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처럼 “라면 물 끓일 형편도 안 되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녔다. 카페 운영에 봉사단 활동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내 자식들 먹는 것만큼 너무 이쁘고 너무 고마운” 마음에 농성장 밥 연대를 이어갔다. 자신이 지은 밥을 “정말 감사하게 먹는 그 마음이 눈에 보여서” 연대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들은 그런 유희에게, 시샘인지 칭찬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도 했다.
“엄마는 밥차 음식 할 때만 눈에서 빛이 나. 그래놓고 음식 다 하고 나면 아파 죽겠다고 병원에 물리치료 받으러 간다 그럴 거면서.”
유덕희네 동네 사람들도 유희의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다. 유희는 소문난 ‘큰손’. 음식을 모자라게 하는 법이 없었다. 집회 현장이나 농성장에 밥 연대를 하고 음식이 남으면, 유덕희의 미용실로 가지고 왔다. 집집마다 이웃들에게 나누는 일은 유덕희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희의 밥 연대는 스케일도, 활동 폭도 커졌다. 아들이 타다가 엄마에게 선물한 고급 세단 ‘에구순이’에 밥을 싣고 다녔다. 차종이 에쿠스라 ‘에구순이’란 애칭을 붙였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자’라는 이름도 생겼다. 나중에 시민 모금을 통해 밥차를 마련한 뒤에는 ‘밥묵차’로 이름이 바뀌었다.

처음엔 ‘독고다이’로 시작한 밥 연대. 시간이 지나고 소문(?)이 나면서 한두 명씩 조력자들이 생겨났다. 식재료를 마련하는 것, 밥을 짓는 것, 음식을 옮기는 것, 현장에서 음식을 나누는 것, 단계별로 여러 사람들의 손을 빌려 밥 연대를 이어나갔다.
“유희는 맨날 ‘나를 따르라’잖아요. 그 카리스마하고 고집을 다 알죠. 밥차 도와주는 사람들도 유희를 굉장히 많이 따라주고 고생 많이 했어요. 고마웠죠.”(유)
박원주 역시 유희의 밥 연대를 조용히 돕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두 사람이 집회 현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뒤, 유희는 박원주의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희는 봉사단을 데리고 공연을 가겠다고 약속했다.
공연 날, 박원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희는 짧은 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늘 그랬듯이 ‘무대를 뒤집어놓았다’. 그날 이후 박원주는 유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아예 음향 담당을 맡아, 유희의 봉사단과 함께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인천에서 수십 년간 활동해온 박원주는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아는(?) 마당발 중의 마당발이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유통업 하는 사람, 수출입 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식자재며 식기 같은 것들을 공수했다.
물론 모두 ‘공짜’였다. 유희가 하고 있는 밥 연대의 의미를 알려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일에 써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원주에겐 트럭이 있어서 식재료를 실어 나르는 데 딱이었다. 유희의 밥 연대가 ‘출동’할 때, 박원주가 운전대를 잡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날은 현장 배식까지 직접 도왔다.


