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으로 북한강이 흘렀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한 찻집. ‘두 여인’의 발길이 자주 향하던 곳이다. 테이블엔 역시나 두 여인이 좋아하던 대추차가 놓였다. 강가에는 두 사람이 종종 걸음을 맞춰 걷곤 했던 산책로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 내 앞에는 한 여인만 앉아 있다는 것. 우리는 두 여인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에 앉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름은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를 이끌며 춥고 배고픈 노동자들의 곁을 지킨 유희. 또 한 여인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킨 성미선이다.

들꽃 앞에서 성미선(왼쪽)과 유희. 2022년 ⓒ유희 페이스북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그해 마지막 날 밤에 두 여인은 처음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할 광화문광장. 성미선은 페이스북에서 ‘어묵 나눔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광장으로 향했다. 글을 올린 사람은 유희였다.

“자식을 잃고 거리에 나와 투쟁하는 부모들 앞에 선 거잖아요. 어떻게 대해야 하나 조심스럽고, 좀 어려워하고 있었어요. 근데 (유희) 언니는 막 밝게 부모님들한테 인사하고, ‘따뜻한 국물 드세요! 맛있게 드세요!’ 하시는 거예요. 씩씩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웃음)”(성)

그 모습이 성미선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깊은 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데, 더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그분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30년간 거리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과 음식을 나눈 이야기가 있었고 그들의 사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

쌍용자동차 해직 노동자들의 대한문 농성장, 장애로 늘 거리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거리의 투쟁 현장과 광화문 농성장, 거리의 노숙인을 위한 자원봉사 현장, 지역 독거 어르신을 위한 밥 나눔 등 말로 다 전하지도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갔다. (성미선 글, 월간 작은책 2020년 10월호)

건강하고 평등한 ‘밥’을 짓고 나누는 일은 성미선의 활동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잘 알았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도 ‘밥’과 연결된 일들에 시간과 열정을 쏟던 사람인데, 저 같은 사람을 또 만난 게 신기했어요. 유희 언니는 자기 혼자 그 일을 쭉 해냈잖아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밥 먹이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신나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성)

그 뒤로 유희가 페이스북에 밥 나눔 공지를 올리면 시간 날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배식을 도왔다. 나중에는 음식 준비까지 함께했고, 어느새 밥묵차의 든든한 ‘멤버’가 돼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의 마지막 날 밤을 함께 보낸 인연으로 성미선은 밥묵차의 ‘멤버’가 됐다. 가운데가 유희, 오른쪽이 성미선. ⓒ유희 페이스북

성미선을 처음 만난 그 시절, 유희는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인천에 처음 자리 잡으며 차린 카페는 8년 만에 접었다. 이후 2년쯤 노래방을 운영하다가, 2013년에 주점 문을 열었다.

유희는 집회 현장을 다니고, 밥 연대를 하면서도 장사를 했다. (…) 노래도 하고 주방 일도 겸했다. 카페에서 새벽 세 시에 퇴근하고 두세 시간 잔 뒤 아침에 몇 백 명분 밥을 해서 연대를 나갔다. 잠이 모자라 버틸 수가 없었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노래방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유희의 생활은 다를 바가 없었다. 노래방 룸에서 밥을 짓고, 또 다른 룸에서 자면서 밥 연대를 계속했다. 주점 운영인들 뭐가 달랐겠나.

주점이라기보다 나눔을 위해 밥을 짓는 부엌, ‘동지’들이 와서 먹고 쉬는 쉼터에 가까웠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문을 열까 말까. 300만 원이나 되는 월세를 내기도 벅찼다. 결국 2년 만에 권리금도 못 받고 접었다. 주점 이름은 ‘주마등’이었다.

“(유희 언니는) 주마등 시절, 동지들이 편하게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이어서 좋았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사람들을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는 것 자체를 좋아하셨어요.”(성)

밥 연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유희. 2016년. ⓒ유희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밥 연대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룻밤에 1000인분 주먹밥을 하는 날도 있었다. 대형 급식소라면 ‘찐밥’으로 한꺼번에 많은 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희는 50인분 밥솥으로 스무 번, 밤새 잠 한 숨 안 자고 1000인분 밥을 했다.

한 현장에 이틀 연속 250인분 밥을 해간 적도 있다. 첫날 해간 밥이 약간 모자라서 몇 명이 못 먹었다. 유희는 “나 내일 또 올게” 한마디를 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장을 봤다. 또 밤새 250인분 밥과 반찬을 ‘더 넉넉히’ 해서 다음 날 그 현장을 또 찾아갔다.

재개발지구 빌라에 살던 시절 주방 하수도가 고장 났다. 300명분 음식 재료를 주방에서 욕실로, 욕실에서 주방으로 들고 나르면서 밥을 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지은 밥도, 현장에서 나눌 때는 그저 “맛있게 드세요!” 웃으며 외칠 뿐이었다.

휴가 나온 아들 찬 하나라도 더 해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엄마처럼, 언니는 매일 다른 반찬에 다른 국에 심지어 김치까지 고루 돌아가며 준비를 하셨다. ‘나는 밤에라도 집에 오지, 이 추운 날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면서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와’라는 말을 시작으로 설거지를 마치면, 다음 날 아침(식사) 준비가 끝나야 잠자리에 드신다. (성미선 글, 밥통 웹진 2019년 5월호)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연대의 밥을 선물한 유희. 2015년. ⓒ유희 페이스북

체력도 시간도 문제지만, 큰 문제가 또 있었다. 바로 ‘돈’. 유희는 2014년에야 후원 계좌를 만들었다. 코오롱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창이던 때. 너무 밥을 해가고 싶었는데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 그때 처음 계좌를 개설하고 페이스북으로 후원을 호소했다.

