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섭외) 전화 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눈물바람 하는 거야. (인터뷰) 할까 말까 많이 생각했고, 밤에도 잠을 못 자고…. 유희는 내 가슴이에요. 가슴이 뚝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유덕희의 눈물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죄송한 마음을 뭘로 다 표현할까. 인천 효성동 오래된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유덕희의 미용실. 내 침묵과 그녀의 흐느낌이 작은 공간을 채웠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 6월 18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묘지에서 열린 ‘유희 동지 1주기 추모제’. 나는 일찌감치 도착해, 추모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묘역 아래에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희야-, 유희야-. 네가 왜 여기 있어야 돼. 네가 왜 여기 있어.”

추모제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많이 울던 사람. 유희의 언니, 유덕희였다.

묘역 아래에서부터 들리던 울음소리의 주인공, 유희의 언니 유덕희. 지난 6월 18일 유희 1주기 추모제. ⓒ셜록

유희는 2000년대 초반 서울을 떠나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많이 힘들어하던 언니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부평문화의거리에 ‘연인’이란 작은 카페를 열었다. 그때부터 유덕희와 한 동네에서 딱 붙어 지낸 세월이 20년이 넘었다.

인천으로 오면서 유희는 봉사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는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부평역 광장에서 노래를 하면서 막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앞에 모금함을 놓고 공연하는 거예요. 그 기금을 모아서 노인 분들 연탄도 사드리고 쌀도 사드리고.”(유)

유희는 MC 겸 가수의 1인 2역. 10년이 넘도록 무대를 지키며 부평역 앞을 ‘휘저었다’.

“부평역사 상가에 옷을 사러 가면, 상인들이 나한테 ‘유희 씨를 많이 닮았네요?’ 할 정도였어. 완전히 ‘부평스타’였지.”(유)

“유희는 완전히 부평스타였지”. 부평문화의거리 무대에서 정기적으로 모금 공연을 해왔다. ⓒ유희 페이스북

모금을 위한 공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요양원으로 찾아가는 공연이 훨씬 많았다. 그럴 때는 목욕봉사도 같이 했다. 어르신들을 한 분 한 분 다 씻겨드리고, 뒤이어 노래 공연까지 해드렸다.

“(목욕봉사가) 제일 힘들어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봉사를 마치면) 초주검이 돼갖고 오죠. 어르신들 몇 십 명씩 들어다가 목욕탕에 앉혀놓고 다 씻기는 거야. 깨끗하게 해서 앉으시라 해놓고 그때서부터 이제 공연을 하는 거야. 아이고, 그렇게 했어요.”(유)

처음에 유덕희는 “남들만 그렇게 챙기지 말고, 그럴 돈 있으면 네 자식들이나 한 번 더 멕여”라며 유희를 타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엔 그녀도 동생을 따라 봉사에 나섰다. 미용사의 전문성을 살려 이발봉사를 하는 건 기본. 유희처럼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취미로 하고 있던 차밍댄스 실력을 발휘해 공연도 했다.

노래 공연으로만 봉사를 하는 게 아니다. 연탄봉사, 목욕봉사, 음식봉사 모두 가리지 않고 나섰다. ⓒ유희 페이스북
유덕희의 미용실 입구에 붙어 있는 2010년 ‘봉사대상’ 시상식 사진. 동생을 뜯어말리던 언니도 어느새 열성적인 봉사자가 돼서 표창까지 받았다. 왼쪽 두 번째 유덕희, 세 번째가 유희. ⓒ셜록

그리고 유덕희가 “이건 나 말고 아무도 모를 거”라며 해준 이야기. 유희는 부평역 공연 때 노인들에게 줄 선물도 자비로 준비했다는 것. 공연 전날 선물을 손수 마련해 하나하나 포장까지 했다. 무대 주변으로 지나가는 어르신이 보이면 유희는 큰소리로 불러세웠다.

“엄마! 엄마! 일로 와! 여기 선물 받아가셔!”

