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의성은 자신의 SNS를 통해 시민들에게 밥차 모금을 독려해준 데다, 추가로 필요한 돈까지 선뜻 내놨다. 7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뭘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사람들이 (밥묵차를) 많이 아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김의성 발언, 뉴스타파 ‘뉴스포차’ 2017년 3월)

드디어 밥차가 마련됐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자’라는 이름은 ‘밥묵차’로 바뀌었다. 2017년 3월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밥묵차 ‘개솥식’을 열었다.

밥묵차는 못 가는 곳 안 가는 곳 없이 전국을 누볐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해본 사람 치고, 유희 동지의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요?”(김진숙)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민들의 십시일반 정성 덕분에 드디어 밥차를 장만했다. 2017년 ‘밥묵차’ 모습. ⓒ유희 페이스북

유희는 늘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밥 연대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역시 ‘하늘’처럼 대했다. 그가 엄격하게 지킨 원칙은 ‘존중’과 ‘환대’였다.

“(유희) 언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우리가 누구한테 밥을 베풀러 온 게 아니다’라는 거였어요. 배식할 때도 항상 정중하게 대우하고, 밝게 웃으면서 큰소리로 환대하는 걸 되게 강조했어요.

근데 누가 그걸 제대로 안 하잖아요? 그럼 바로 하지 말라고, 그냥 집에 가라고 해버려요. 원칙에서 벗어나면 딱 잘라서 말할 줄 아는 강단 있는 사람이었죠.”(성)

“(배식하는 사람이) 인상 쓰고 그러면, 바로 ‘너, 집에 가!’ 해버리지. (연대 일정) 공지를 할 때도 늘 그래. ‘기분 나쁘면 오지 마시오, 힘들면 억지로 오지 마시오.’ 목욕봉사 할 때도, 인상 쓰고 그래가지고 하면 어르신들 때도 안 밀려.”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병원에서 진통제를 맞을 정도로 아파도 남들한텐 말을 안 했다. 밥 먹는 사람들이 혹시나 그런 얘기를 듣고 ‘아이구 저렇게 아픈데 밥을 해왔구나’ 하고 부담스러워 할까봐.

고기부터 후식 과일까지 정성껏 차린 한 끼. 반찬 세 가지만 준비해야지, 하고 요리를 시작해도, 결국 네 가지, 다섯 가지가 되기 일쑤다. ⓒ유희 페이스북

간혹 밥 연대를 돕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땐 어김없이 유희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밥 연대 현장에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도 유희의 원칙이었다.

“소성리(사드 반대 농성장)에 며칠씩 있으면서 밥 연대를 할 때가 있었어요. 있는 동안 마을회관을 써야 했는데, (유희) 언니는 아침에서 일어나면 막 화장실 청소, 주변 청소부터 하는 거예요.

그리고 집회 끝나면 페트병들이 막 널브러져 있을 때가 있어요. 저희가 돌아다니면서 다 주워서 먹다 남은 물은 허드렛일 할 때 쓰려고 따로 모으고, 페트병은 분리수거하고, 이런 일들을 다 챙겨요. 연대하러 간 현장에 폐 끼치면 절대 안 된다는 거죠.”(성)

사드 반대 투쟁 중인 ‘소성리’는 유희가 특히 사랑했던 현장이다. 며칠씩 머물며 주민들을 엄마, 아버지로 모셨다. 2021년 사진. ⓒ유희 페이스북

때로는 밥 연대 현장에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밥장사 하러 온 거냐는. 유희는 그런 이들에게 ‘연대’의 의미를 분명히 알려준다. 그것 역시 유희의 엄격한 원칙이다.

“농성장에 밥을 가져가면 오히려 투쟁하는 동지들이 ‘아줌마, 사장님, 이모’라 부른다. 다짜고짜 ‘장사하러 왔냐, 밥값은 얼마냐’ 묻는다. (…) 아줌마가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고, 이모도 아니다. 당신들과 같이 싸우는 동지이기에 이렇게 온 거다. (…)

‘아줌마, 사장님, 이모’ 하던 사람들이 오랜 투쟁으로 힘을 잃었을 때 내 밥에 다시 힘을 내 싸운다는 글까지 쓴다. 그 글에 나도 눈물이 나고. 서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이 밥 한 그릇에 그렇게 마음을 열고 힘을 낸다. 그쯤이면 사람들은 나를 밥으로만 보지 않는다. 동지가 된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그렇게 유희가 해준 밥을 먹고, 힘을 내 싸우고, 그렇게 동지가 된 사람들 사이에, 언젠가부터 ‘전설’이 생겨났다. ‘유희의 밥을 먹으면 투쟁에서 이긴다’는 전설. 그 말은 밥을 먹는 사람에겐 희망이 됐고, 밥을 짓는 유희에게도 가장 큰 보람이 됐다.

