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에 있어서 올바른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냥 ‘사람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함께 갖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임정득이 기억하는 유희는 ‘운동적 올바름’과 ‘사람 좋음’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다. 그래서 “매력 있는” 사람.

“언니를 현장에서 만나면 항상 음식을 챙겨주셨어요. 집에 가서 아이 먹이라고 빵 같은 것도 주시고. 저뿐만 아니라 현장의 문화활동가들에 대한 애정이 되게 깊으셨어요.”(임)

유희의 관심사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먹이고 챙기는 거였다. 특히 자신처럼 노래와 예술로 사람들을 응원하는 문화활동가들을 사랑했다. ⓒ유희 페이스북

유희가 사랑한 문화활동가 중 한 사람이 신유아다. 현장예술활동가로, 기획자로 오랜 세월 노동자 투쟁 현장을 지켜온 신유아. 그녀가 기억하는 유희의 첫인상 역시 ‘놀라움’이었다.

“처음에는 언니가 전화했을 때 되게 놀랐어요. 쌀이 좀 생겨서 떡을 뽑아서 떡볶이를 해주고 싶은데, 농성장에 몇 명이나 있냐고 전화를 하는 거예요. 언니한테는 주로 그런 전화를 많이 받았죠. 언니는 그렇게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한 것들을 신경 써온 거죠.”(신)

‘노래하는 유희’의 모습 역시 놀라움이었다. 집회 현장에서 흔히 보지 못한 ‘화려함’에 눈길이 갔다. 어쩔 수 없는 낯선 느낌.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연대의 진심이 보였다.

“나중에는 언니가 음식연대 하러 오시면, 따로 요청도 드리고 그랬어요. 노래도 꼭 해달라고. 지금은 집회 현장에서 대중가요를 듣는 게 익숙해졌지만 예전에는 되게 낯설었잖아요. 언니는 그 ‘낯섦’을 깨는 사람이었죠. 그런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신)

밥으로, 노래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연대한 사람. 앞치마를 두른 채 마이크를 잡은 유희. 2021년. ⓒ유희 페이스북

신유아도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농성장에서 유희의 밥을 헤아릴 수 없이 먹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의 언니가 먹여살렸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희는 집회 참가자들의 끼니뿐만 아니라 뒤풀이 안주까지 준비해줄 때도 있었다. 그 세심함은 따라갈 수가 없다.

“여러분~ 밥 왔어요!” 한마디면 집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긴 얘기가 필요 없다. 둘러앉아 밥을 함께 먹으면 정이 쌓인다. 그 밥을 해준 사람, 유희에 대한 정도, 고마움도, 친근함도 쌓인다. 신유아는 꼭 ‘욕쟁이 아줌마’ 같은 유희의 ‘속정’을 기억한다.

“대놓고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속정이 깊은 사람. ‘츤데레’. 그냥 조용히 밥만 퍼주는 게 아니라 ‘야, 너 밥 안 먹어? 더 먹어!’ 혼도 내고 막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언니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편안함이 있죠. ‘욕쟁이 아줌마’ 같은 느낌.(웃음)”(신)

함께 인터뷰한 임정득이 “맞아, 맞아” 하고 같이 웃는다. 집회 도중 경찰이 강제해산이나 연행을 시도하며 충돌이 벌어지면, 유희는 밥이고 뭐고 다 놓고 달려와서 맨 앞에서 싸웠다.

“싸울 때도 절대 몸을 사리거나 뒤로 빼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욕 겁나 잘하거든.(웃음) 막 앞에 나가서 욕하고, 싸우고, 이게 언니의 트레이드마크예요. 그걸 자기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노점상 시절부터 겪어온 당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신)

“밥을 나누면서 나도 점점 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사람이니 싸워도 같이 싸워야 버틸 수 있다. 함께하는 가치를 배운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청와대 앞 사드반대 농성장에 밥을 전하러 가다 경찰에 막히자 울부짖으며 싸우는 유희. 2018년 ⓒ성주사드일기 카페