‘적당히’를 모르는 유희의 고집 탓에, 둘이 다투기도 많이 했다. 박원주의 잔소리에는 이유가 다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먹이고, 한 곳이라도 더 찾아가겠다고 유희가 고집을 부리는 동안, 유희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느낄 정도였다.
“둘이 얼마나 싸웠다고요. 니 몸을 봐라, 지금 니 몸 말라가는 걸 보라고…. 처음엔 (유희가) 너무 힘들어서 말라간다는 생각만 했지, 병이 있어서 마르는 걸 몰랐어.”(유)
다른 사람 밥을 챙기느라 전국 팔도를 다 다니면서, 정작 자신은 밥을 잘 먹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좀 받으라 말해도 잔소리로 여길 뿐이니, 유덕희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보다 못한 박원주가 유희를 강제입원(?) 시킨 적도 있었다. 속이 아프고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을 들은 데다, 나날이 말라가는 게 박원주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당발’의 능력을 발휘해서 병원을 알아보고 검진을 예약했다. 5일가량 입원해서 검사를 받았다.
아덜(아들)들, 그러니 밥 나가는 거, 그만해! 잔소리. 난 이게 낙이고 희망이고 삶이여, 알았지? 병원 알아보고 꼬장(?) 펴서 입원검사 신경써주신 박원주 인천빈민연합 의장님, 수고하셨어요. 고맙구요~^^ (유희 페이스북 글, 2022년 6월 19일)
유희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주변에 알렸다. 하지만 살이 14킬로그램이나 빠졌으니, 사람들은 걱정을 완전히 거두진 못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2022년 11월, 새로운 진단이 나왔다. 췌장암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밥 연대와 노래봉사) 하다가 죽는 게 자기 소원이라고 그랬어요.”(유)
그 말 그대로였다. 투병을 시작하고 나서도 밥 연대를 이어갔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들 때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밥을 지었다. 유덕희도 그중 하나였다. 새벽 4시에도 언니를 불러서 음식 준비를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유덕희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
‘니 목숨이 너 혼자만의 목숨이야? 너만 저세상 가면 그만이야? 자식들 생각은 안 해? 니가 그렇게 아픈데, 니가 해준 밥을 먹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할까? 마음이 편하겠냐고!’
음식을 해놓고 나면 유희가 기다시피 방에서 나와 간을 봤다. 유덕희의 가슴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시소를 탔다. 동생을 무조건 뜯어말리고 싶다가도, ‘그래도 니가 힘들 때 언니를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고마웠다.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했다.
유희의 고집을 모를 리 없는 언니였다. 30년 전에도 그랬다. 1995년 겨울. 인천 아암도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의 억울함을 풀자는 투쟁이 벌어졌다. 시신이 안치된 길병원 영안실. 사람들은 그곳을 지키며, 이듬해 봄까지 싸움을 이어갔다.
유희가 전국노점상연합 부의장을 맡고 있던 시절. 그녀 역시 함께 싸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였다. 집에는 중고등학생이 된 세 아들이 있었다.
“가서 보니까 시커먼 사람들하고 농성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어떻게 애들 셋을 놔두고 그 시체들 있는 틈에 노숙을 하고 있냐고. 지 형부(유덕희 남편)랑 쫓아가서 간신히 끌고 왔어요. 우리 집 안방에 넣고 문을 잠갔지. 지 형부가 출근하면서 ‘처제 절대 못 나가게 지키고 있어!’ 그랬는데, 아이고 나중에 보니까 창문으로 도망갔어요. 그걸 어떻게 막아.”(유)
한때는 동생을 뜯어말리기 위해 감금(?)까지 불사했지만, 또 나중에는 동생을 따라 집회에서 “손도 많이 올렸던” 사람이 바로 유덕희다. 쇼핑 좀 하자고 둘이 같이 부평역에 나갔다가도, 집회 하는 게 보이면 유희는 바로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럼 언니 유덕희도 같이 뒤에 서서 “손 올리는 걸” 많이 했다. 주먹 쥔 손을 뻗어 올리며 구호를 외쳤다는 뜻이다.

