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거리에 수상한(?) 냄새가 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로 붐비는 ‘호텔’ 앞 거리. 풍경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구수한 냄새다. 거리 한쪽에는 큰 현수막이 둘러쳐진 천막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큰 냄비에서 ‘옥수수’가 맛있게 익어간다.

‘길 위의 목사’로 불리는 최헌국 목사가 전날 경북 문경까지 가서 직접 따온 옥수수다.

“이분이 몇 년 전부터 항상 노동자 투쟁 현장들을 알려달라고, 옥수수 보내주겠다고 전화를 주셨어요. 너무 고마운 거죠. 그래서 옥수수 딸 때라도 일손도 돕고 막걸리도 한잔하려고 제가 직접 가거든요. 유희 쌤 계실 때는 유희 쌤께도 늘 옥수수를 보내주시던 분이세요.”(최)

명동 세종호텔 앞 도로, 10미터 높이 철골 구조물 위에서는 세종호텔에서 해고된 요리사 고진수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고공농성장이 올려다 보이는 거리에는 다른 해고자들이 천막을 치고 고진수를 지킨다. 옥수수는 그날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함께 나눠 먹었다.

2019년 세종호텔 노동자들을 위한 밥 연대에 나선 ‘밥묵차’. 지금은 이 도로 뒤편 10미터 높이의 철제 구조물 위에서 세종호텔 해고자 고진수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유희 페이스북

최헌국은 유희가 이끌던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의 멤버다. 그가 유희를 처음 만난 건 2009년이었다. 철거민과 경찰 등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가 일어난 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집회와 기자회견이 잇따라 열렸다. 그 현장에서 유희를 처음 만났다.

인연은 최헌국 목사가 활동하던 ‘촛불교회’로 이어졌다. 기독교인인 유희는 촛불교회 집회에도 열심이었다. 유희는 그때도 혼자 ‘밥 연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때때로 유희가 페이스북에 밥 연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글을 올리면, 최헌국도 가서 일손을 거들기도 했다.

그때는 ‘밥차’가 없던 시절이라 유희의 승용차에 음식이며 그릇이며 온갖 도구들을 싣고 다녔다. 서울에서 먼 지역으로 가거나 음식 양이 많을 때는 촛불교회 차량으로 돕기도 했다.

“그때는 경찰이 외부 진입을 통제하는 (농성) 현장이 많았어요. 그럴 때 ‘목사로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밥을 제공하러 온 거다’ 하면서 통제를 열어달라고 하고, ‘기도회를 하러 왔다’ 하고 들어가면서 밥을 같이 가지고 들어가고 그런 일들이 많았죠.”(최)

최헌국이 본격적으로 유희의 밥 연대에 함께하게 된 때는 2017년이었다. 그가 촛불교회 등 다른 상근활동을 내려놓게 됐을 시점. 유희의 밥 연대도 시민들의 십시일반 모금 덕분에 조리시설을 갖춘 밥차를 마련하고, 전국적으로 활동 폭을 넓혀가던 시기였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의 “국자 담당” 최헌국 목사(오른쪽 끝) ⓒ최헌국 제공

최헌국은 ‘밥묵차’의 활동에 “매료”됐다. 춥고 배고픈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밥 한 끼로 응원하는 일. 투쟁을 직접 돕는 것만큼이나 절실하고 중요한 도움이라 생각했다.

밥차에 대한 매료가 굉장히 컸어요. ‘아, 현장에서 정말 필요한 건 이거다!’ 말 그대로 밥심이죠. 대의명분만 가지고 투쟁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유희 쌤 하시는 걸 보면서, 이런 게 정말 필요하고, 특히 종교계 쪽에서 이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최)

최헌국은 유희와 함께 밥 연대를 다니며, 그녀의 헌신을 지켜봤다. 그리고 겉으로만 생색 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서도 정성을 다하는 그녀의 ‘마인드’를 보고 배웠다. 항상 ‘내 집에서 우리 가족에게 먹이는 밥을 한다’는 관점에서 음식을 하는 게 정말 좋았다.