어떤 문화활동가들은 본인의 공연이 끝나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유희는 밥을 다 나누고 나서도 집회 현장을 먼저 떠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집회가 시작하기 전에 일찍 오고, 집회가 끝날 때까지 함께하는 “굉장히 드문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유희를 ‘언니’처럼 ‘누이’처럼 여기는 노동자들도 많이 생겼다. 한 현장에 ‘여러 번’ 찾아가는 경우도 많았느냐고 내가 묻자, 신유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러 번’이 아니죠. ‘수십 번’ 갔죠. 만약에 10년을 투쟁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만 집회를 했다고 해도, 그게 몇 번이에요? 언니도 그만큼 많이 갔다는 거지. 그 친밀감은 생각보다 훨씬 높을 거예요. 그냥 자식 아니면 친구, 이런 느낌으로 대하지 않았을까.”(신)

노동자들 사이에 ‘유희의 밥을 먹으면 투쟁에서 이긴다’는 전설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일 거다. ‘이길 때까지’ 밥을 하니까. 노동자들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유희도 끝까지 밥으로 연대했다. 그래서 결국 승리를 함께 만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전설의 ‘진실’이다.

조리기구를 갖춘 ‘밥차’가 없던 시절엔 음식과 모든 도구들을 승용차에 싣고 다니며 밥을 나눴다. 2016년 ⓒ유희 페이스북

가끔은 밥을 나누러 오는 게 아니라도, 노래를 하러 오는 게 아니라도 유희는 ‘그냥’ 집회 현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참가자의 한 사람으로 같이 앉아서 연대했다. 신유아의 기억에 유희는 ‘밥으로 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마음으로 연대하는 사람”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그랬다. 2022년 11월 유희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며칠을 펑펑 울었다. 그 끝에 결심이 섰다. 남은 인생이 얼마든 밥을 나눌 수 있으면 더 나누고, 집회 없는 날엔 여행 다니며 즐겁게 보내자 다짐했다. (…) 세 아들은 난리를 쳤다. (…)

절충했다. 입원 대신 통원하며 반은 치료, 반은 하고 싶은 거 하며 산다. 월요일에 치료받고 오면 화, 수 이틀은 골골거린다. 목요일쯤 힘이 생기면 금, 토, 일은 밖에 나다닌다. 소식이 닿으면 집회 현장에도 간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유희는 투병 중에도 집회 현장으로, 농성장으로 찾아갔다. 밥묵차 ‘멤버’들의 도움으로 음식을 해서 같이 올 때도 있고, 그조차 안 될 사정이면 조용히 집회를 참석하러 오기도 했다.

원래 유희는 골격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투병 이후 하루하루 몰라보게 야위어갔다. 신유아는 어느 날 집회에 온 유희가 마른 몸으로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걸 기억한다.

야윈 모습으로 집회 현장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유희 ⓒ신유아 제공

유희는 몇 해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민중가수 황현의 추모제에도 참석했다. 황현 역시 유희가 참 아끼던 문화활동가 중 하나였다. 투병 말기, 병색이 완연한 유희가 그 자리에 어떤 마음으로 왔을까. 신유아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짜르르 저려온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유희를 걱정했고, 유희는 ‘투쟁하는 사람들’을 걱정했다.

“‘언니 아픈데 어떻게 왔어요!’ 하면, ‘아유 걱정되는데 그럼 안 오냐?’ 이런 식이에요. 우린 언니 건강이 걱정인데, 언니는 그것보다 지금 너무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걱정되는 거죠. 어떻게든 현장에 나오려고 노력하셨는데, 그런 마음이 너무 고마운 거예요.”(신)

투병 중에도, 먼저 세상을 떠난 민중가수 황현의 추모제에 참석한 유희. 2023년 10월. ⓒ신유아 제공

유희는 ‘걱정 많은 사람’이었다. 여름엔 여름이라 덥고 비가 와서 걱정, 겨울엔 겨울이라 춥고 눈이 와서 걱정. 그 걱정은 늘 자기 걱정이 아니라 ‘남 걱정’이었다. 집이 아니라 천막에서, 공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때로는 땅이 아니라 고공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걱정했다.

