종이컵, ‘믹스커피’를 수북이 담아놨다. 유희가 매일 아침마다 즐기던 믹스커피. 청민은 상자 바깥에 방문객들을 향한 편지를 써서 붙여뒀다.

올라오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이 생수 한 병씩 드시며 잠시 쉬세요. (…) 커피 한 잔씩만 타서 어머님께 전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유희 묘소에 써둔 김청민의 편지)

지난 7월, 내가 다른 일로 모란공원묘지를 갔다가 혼자 유희 묘소를 들른 적이 있다. 멀리서 보니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청민이었다. 그날은 유희의 양력 생일. 묘소 앞 상석에 작은 케이크 하나가 놓여 있다. 나를 보고 놀라는 청민의 눈가가 이미 젖어 있었다.

김청민이 유희 묘소에 설치한 벤치 위에는 큰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셜록

청민의 손목에는 ‘세월호’ 노란 팔찌가 있다. 1주기 추모제에서 처음 만났을 때, 두 번째 유희 묘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세 번째 인터뷰를 하러 만났을 때, 늘 손목에 차고 있었다.

그에게 세월호 팔찌는 참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곧 ‘엄마의 마음’이 담긴 물건, 언제 어디서나 몸에 지닐 수 있는 ‘엄마’였다.

“엄마가 세월호 밥 연대도 많이 가셨어요. ‘야 너도 이거 해’ 그러시면서 팔찌를 주셨어요. (…) 이게 세 개째예요. 한 번은 끊어져서 엄마한테 새로 달라고 했고, 두 번째는 하관할 때 엄마 묘지에 넣어드렸어요. 그리고 이건 장례식 때 오신 어떤 분한테 하나 달라고 해서 받은 거예요.

엄마도 세월호 팔찌를 항상 하고 다니셨어요. 그래서 (세월호 팔찌는) 유품 같은 느낌도 있고, 커플링처럼 엄마랑 똑같은 걸 하고 있다는 느낌도 맞아요.”

후세들은 유희의 생을 어떻게 기억할까. 많은 사람들이 유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이 역사에서 아주 작은 물줄기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이 야만의 시대를 끝장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야만의 시대를 끝장낸다는 건 모두가 평등하게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희는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밥은 하늘이고, 밥은 힘이고, 밥은 사랑이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밥은 하늘이고, 밥은 힘이고, 밥은 사랑이다” ⓒ유희 페이스북

※ ‘하늘을 짓는 여자’ 연재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10화] 탄핵광장에 K-POP이 있듯 그 시절 ‘유희’가 있었다
[11화] 모두를 먹여살린 ‘욕쟁이언니’… 그녀의 마지막 기도
[12화] 할매들 손에 꽃이 피었다… 춤추며 싸우는 ‘언니’의 힘
[13화] ‘선한 마음’의 연결…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 한 사람
[14화] 노점에서 자란 꼬마 ‘짱구’, 엄마의 평생동지가 됐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