“유희 쌤이 따로 식당 공간이 없잖아요. 아무리 양이 많아도 집에서 압력솥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서 밥을 해요. 저희들(밥묵차 멤버들)이 아무리 찜솥을 사자고 해도, 찐밥은 압력솥 밥하고 맛이 다르면서 고집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웬만한 반찬은 절대 안 사요. 반찬도 직접 당신이 다 하고, 그게 너무 와닿는 거예요. 말 그대로 정성이 들어간 거죠.”(최)

그렇게 정성스레 지은 밥을 싣고 유희와 ‘밥묵차’는 전국을 누볐다.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 치고 유희의 밥을 한 번도 안 얻어먹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소성리 밥 연대. 2017년. ⓒ유희 페이스북

특히 자주 찾은 현장 중에 ‘소성리’가 있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주한미군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대하는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차로 네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간 이유는 아마도 소성리 ‘할매’들 때문 아닐까.

“(유희) 언니는 밥하는 사람의 수고를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근데 어머니들이 밥을 해서 집회에 오는 사람들을 먹이는 게 언니는 너무 속상했던 것 같아요. 그분들도 맨날 투쟁하고 힘든데….

우리가 가서 밥을 해드리면 어머니들이 좀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처음에는 하루만 갔다 오자고 갔는데, 그게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웃음)”(밥묵차 멤버 성미선)

집회도 끝나고 밥 나눔도 마무리된 저녁. 소성리 ‘어머니’들은 하나둘 마을회관으로 모여든다. 그러면 유희는 집에서부터 챙겨온 ‘무언가’를 꺼낸다. 매니큐어다. 알록달록 화려하다 못해 ‘야하기까지’ 한 색깔. 어르신들은 “요망스럽다”며 손사래를 치고 물러앉는다.

“봐줄 영감도 없는데 이쁘면 뭘 해?”
“그러니까 이뻐져야지! 영감이 벌떡 일어나게!”
“그래? 그럼 발라봐!”

할머니 한 분 한 분 손에 꽃이 피었다. 울퉁불퉁 거뭇한 손에도, 살다 살다 이런 호강이 있냐며 좋아하시는 분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할아버지랑 살면서 좋았슈?”
“뭘 좋아? 맨날 일만 하면서 살았지. 놀러를 가봤나, 놀기를 해봤나.”
“그럼 지금 놀면 되겠네.”

유희 언니는 금세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고, 흥 많은 할머니들은 일어나 어깨춤을 추시며 좋아하셨다. (…) 유희 언니가 가진 힘이었다. (유희 장례자료집, 평화도서관 신현주 추모글)

소성리 ‘어머니’들 손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유희. 2017년. ⓒ유희 페이스북

유희는 소성리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살갑게 대했다. 내 부모 같은 사람들이 ‘평화’를 빼앗기고 고통 받고 있는 곳. 소성리는 유희에게,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현장이었다.

“소성리처럼 사드로 인해 늘 아프고 힘든 곳에는 평화만큼 절실하게 와닿는 게 없다고 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절규, 절망, 다급함 외에는 없고 ‘밥차’가 다니는 한 평화라는 단어는 없어요.” (유희 구술, 블로그 ‘성주사드 일기’ 2019년, 은영지 기록)

‘사드 반대’ 달력에 들어 있는 유희 모습. 소성리 사람들은 그렇게 유희를 기억했다. ⓒ유희 페이스북

평화를 잃고 투쟁하는 사람들, 일상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곁으로 유희와 ‘밥묵차’는 늘 달려갔다. 유희가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이 컸다”고 기억하는 순간 중에 2018년 11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4박 5일 노숙투쟁’이 있다.

전국에서 모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청와대 앞으로, 대검찰청으로, 국회로 다니며 투쟁했다. 유희와 ‘밥묵차’는 4박 5일 내내 그들을 쫓아다니며 ‘삼시세끼’ 밥을 책임졌다.

100인분이 넘는 밥을 매번 달라지는 장소로 찾아가며 짓고 나누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점심 준비를 해서 이동하고, 점심식사가 끝나면 또 이동해서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저녁 나눔이 끝나자마자 마트가 문을 닫기 전에 부리나케 달려가 장을 봤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면 11시를 훌쩍 넘긴다. 첫날 언니네 집으로 들어선 난 깜짝 놀랐다. 식재료가 부족해서 마트에 가서 장을 한 짐이나 보고 왔는데, 현관부터 시작해서 마루는 온통 찬거리와 당면, 밀가루 등을 비롯한 식재료들로 식재료상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었다.