2000원, 만 원, 2만 원, 시민들의 크고 작은 정성이 모여 금세 200만 원 넘는 돈이 됐다. 그 돈으로 또 밤새 밥을 지어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연대의 힘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매일 일어나진 않았다. 후원금에 의지하는 건 유희가 원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일부 형편이 괜찮은 단체에서는 식재료비로 얼마씩 건네기도 했다. 대부분 원가에 미칠까 말까 한 액수. 그래서 유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주점 영업을 접은 이후에도) 라이브카페에서 알바를 했어요. 노래도 하고 주방도 봐주고. 저녁 7시까지 출근하고 새벽 3시에 퇴근하고. 두세 시간 자고 아침에 준비해서, 점심에 밥(연대)을 딱 나가는 거야. (…) 그러면 얼마든지 돼. 나 먹는 건 좀 대충 먹고. 나 밥도 잘 안 먹어요. 하루 한 끼 정도밖에.”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쌀을 사고 장을 봐서 밥 연대를 다녔다. 여러 시민사회 단체에 후원금도 보냈다. 자기 옷은 늘 5000원짜리만 사입으면서도, 그런 돈은 아낄 줄 몰랐다.

장성한 아들들은 유희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세 아들은 유희에게 매달 150만 원을 용돈으로 드렸다. 노점상으로 시작해 온갖 장사를 거치며 힘들게 살아온 어머니가, 이제 좀 편하게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 하지만 그 돈도 밥 연대에 거의 다 쓰였다. 알지만 말릴 수가 있나.

‘밥차’를 마련하기 전에 밥을 싣고 다니던 에쿠스 승용차, ‘에구순이’도 아들이 타다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거였다. 농성장이나 집회 현장에 새까만 고급 세단이 나타나면 늘 이목이 집중됐다.

밥차를 장만하기 전, 유희의 밥을 실어나르던 에쿠스 ‘에구순이’ ⓒ월간작은책

시커먼 에쿠스가 (집회 현장에) 들어서면 경찰들도 홍해가 갈라지듯 쫘악 길을 비켜준다. ‘이건 뭐지?’ 하고 쳐다보면 강남의 복부인 같은 포스로 유희가 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당당히 “밥 왔어” 한다.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에쿠스 뒷좌석과 트렁크에서 주먹밥이 나오는 광경은 웃기면서도 숭고하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처음엔 유희 혼자 시작한 밥 연대. 점점 규모와 횟수가 늘어나면서 페이스북에 일정을 올리고 도움을 구했다. 누구든 그날그날 시간 되는 대로 요리나 배식을 거드는 방식.

“일이백 명분은 나 혼자 음식을 해요. 근데 천 단위가 되면 페이스북에 ‘도와줄 사람 구합니다’ 올려, 그럼 정말 거짓말같이 몇 사람이라도 (거들어주러) 와요. 순간순간이 감동이지. 나한테 참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해가 갈수록 ‘고정적으로’ 일손을 보태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었고, 자연스레 ‘멤버’라 불리는 이들이 생겼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자’라는 이름도 생겼다.

2016년 ‘멤버’들 사이에서 밥차 이야기가 나왔다. 에쿠스가 아무리 ‘폼’이 난다 해도 밥을 싣고 다니기엔 편리한 차는 아니었다. 특히 여름엔 음식이 상할까봐, 겨울엔 음식이 식을까봐 늘 조바심을 내야 했다. 조리시설을 갖춘 밥차가 있으면 그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전기 프라이팬을 놓고 즉석 부침개를 부쳐 나눴다. 조리시설을 갖춘 밥차가 없으니 ‘에쿠스’ 트렁크며 뒷자석에 이런 기구들을 다 싣고 다녔다. 2016년 사진. ⓒ월간작은책

‘멤버’들은 모금을 통해 밥차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오히려 유희가 반대했다.

“그동안 (유희 언니가) 밥 나눔을 한 분들이 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밥을 먹으면서 늘 미안해했거든요. 그런데 밥차 마련 모금을 하면 혹시라도 그 사람들한테 ‘나도 돈을 내야 하나’ 이런 부담을 줄까봐, 절대 안 한다고 했어요.”(성)

그리고 또 하나. 밥차 예산은 2000만 원이 넘었다. 그 큰 돈을 모으고 쓰려면, 그만큼의 체계와 형식을 갖춰야 했다. 그럼 이전처럼 ‘가볍게’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유희는 걱정했다.

“‘내일 밥 연대 가능해요?’ 연락 오면, 바로 ‘예!’ 하는 거야. 일일이 회의 거치고 재정 맞추고, 여기 갈래 말래, 아이고, 그럼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독고다이’가 좋다는 거지. 그냥 빚을 내서라도 내가 하면 하고, 아니면 아닌 거야.”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밥 연대 현장에서. 오른쪽 첫 번째가 유희, 그 옆이 박은경. 2021년. ⓒ유희 페이스북

밥묵차 ‘멤버’인 박은경 역시 유희의 ‘독고다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밥 연대) 일정이 너무 많아서 ‘미리 논의 좀 하자’는 말도 나왔어요. (유희 언니는) 알겠다 그래놓고, 어느 날은 (혼자) 저기 (연대 현장에) 가 있고, 또 어느 날은 저기 가 있어요. 왜 말도 안 하고 가냐 물으니까 ‘얘기하면 니네가 말릴 거잖아’ 이런 식이에요.(웃음)”(박)

유희의 고집을 꺾는 데 6개월이 걸렸다. 2016년 9월 1차, 2017년 2월에 2차 모금을 진행했다. ‘멤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수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목표액에 거의 도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애초 예상한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게 된 거였다. 고민이 깊어갔다.

그때 생각도 못한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배우 김의성이다.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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