수상한(?) 여행도 많이 갔다. 유희가 정한 목적지는 강원도 어디쯤. 웬일인가 해서 자매들이 따라가 보면, 아니나 다를까 ‘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이 열리는 곳이었다. 유희가 연대 공연도 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 유덕희와 자매들도 “손 올리는 걸” 함께했다.
네 자매가 인천 유덕희의 집에 모이면, 가까운 월미도 유원지에 같이 놀러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매들은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거기 노점상 하는 사람들요, 유희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뭐라도 드시고 가라고 팔을 잡아끌고. 유희 부의장 덕분에 우리가 장사할 수 있다고…. 옆에 같이 있다가 나도 디스코팡팡인가 바이킹인가 하는 것도 공짜로 타고 왔어요.(웃음) 야, 너 유명인사다, 그랬지.”(유)
그렇게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은 유희를 반겨주고 고마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덕희는 동생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동생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네 자매 중 유희를 제외한 셋은 모두 미용사다. 2022년 장애부모들이 삭발투쟁을 할 때, 유희의 자매들은 그들의 머리를 깎아주며 연대했다. 자매들은 투쟁 현장에서 유희를 대신해 노래로 연대공연을 하기도 했다. 시시때때 유희의 밥 연대에도 함께했음은 당연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생각할 땐 그래요. 왜 시끄럽게 데모를 할까? 그런데 사람이 다 ‘예’만 할 수 없잖아. 그건 독재지. ‘아니오’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정의롭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유희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그건 조금은 이해가 돼. 조금은.”(유)
힘없는 자들과 함께 싸우고, 가난한 자들의 밥을 짓고, 외로운 이들의 곁을 지켜온 한평생. 그 모든 게 유희의 진심에서 우러난 일이란 걸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유덕희는 지금도 묻고 싶다. 그 일들이 정말, 자기 목숨과 바꿔야만 하는 일이었느냐고.
2024년 6월 18일. 유희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며 유희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얻어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유희에게 크고 작은 빚을 졌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울었다. 그리고 또 한 끼의 밥을 함께 먹었다.

유덕희는 화가 났다. 안타까움과 애통함, 허탈함과 원망스러움이 뒤섞인 마음이었다고 할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사람들이 유희 니 목숨과 바꿀 정도로 그렇게 좋았냐. 나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해도 내 동생하고 바꿀 만큼 거룩하지도, 좋지도 않죠.”(유)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 행렬을 보며 조금씩 다른 마음도 생겼다. 특히 휠체어를 타고 온 많은 장애인들, 뜨개질로 손수 선물을 만들어 유희가 다시 찾아오길 기다렸다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유덕희의 가슴을 울렸다. ‘내 동생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헛되지 않았구나. 헛되지 않았구나. 그만큼 사느라고 애썼다. 대단했다. 내 동생…. 그 소리만 계속 하게 되더라고. 사람이 먹을 때만 좋고 받을 때만 좋은 거잖아. 그런데 내가 볼 때 (장례식에 찾아온) 이 사람들은 진심이더라고. 유희가 하듯이, 다 진심이더라고.”(유)
유덕희의 미용실 입구에는 유희 장례식 때 발간된 추모 자료집이 소중히 꽂혀 있다.
기자 : “늘 저기 두시는 거예요?”
유덕희 : “그럼요. 늘 두고 있죠. 아주 자랑스럽게. (표지의 유희 얼굴을 쓰다듬으며) 어디 가서 이런 인물 봤어요? 이런 인물.”

때로는 남편 같고, 때로는 자식 같고, 때로는 친구 같은. 유덕희에게 유희는 동생 이상의 존재였다. “정말 정말 아깝고 제일 자랑스러운” 인생의 버팀목이었다.
“부평역을 가려면 유희가 어른거려서…. 부평문화의거리를 지나가도, 아 저기 유희가 맨날 노래하던 자리다, 생각을 하지. 나는 여전히 여기 살고 있는데, 유희는 가고 없잖아.(눈물) 퇴근하고 집에 가다가 라디오에서 유희가 좋아했던 노래가 나오면, 가는 동안 또 울면서 가요. 늘 발길에 채이고, 눈길에 밟히고…. 세월이 가면 잊혀지겠지. 아니 조금은 흐려지겠지.”(유)
인터뷰를 마치고 미용실을 나서려는데 유덕희가 내 팔을 잡는다.
“아이고, 이 날씨에 어떻게 또 먼 길을 갈라 그래요?”
8월 초였다. 유덕희가 잠깐 두리번거리더니 ‘손풍기’ 하나를 집어 건넨다. 몇 번 사양했지만 소용이 없다.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기어이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그래도 고마워요. 스치고 지나가도 그만일 이야기를 기억해주고, 또 사람들이 알게끔 해주겠다 하시니까…. 지금 마음은 그냥 (유희) 산소에 가서 한바탕 울고 싶은 마음이네요.”(유)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또 눈물이 찬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렸다. 짧은 포옹. 나지막히 퍼지는 울음소리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추석 연휴 이후 10월 16일입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