“요양원 (공연) 갈 때도 똑같아. 선물을 자기 돈으로 다 사갖고 가서, 다 돌려. 엄마, 아버지 불러가면서 선물을 다 주고 ‘부모님전상서’ 노래 한번 해봐, 다 눈물바다지.”(유)

“엄마, 아버지 불러가면서 ‘부모님전상서’ 노래 한번 해봐, 다 눈물바다지”. 2019년 요양병원 노래봉사. ⓒ유희 페이스북
2018년 쪽방촌 음식봉사 후, 신나는 공연도 한 판! ⓒ유희 페이스북

‘부평스타’ 유희는 타고난 가수였다. 가수를 꿈꿨던 아버지 피를 물려받아, 네 자매가 다 노래를 잘한다. 유희가 태어난 1959년 그 시절,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집에 전축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질이 대단하셨죠. 엄마 아버지가 별표전축으로 음악 틀어놓고 사교춤 추는 걸 어렸을 때 보고 자랐으니까. (유희의) 그 끼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에요.”(유)

아버지가 딸을 가수로 키우고 싶어 이름을 그렇게 예쁘게 지었다. (…) 유희도 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잘했다. 아버지는 유희가 네다섯 살 때부터 기타 반주를 해 주고 노래를 시켰다.

“목이 메인 이이별가를 부울러야 옳으냐.”(<비 내리는 호남선> 손인호 노래, 1956년)

이 노래를 꼭 시켰다. 어딜 가서도 그 노래를 불러 지금까지도 다 외우고 있다. (월간 작은책 2016년 8월호, 안건모 기록)

아버지는 뚝섬 한강변 같은 곳에 어린 유희를 데리고 나가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 아버지는 유희가 노래를 잘하니까 가수를 시키자 하고, 어머니는 유희가 똑똑하니까 외교관을 시켜야 한다고 다투시기도 했다.

유희의 어린 시절 모습. 초등학교 졸업사진으로 추정. ⓒ유희 페이스북

하지만 학창시절 유희는 공부에 별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다만 그때도 지기 싫어하는 악바리 근성은 똑같았던 모양. 시험 전날은 ‘밤샘’을 했다.

“평상시엔 우리 교실도 몰라.(웃음) 근데 내일 시험이야. 남한테 지기가 싫으니까 밤새 공부를 해. 그럼 정말 시험을 잘 봐. (…)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학교도 잘 안 갔어요. 우리 집안이 쫄딱 망해서. 밀가루 수제비도 못 먹을 정도로. (…) 그래서 학창시절 얘기를 잘 안 해요. 오늘 되게 많이 한 거예요.”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밀가루 수제비도 못 먹을 정도로” 어렵던 그 시절에도 어머니는 남에게 ‘내어주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다. 남 굶는 꼴 못 보고, 쌀 갖다주고, 밥해다 주고. 훗날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를 이끌고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해본 사람”들을 찾아다닌 유희의 모습과 겹친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던 어머니를 보며 자연스레 닮아간 건 아닐까.

“소위 ‘꼴통’이었다. 불의를 못 참았다. 어릴 때 별명이 만화영화 <요괴인간>의 ‘베라’였다(1970년대 방영했던 만화영화.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는 소외되고 불쌍한 인간들을 지키는 정의 협객이다.). 그런 비슷한 별명이 많았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자매들이 유희를 부르는 별명은 ‘유관순’이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참 별난 성격” 때문에. 유덕희는 동생 유희가 “유씨 집안 유관순 열사의 피를 받은 거”라 여길 정도였다.

학창시절에도 친구들 앞에서 사회 보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 연애편지도 대신 써줬다.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지울 수 없는 아쉬움도 있다. 너무 일찍 끝나버린 배움의 길.

그래도 원망은 없다. 그 덕분에 배운 게 더 많으니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걸 배웠으니까.

“많이 못 배운 게 한이 맺히지. 그렇다고 그게 지금까지 원망스럽고 그렇지는 않아. 왜냐면, 내가 서울대를 안 나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많이 알지 않았을까. 그러면(서울대를 갔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 참 감사합니다.”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전국노점상연합 최초의 여성 부의장으로 활동한 유희. 1990년대, 트럭 위에서 연설하는 모습. ⓒ유희 페이스북

1980년대 초 스물셋 나이에 시작한 노점상. 열아홉 나이에 “납치당하다시피” 결혼해, 두 살 터울로 아들 셋을 낳았다. 막내가 태어난 그해부터 갓난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닭똥집을 팔았다. 나중엔 청계천에서 공구도 팔고 카메라도 팔고, 종로에서 포장마차도 했다.

노점상 운동을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 이후 전국노점상연합 최초의 여성 부의장까지 맡으며 신명을 다해 활동했다. “종로에 가면 언제나 유희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난한 살림 때문에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동료 활동가들을 위해 사무실에서 밥을 지었다. 1995년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을 하면서는, 연대하러 온 대학생과 시민들을 위해 투쟁 현장에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먹였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의 뿌리다.