사실 (밥을 먹어서 이긴 게 아니라) 이길 때까지 밥을 하는 거예요. 당사자들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유희) 언니도 포기하지 않고 가니까, 결국 승리를 함께 만나게 되는 거죠. (그 전설은) 포기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투쟁하라는 메시지를 준 거라고 생각해요.”(성)

유희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가장 사랑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일상을 되찾는 것, 그런 날을 함께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슬픔을 나눠야 하는 날도 많았다. 때로는 승리 없이 긴 투쟁을 접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이기지 못해 죄송하다고. 유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아무도 당신들을 만만히 안 볼 거다. 그게 이긴 거지.”

밥묵차를 타고. 유희(왼쪽)와 성미선. ⓒ유희 페이스북

투쟁하는 사람들과 동지가 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일은 유희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했다. 함께 밥을 짓고 나누는 ‘멤버’들과, 한 푼 두 푼 후원금을 모아준 시민들, 그리고 식재료를 직접 보내주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십시일반’ 정성을 모은 결과다.

나물이면 나물, 과일이면 과일, 철마다 전국 각지에서 보내주세요. 농사짓는 분들이 연락을 주시는 거죠. 고구마 줄거리를 주시면 그거 까서 반찬 하고, 열무를 주시면 또 그걸로 김치 담그고. 쌀이 막 20포대씩 오기도 하고, 그 정도로 식재료가 끊일 날이 없었죠.”(박)

유희가 ‘독고다이’로 나선 일에, 같이 밥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밥은 못 지어도 나눌 때 돕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돈을 보내는 사람도 생겼다. 철마다 식재료를 보내는 사람도 늘어났다. 수직의 조직이 아니라 수평의 연대가 유희와 ‘밥묵차’를 떠받쳤다.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 크든 작든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라도 보태겠다는 마음. 그 선한 마음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일을 유희가 해온 거다.

유희 집 앞에는 늘 전국 각지에서 보내준 식재료 택배가 쌓여 있었다. 그녀 스스로 “우리 집이 물류센터인가?” 할 정도로. ⓒ유희 페이스북
밥 연대를 돕기 위해 시민들이 보내준 애호박, 오이, 감자. 그 선한 마음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일을 유희가 해온 거다. ⓒ유희 페이스북

나 좀 안아주세요. 그대들이 힘 주실 차례입니다. 하하. 동지니까요.”

2022년 11월 유희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늘 씩씩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기억되던 그녀였으니.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몸에 암이 생겼다. 췌장암이었다.

“제가 꽃을 미친듯이 좋아해요. 너 만 원 줄까, 꽃 한 송이 줄까, 하면 꽃 달라고 하지.”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성미선은 투병 중인 유희에게 꽃을 가져갔다. 유희는 특히 꽃집에서 파는 잘 길러진 꽃들보다 자유롭게 핀 들꽃들을 좋아했다. 들과 강에 이웃해 사는 성미선은 철마다 피는 들꽃들을 유희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유희가 특히 좋아했던 ‘그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유희) 언니가 좋아했던 보라색 수레국화. 병원에 들키면 못 갖고 들어가게 하잖아요. 그래서 몇 송이만 조그마하게 해서 가방 안에 숨겨 가지고 들어갔어요. 그래서 언니 손에다 이렇게 쥐여주고, 언니가 좋아하는 꽃 가져왔다고, 한번 보라고….”(성)

유희는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밥 연대를 멈추지 않았다. 혼자 밥을 지을 힘이 없으면 ‘멤버’들에게 의지했다. 그조차도 어려울 때는 조용히 집회에 참석하는 걸로 함께했다.

2023년 겨울 투병 중에도 밥 연대 현장에 함께한 유희(앞줄 가운데)와 박은경(앞줄 오른쪽) ⓒ유희 페이스북

병상에 누워서도 ‘밥’ 걱정을 놓지 못했다. 그녀가 숨을 거두기 한 달쯤 전.