“같이 있으면 그냥 느껴져요. ‘이 언니가 나를 걱정해주는구나.’ 본인도 아픈데 옆에 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챙기고…. 페이스북 기도문 알죠? 본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잖아요.”(신)

투병 중 유희가 페이스북에 매일같이 올린 ‘기도문’ 역시 걱정으로 가득했다. 수십 명의 이름을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며, 누군가의 건강, 누군가의 평화, 누군가의 승리를 기도했다.

투병 중에 올린 유희의 기도문에는 늘 타인을 위한 기도로 가득했다. 2024년 5월 16일 마지막 기도문. ⓒ유희 페이스북

유희의 기도문 속 “민중의 보배이기에, 전국에서 울려퍼지는 쭈니의 노랫소리에 힘 받는 동지들 있기에”라는 문구 옆에는 박준의 이름도 있었다. 자신은 암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박준의 ‘족저근막염’이 낫기를 바라는 기도를 빠지지 않고 올렸다.

박준은 투병 중인 유희의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서”. 마른 몸으로 집회 현장에 나와 있으면, 속상한 마음에 “여긴 왜 왔어!” 하고 더 야단을 쳤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사무친다”.

병원에 누워 있는 유희를 만나고 온 적은 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연락을 받고서.

누이 손 잡고 노래 하나 해드렸죠. 조용하게. 가톨릭 성가를 불러드렸던 것 같아요. 그때 누이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거든요. 들으시라, 그러면서 울면서 불렀죠 뭐, 울면서. (누이는) 멀뚱멀뚱 이렇게 쳐다보시면서 듣는데…. 갑자기 또 가슴이 아프네….”(박)

그날 박준의 노래는 유희의 마음속에 가닿았을까. 노래를 들으며 유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가 아직 의식이 있고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시절, 유희는 문병을 온 사람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었다. 빨리 나아서 노래 부르러 가자는 사람들의 말에, 유희는 몸도 일으키지 못한 채 갑자기 “아- 아-” 하고 목을 풀기도 했다.

하지만 유희가 다시 무대에 서는 날은 오지 못했다. 매일같이 올리던 기도문은 2024년 5월 16일로 멈췄다. 약 한 달 뒤인 2024년 6월 18일, 그녀는 숨을 거뒀다. 향년 65세.

지난 6월 18일 유희 1주기 추모제. 애써 울음을 참아가며 노래하는 임정득. ⓒ셜록

장례는 ‘민주동지장’으로 치러졌다.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다.

“저한테는 참 ‘지랄’ 같죠.(웃음) 이렇게 먼저 가버려 가지고. 문득문득 (누이를) 생각해요. 그리고 모란공원은 1년에도 여러 번 갈 일이 있으니까, 그때마다 (산소에) 가보고. 사실 여직 실감이 안 나요. ‘정말 떠났나?’ 언젠가 또 현장에서 볼 것 같은 생각도 들고.”(박)

박준의 기억 속 유희는 “완벽할 순 없지만 한결같이 살아온 사람”이다. 독실한 신앙만큼 그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도 “세상의 낮은 곳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애쓴 사람.

그리고 “정말 사람 냄새가 진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현장이든 ‘사람의 마음’으로 가니까, 그것이 (현장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와닿았을 거예요. 누이가 주고 간 게 너무 많아요. 저뿐만 아니라, 억울하고 힘들고 아픈 투쟁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유희’라는 두 글자가 계속 있을 거예요.”(박)

“밥을 준비하면 전날부터 힘들다. 그렇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힘든 게 싹 가신다. 보람을 느끼고. 저렇게 잘 먹는데 안 왔으면 어쨌을까. 잘 왔다. 내가 안 왔으면 추운 데서 덜덜 떨었을 텐데. 오기를 참 잘했다. 그렇게 오래 했으면서도 그 모습 보는 건 늘 좋다. 그게 내가 사는 맛이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유희 묘소에 놓인 꽃. “언제나 그립습니다.” 지난 6월 18일 유희 1주기 추모제 ⓒ셜록

박준은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며 “그래도 여기 늘 같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소리 없는 웃음과 함께. 그리고 또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탁인 듯 기도인 듯 한마디 덧붙였다.

“누이, 좀 자주 와요, 자주. 꿈에 좀 자주 오셔.”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10화] 탄핵광장에 K-POP이 있듯 그 시절 ‘유희’가 있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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