노점상 운동 당시 밥을 지어 나눈 경험은 훗날 ‘밥묵차’ 활동의 뿌리가 됐다. 사진은 2018년 한국지엠 비정규직 밥 연대 모습. 한국지엠 공장도 인천에 있다. ⓒ유희 페이스북

2000년 전후로 노점상을 접고, 노점상 운동도 멈췄다.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워서 잠시 일본에서 일하기도 했다가, 결국은 언니 유덕희가 사는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유희가) 노점상 접었다는 얘기는 내가 들었거든. 어느 날부터 (투쟁 현장에) 안 보여. 그래갖고 ‘유희는 요새 뭐 하냐’ 물어도 다들 모른대. 그런데 나중에 ‘거기서’ 본 거야. 처음엔 모르고 스쳐 지나갔는데, 누가 날 툭 쳐. 이렇게 보니까 유희가 있더라고.”

박원주가 유희를 다시 만난 곳은 2009년 노동법 개악을 막기 위한 집회 현장이었다. ‘운동판’을 떠났다는 소문만 들리던 유희를 인천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두 사람은 유희가 노점상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사이다. 박원주는 인천에서 철거민 운동을 하고 있었다. 노점상과 철거민은 빈민운동의 틀에서 서로 연대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인천에서 벌어진 이덕인 열사 투쟁 때, 150여 일 동안 영안실을 지키며 함께 투쟁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도 가까워졌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철거민 단체가, 인천에 노점상 단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거의 10년 만에 우연히 만난 두 사람.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박원주는 뜻밖의 한마디를 들었다. 유희가 “투쟁하는 사람들한테 밥을 해주고 있다”는 말이었다.

기타를 만들던 콜트-콜텍에서 정리해고가 일어난 건 2007년. “세계 악기시장 점유율 30%”를 자랑하던 콜트-콜텍은 대전과 인천에 있던 공장을 차례로 닫고 노동자들을 내쫓았다.

콜트악기 인천공장은 유희가 살던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유희는 “머리맡”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소식을 듣고, 늦은 밤 조용히 농성장으로 찾아갔다.

“꼴이 말들이 아니다. 그걸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세상에, 공장에서 쫓겨나 농성하는 사람이 내 머리맡에서 이러고 있는데 까맣게 몰랐다니. 바로 옆을 못 봤구나. 가슴을 쳤다. 그날 이후 거의 매일 밥해다줬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콜트악기 인천공장 안 농성장 식당에 쓰인 구호. 공장 안 농성장은 2013년 2월 철거당해 노동자들은 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나갔다. ⓒ최규화

유희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으로 아침저녁 밥을 ‘배달’했다. 그냥 먹기만 하면 되도록 그릇까지 가져다주고, 빈 그릇은 다시 가져왔다.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할 때, 시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제를 할 때도 유희는 음식을 싸들고 찾아갔다.

콜트-콜텍 해고자 임재춘은 천막농성을 하며 오마이뉴스에 ‘농성일기’를 연재한 적이 있다. 2013년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재된 그의 글에도 유희가 등장한다.

밥은 건강입니다. 주방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농성을 하더라도 1일 3끼는 챙겨 먹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현재는 천막 농성장에 수도시설이 없어 음식을 하지 못합니다. 저 대신 음식을 해주신 유희 선배님께는 늘 감사를 드립니다. (임재춘 2013년 6월 7일 일기, 오마이뉴스 연재일은 2014년 1월 16일)

2019년 단식농성 중 임재춘(왼쪽)과 유희. 임재춘은 202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희 페이스북

임재춘이 농성일기를 연재하던 시절, 오마이뉴스 쪽 담당기자가 바로 나였다. 11년 전 내 손길을 거친 기사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니. 몰랐다. 반가운 마음 반, 송구한 마음 반이다.

“(농성장에) 가면 매일 컵라면을 먹어. 가슴이 막 찢어질라 그래. 겨울에 그게 금방 익기나 해? 김치도 없이 컵라면만. 그래서 그런 농성장이 어딘가, 컵라면 먹을 뜨거운 물도 못 끓이는 농성장이 어딘가, 이런 걸 찾아봐서 내가 많이 갔죠. 그게 콜트-콜텍이었고.”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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