“집으로 (유희) 언니를 보러 갔어요. 근데 언니가 찜기를 사달래요. 찜기를 사면 뭐를 하고, 뭐를 하고, 계속 그래요. 언니 생일이 두어 달 남았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언니 조금만 건강해지면 사자, 생일 선물로 내가 사줄게’ 그랬어요. 그랬더니 끄덕끄덕 하더라고요.”(박)

언니가 늘 내 옷이나 모자 보면, 이거 어디서 샀냐고 눈을 찡긋 할 때, 아, 벗어줄 시간이 되었구나 싶어. (…)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 언니가 준 사랑과 애정은 더 넘쳤거든. (…) “너니까 그러는 거여” 하며 옷장에 있는 거 맘에 드는 거 가져가라 했는데, 언니는 이제 몸이 너무 말라 내게 맞는 게 하나도 없더라…. (박은경 추모글 중)

다음 생일이 돌아오기 전에, 찜기를 선물받기도 전에, 2024년 6월 18일 유희는 눈을 감았다.

돈 줄까 꽃 줄까, 하면 꽃 달라 한다던 유희. 2023년 벚꽃 피던 계절, 꽃신을 신은 유희. ⓒ유희 페이스북

성미선이 10년 세월 동안 유희의 밥 연대를 도우며 내린 결론. “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터에서 내쫓기고 일상을 빼앗겨 춥고 외롭게 투쟁하는 사람들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제대로 먹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진심’이 한 일이다.

박은경에게 ‘유희의 정신’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도 ‘진심’이란 말이 돌아왔다.

억지로 머리 수만 채우는 연대가 아니라, 정말 진심,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의 연대를 하자는 것. 그게 정말 어려운 거죠. 그래도 늘 그렇게 하려고 저도 애를 쓰고 있어요.”(박)

“내가 늘 하고 싶은 건 멕이는 거. (내가 지은 밥이) 입에 들어가는 걸 보고 싶은 거지. (집회 현장에) 그냥 가서 앉아 있으면 미안해요. 뭐라도 가져왔어야 되는데. (…) (밥 먹는 모습이) 너무 이쁘고, 너무 고맙고, 정말 감사하게 먹는 그 마음이 내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유희의 묘소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마련됐다. 지난 추석, 성미선은 차례상을 준비해 유희의 묘소에 다녀왔다. 가을 들꽃도 한 아름 안고서.

지난 추석, 성미선이 유희의 묘소에 차린 차례상 ⓒ성미선 제공

다행히 같은 지역에 살다 보니 때마다 산소를 찾는다. 언니가 좋아했던 앵두나 오디가 열리면 그것들을 따가고, 언니가 좋아했던 오이지를 담근 날에는 역시 그걸 들고 찾아간다. 언니가 좋아했던 ‘믹스커피’를 물을 조금만 넣어서 진하게 한잔 타서 올리고, 어느 날에는 언니가 좋아했던 ‘빨간 뚜껑’ 소주를 한잔 올리고 온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동지들 승리했던 날(2024년 7월 대법원 승소), 다들 법원 앞으로 가서 모였잖아요. 저는 유희 언니 산소에 가서 기다렸거든요. (승소) 소식이 오면 언니한테 제일 먼저 전해주고 싶었어요. 엄청 오랫동안 투쟁했잖아요(약 9년). 그 동지들이 복직해서 현장으로 돌아가는 걸 언니도 정말 기다렸고 보고 싶어 했거든요.”(성)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밥으로 연대한 유희(왼쪽) ⓒ유희 페이스북

유희가 생전에 당부했던 말이 있다. 자기 장례식에서 울지 말라는 것. 웃고 떠들고 ‘밥 먹고’ 가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무덤에 찾아와 우는 걸 상상하는 것도 싫어했다.

“만약 (유희) 언니 산소에 간다면, 유희란 사람을 떠올리면서 즐거웠던 추억들을 돌아보고, 우리가 같이 승리로 만들어냈던 그런 투쟁들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그 투쟁의 주인공들이 지금 일상을 잘 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 마음이에요.”(성)

성미선이 유희를 처음 만난 그 즈음, 더 이상 사회활동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는 어려울 거란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유희와 함께 보낸 10년 동안 생각이 달라졌다. 그 세월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언니가 준 선물이다.

“밥은 하늘이다.” 유희의 묘비명. 성미선은 지금도 하늘처럼 귀한 사람들과 하늘처럼 평등한 밥을 지어 나눈다. 유희가 늘 하고 싶어 했던 ‘먹이는 일’에 그녀의 뜻이 남아 있을 것이다.

“(유희) 언니가 작아서 안 신는 신발이나 옷들을 저한테 준 게 있어요. 지금도 밥 연대를 나갈 때는 그 신발을 챙겨서 신거나 옷을 입거나 해요. 언니하고 같이 가는 마음으로.”(성)

성미선은 밥 연대를 하러 갈 때 유희가 준 옷이나 신발을 챙긴다. 그녀와 같이 간다는 마음으로. ⓒ성미선 제공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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