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햇살이 뜨겁던 날. 땀을 흘리며 산길을 오르는데 구성진 ‘트롯’ 가락이 들려온다. 잠깐 귀를 의심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무덤’뿐이었으니. 여기는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 이름만으로도 경건하고 엄숙한 무게감에 압도되는 곳인데, 어째서.

발걸음을 옮길수록 음악 소리는 더 커진다. 바쁘게 손을 놀리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그리고 트롯 가락이 울려퍼지는 큰 앰프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구나. 유희의 무덤이다.

모란공원묘지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는 유희의 묘소 ⓒ셜록

지난 6월 18일 유희 1주기 추모제. 앰프에서 나오는 노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희다. 공연 때 녹음한 음원을 틀어뒀다. 그녀가 생전에 말했단다. 자기가 죽은 뒤 사람들이 무덤에 와서 우는 게 싫다고. 그녀는 자기 장례식에서도 울지 말고 웃고 떠들다 ‘밥 먹고’ 가라고 했었다. 그 뜻을 아는 누군가가 세심하게 마음을 써서 노래를 틀어둔 모양이다.

하지만 울지 말라고 했다고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 산 아래서부터 걸음마다 눈물 자국을 찍으며 올라온 이도 있고, 추모사를 듣는 동안 터져나오는 그리움을 삼키지 못하고 울컥거리는 이들도 곳곳에 있었다. 노래 공연을 부탁받은 가수도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는다.

추모제 마지막 순서는 ‘유가족 인사’.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그가 추모제 내내 저기 한쪽에서 등을 돌리고 서서, 혼자 하늘을 보며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나는 봤다. 유희의 막내아들이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어머니는 ‘투쟁’이란 말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몰랐지만 그냥 어머니를 따라서 많이 했어요. 오늘 너무 많은 분들이 우셨는데, 어머니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모두 씩씩하게, 저 하늘까지, 어머니 계신 곳까지 들리도록 ‘투쟁’이라고 외쳐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같이 외쳐주세요. ‘투쟁!’

유희 1주기 추모제. “투쟁!”을 외치는 막내아들 김청민. ⓒ셜록

유희의 삼형제 중 막내 김청민. 유희는 1982년 스물세 살 때 갓난아기를 업고 똥집 노점을 시작했다. 그때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아기가 김청민이다.

유희는 이후에 청계천에서 공구 노점을 했다. 주변 노점상들은 쫄래쫄래 엄마를 따라다니는 꼬마 청민을 ‘짱구’라고 불렀다. 유희는 자동적으로(?) ‘짱구 엄마’가 됐다. 어린 시절 노점에서 자라다시피 한 청민을, 주변 노점상들은 참 예뻐했다.

“거기서 큰 거죠 그냥. 공구도 팔고, 그 옆에서 아이스박스에 음료수 넣어서 팔고, 그때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나중에) 제가 고등학생 때인가 청계천 쪽 갈 일 있어서 갔는데, (그분들이) 아직 계시더라고요. ‘저, 짱구예요’ 인사드렸더니 알아봐주시고 그랬어요.”

유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전국노점상연합(전노련)의 일원으로 노점상 운동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전노련 최초의 여성 부의장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는 활동가였다.

중학생 청민은 엄마를 따라 전노련 사무실에 가기도 했다. 당시 청민의 눈에 대학생쯤으로 보이던 ‘누나’들이 특히 예뻐해 줬던 기억. 아저씨들은 가끔 용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트럭 짐칸 위에 올라가서 연설하는 유희. 1990년대 중반 전노련 부의장 시절로 추정. ⓒ유희 페이스북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엄마랑 붙어 있는 게 마냥 좋을 뿐”이었다. 엄마와 함께, “엄마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한 적도 여러 번이다.

“엄마가 단상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어린 제가) 그걸 이해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멋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엄마 멋있다.

1995년은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와 이덕인 열사가 목숨을 잃은 해다. 그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함께 모여 투쟁한 사람들을 위해 유희는 ‘밥’을 지었다. 훗날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로 이어지는 ‘밥 연대’ 활동의 시작이다.

“영안실에 천여 명의 동지들이 모였는데 음식을 대접하려니 돈도 없고. 그냥 직접 해보자, 굶길 수는 없으니. 큰솥에다 국 끓여 밥해서 나눴죠.” (유희 구술, 노들바람 2019년 겨울호, 조재범 기록)

자정이 넘어 집으로 들어오는 유희 모습. 다큐멘터리 ‘접어둔 포장마차 – 우리는 눈을 감는다’ 영상 갈무리. 서울시립대방송국 JBS 1996년 제작. ⓒ서울시립대방송국 JBS

어린 시절 엄마는, 청민이 자고 있을 때 집을 나가서 역시나 잠들었을 때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엄마가 집에 없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유희가 전노련 간부로 활동하다 경찰에 수배를 당했을 때도. 청민은 그때도 엄마가 한동안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일이 학년 때부터 혼자 버스 타고 (엄마가 장사하는) 청계천에 많이 갔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따라다닌 거 아닐까요?