‘아니 이렇게 많은데 뭘 또 그렇게 사셨어요?’ 하면, 아니 이건 여기에 써야 하고, 이건 또 뭐고 이러시면서 괜히 내 앞에서 주눅 든 아이마냥 변명을 늘어놓으신다. 그 모습이 귀엽다. (성미선 글, 밥통 웹진 2019년 5월호)

“비정규직 그만 쓰자” 2018년 4박 5일 비정규직 공동투쟁 밥 연대 ⓒ유희 페이스북

다음 날 아침식사 준비는 늘 자정 가까운 시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새벽 1시에 잠들고 새벽 5시면 일어나 밥을 싣고 나서는 일과가 반복됐다. 4박 5일 내내. ‘밥묵차’ 멤버 성미선도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 일을 해냈을까 싶다”며 기억하는 순간이다.

걱정은 ‘밥’이었습니다. 100~150명 밥을 매끼니 어떻게 해결할까 걱정했습니다. 유희 동지가 ‘십시일반 달려라 밥묵차’ 이름처럼 달려왔습니다. 4박 5일간 잠도 못 자며 밥을 해날랐습니다. 경찰병력이 밥차를 막아도 밀고 들어와 배식했습니다. 우리는 ‘원팀’이었습니다.

“차헌호! 시발! 200명 넘게 오면 어떡해! 인원 수 못 맞춰!”

국자를 들고 야단치시면서도 즐겁게 배식하던 유희 동지가 보고 싶습니다. (유희 장례자료집,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공동소집권자 차헌호 추모글)

‘밥묵차’ 멤버 박은경이 “엄청 고생했다”며 기억하는 때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이 벌어진 2020년 겨울이다. 10년 가까이 일해온 청소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그해 12월 빌딩 로비에서 시작한 농성은 해를 넘겨 이어졌다.

“신정 연휴 때였어요. (유희) 언니 집까지 가서 (노동자들 줄) 도시락을 100개 넘게 싸는데, 그것도 순서가 있어. 순서 틀리면 욕먹고, 일 못한다고.(웃음) 그렇게 도시락 포장을 해서 갖고 갔는데 (용역업체가) 반입을 안 시켜준 거야. 얘네들이 막 걷어차고, 던지고!”(박은경)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전하러 간 유희. 경비용역 측이 도시락 반입을 막기 전이다. 2020년 ⓒ유희 페이스북

전기도 이미 끊긴 로비 농성장. 사측은 ‘외부인’의 건물 출입을 제한했다. 그리고 도시락 반입조차 막았다. 몇 끼나 굶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전해준 ‘초코파이’조차 빼앗아 달아났다. 용역업체의 방해로 전달되지 못한 도시락은 차갑게 얼어붙은 채 버려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유희가 아니었다. 이제 도시락을 주는 것 자체가 ‘투쟁’이 돼버렸다.

“내가 약이 올라서 ‘니네들이 이걸(도시락을) 못 먹게 했으니, 이건 식어서 나 이 사람들 못 주겠다, 가서 또 밥을 뜨겁게 해오겠다’ 그래서 (도시락을) 또 해왔어요. 박스가 ‘따블’이 되는 거지. 쌓이고, 쌓이고.” (유희 구술, CBS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2021년)

100인분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빌딩 앞에서 막히고, 싸우고, 또 돌아와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빌딩 앞으로 가 싸우기를 반복하며 이틀을 보냈다. 결국 도시락 반입은 재개됐다.

건물 안에서 농성 중인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과 전화로 인사를 나누는 유희. 노동자들이 건물 밖의 유희를 향해 ‘하트’를 그려보이고 있다. 2020년. ⓒ유희 페이스북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은 이어졌다. 로비 농성장의 노동자들이 빌딩 밖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 유희는 계속해서 도시락을 만들어 농성장에 전달했다. 136일간의 투쟁이 끝날 때까지. 2021년 4월 30일 노사는 청소노동자 전원의 고용승계에 합의했다.

“바람, 물, 해가 있다면 밥도 그 안에 드는 기본이잖아요. 그 의미를 평상시엔 잘 모르지만 저희처럼 자유롭지 못할 때 주시는 밥이 엄청 감사하고요. 저희도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유희 선생님처럼 그렇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CBS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2021년)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이 유희에게 보낸 감사 편지. 길거리에서 투쟁하던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일상을 회복하는 걸 보는 게 유희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유희 페이스북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10화] 탄핵광장에 K-POP이 있듯 그 시절 ‘유희’가 있었다
[11화] 모두를 먹여살린 ‘욕쟁이언니’… 그녀의 마지막 기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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