“우리 애들이 정말 잘 컸어요. (…) 참 애들한테 못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아침 딱 차려주고 나오면 되도록이면 일찍 들어오려고 하지만 회의가 밤 12시, 새벽 1시에 끝나니까 터벅터벅 집에 들어오면 애들은 자고 있고. 아침에 또 밥해놓고 나와서 장사를 펴고 데모하러 댕기고.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 한 달 동안 (집에) 못 들어올 때….”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명동성당 앞에서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투쟁하는 노점상들. 자료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제공

청민은 바쁜 엄마를 대신해 장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청민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유희는 흑석동 초등학교 앞에서 ‘한 평짜리’ 작은 떡볶이집을 한 적이 있다. 엄마가 전노련 활동을 하러 가면, 청민이 가게를 지키며 오뎅 꼬치를 꽂고 떡볶이를 해서 팔았다.

왕십리에서 곱창 노점을 할 때도 그랬다. 접이식 ‘편의점 테이블’에 간이의자를 깔고 장사하던 시절. 노점에 나와 엄마를 돕고, 한쪽에서 잠도 자면서 새벽까지 엄마와 함께 있었다.

청민이 고등학생 때, 유희는 종로 서울극장 앞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그때도 포장마차를 ‘펼치고’ 장사 준비를 하는 것은 청민의 몫이 되는 날이 많았다. 장사를 시작하는 시간은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오후 6시. 학교를 마친 청민이 엄마를 대신해 포장마차를 열었다.

“낙원상가 뒤쪽에 포장마차 보관하는 데가 있어요. 거기서 (장사하는 곳까지) 끌고 오죠. 저도 이제 클 만큼 컸으니까. (포장마차) 접고 펼 줄은 다 아니까. (기자 : 요리도 직접 했어요?) 네. 엄마가 없어도 손님은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레시피는 똑같으니까 제가 요리하고.”

종로에는 술집도 많고 나이트클럽도 있어서 새벽까지 손님이 많았다. 꼬박 열두 시간 장사를 하고 다음 날 새벽 대여섯 시에 포장마차를 접는다. 그때까지 청민은 엄마를 도왔다.

‘단속’ 완장을 찬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다. 트럭을 몰고 와서 노점을 실어가던 사람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처절한’ 현장을 본 건 아니다. 단속반이 오면,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지고, 마차를 끌고 가고, 또 며칠 뒤에 벌금을 내고 찾아와서 또 장사를 하고.

“(단속 현장을 보면서)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덤덤했어요. 철이 일찍 들었다거나 의연하게 뭐 그런 거 아니고요, 그냥 ‘그렇구나, 이게 삶이구나’ 받아들인 거.”

김청민은 어린 시절 엄마를 도와 포장마차 장사를 하면서 노점 단속도 직접 겪었다. 자료사진 ⓒ최인기 제공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게’ 산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어릴 때부터 겪어온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으니까. 엄마를 돕는 것도 “이게 우리 집 일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공부를 잘해서 주는’ 장학금이 아니라 ‘공부를 포기하지 말라는’ 장학금. 새벽까지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니, 아침 등교시간에 지각하는 건 다반사였다. 육성회비나 급식비 같은 것도 잘 내지 못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께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때 선생님이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만 오라”고 사정을 봐줬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준 덕분에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단 건 알았죠. 그렇다고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어릴 때 보면 가난한 걸 창피해하는 애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게 왜 창피하지?’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 따라다니면서 노점상 분들, 치열하게 사시는 분들을 많이 보고 어울렸던 거잖아요. ‘이렇게 새벽까지 열심히 사는데 그게 왜 창피한 거야?’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도시락도 직접 싸다녔다. 도시락을 ‘싼다’고 표현하기도 좀 “웃겼다”. 밥통에서 밥을 퍼서 담고, 김 한 봉지를 챙긴다. 그리고 학교 가는 길에 슈퍼에서 참치캔 하나를 산다. 그게 도시락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둘러앉아 서로 반찬을 나눠먹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포장마차 할 때가 더 좋았죠. 팔고 남은 안주들을 갖고 와서 반찬으로 싸갈 수 있으니까. 제일 많이 싸갔던 게 꼼장어예요. 그때 생긴 별명이 ‘꼼장어’라서, 지금도 제 게임 아이디 같은 건 다 ‘꼼장어’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금수저 느낌인가요?(웃음)”

김청민은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고 남은 꼼장어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갔다. 그때 ‘꼼장어’란 별명이 생겼다. 자료사진 ⓒ최인기 제공

투정 부린 적이 왜 없겠나. 엄마는 늘 ‘우리만 잘 살자’고 일하는 게 아니라, ‘남들도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해 일하느라 바빴으니까.

“‘엄마, 떡볶이 장사를 그 초등학교 6학년한테 맡겨놓고 갈 일이야? 포장마차를 그 고등학생한테 맡겨놓고 갈 일이야?’ 나이 먹고 그렇게 물었을 때는, 엄마가 그냥 씁쓸하게 웃으시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엄마가 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엄마가 미운 게 아니라, ‘엄마가 고생하는 게’ 미웠다. 더 정확히는, 엄마가 그렇게 고생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삼형제가 성인이 될 때쯤, 유희는 노점상을 정리했다. 2000년대에 인천에 자리 잡으면서, 카페와 노래방, 주점을 차례로 운영했다. 그리고 ‘밥 연대’ 활동을 시작했다. 노동자, 빈민, 장애인 등 길거리에서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이들 곁으로 밥을 지어 찾아갔다.

유희(오른쪽 첫 번째)는 “춥고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 곁에서 밥을 지어 함께했다. 2018년 한국지엠 비정규직 투쟁 연대. ⓒ유희 페이스북

아들들의 마음속엔 솔직히 ‘엄마부터 챙기지, 우리부터 챙기지, 왜 자꾸 남한테 베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몇 십 명, 몇 백 명 밥을 지어 나누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답답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말려도 봤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꺾을 유희가 아니었다.

어느 날 청민이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운동’을 시작했냐고. 유희의 대답 속에 ‘오월 광주’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청년들과 ‘주먹밥’으로 그들을 먹인 어머니들.

“광주 5·18. 엄마가 그 얘길 해준 게 기억나요. ‘나는 서울에서 아무 일 없이 살았는데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라는 걸 나중에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때 대학생들이면 엄마랑 비슷한 또래잖아요. ‘그때 너무 미안했다.’ 엄마 표현은 ‘미안했다’였어요.”

유희는 길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걱정돼서 밥을 지어 찾아갔고, 청민은 그런 엄마가 걱정돼서 엄마의 ‘출동’에 함께했다. 그 옛날 꼬마 ‘짱구’가 엄마의 노점으로, 전노련 사무실로, 집회 현장으로 따라다녔던 것처럼, 어른이 된 청민은 여전히 엄마와 함께였다.

‘밥묵차’의 떡국 나눔 현장에 함께한 유희의 막내아들 김청민(왼쪽 끝). 2023년. ⓒ유희 페이스북

처음으로 엄마의 ‘밥 연대’에 함께했던 곳은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농성장이었다.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기억에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추운데 천막에서 (엄마가 해드린) 밥을 드시고…. 엄마랑 원래 친분이 있는 분들도 아니신 것 같고,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잖아요. 그 모습을 봤기 때문에 (엄마의 밥 연대를) 말릴 수도 없었던 것 같아요.”

계속 엄마의 밥 연대를 따라다니며 도운 이유는 결국 이거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청민이 밥 연대 현장에 함께 나설 때마다 “엄마의 어깨가 더 펴지는” 걸 봤다.

“자주 간 건 아닌데 엄마가 막 자랑을 하시는 거죠. 365일 중에 하루를 따라가도, 대외적으로는 되게 많이 따라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어요.(웃음)”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3화] 죽음에서 시작된 싸움… 사람들을 살린 그녀의 ‘밥’
[4화] 알몸이 된 노점상들… 통곡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5화] 깡패도 대통령도 맞짱… 그녀의 ‘깡’은 전설이 됐다
[6화] “마이크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평스타’였지”
[7화] 창문 넘어 탈출한 동생… “그 고집을 어떻게 막아”
[8화] 집회장에 나타난 검은 세단… 수상한 차와 고상한 ‘밥’
[9화] “그녀의 밥을 먹으면 이긴다” 전설에 숨은 진짜 의미
[10화] 탄핵광장에 K-POP이 있듯 그 시절 ‘유희’가 있었다
[11화] 모두를 먹여살린 ‘욕쟁이언니’… 그녀의 마지막 기도
[12화] 할매들 손에 꽃이 피었다… 춤추며 싸우는 ‘언니’의 힘
[13화] ‘선한 마음’의 연결…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 한 사람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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