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는 또 농성 현장에 솥을 걸었다. 따뜻한 밥 한 끼에 연대의 마음을 담아 나눴다. 이덕인 열사의 장례가 치러지기까지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밥’으로 현장을 지켰다. 1995년 두 번의 열사 투쟁과 유희의 밥 연대. 아마도 이때를, 이후 30여 년간 이어진 ‘밥 연대’의 역사가 시작된 때로 봐야 할 것이다.
최인기는 이덕인 열사 투쟁 당시 “유희의 진가가 발휘됐다”고 기억했다. 그것은 비단 ‘밥 연대’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유희 부의장이 많이 뛰어다녔죠. 그분이 대부분 영안실을 지키셨어요. 그리고 특히 (이덕인 열사의) 가족들을 잘 돌보셨어요. 항상 어머님 아버님 옆에 붙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용기 북돋아주고, 어머님이 우시면 같이 울고, 같이 영안실에서 밤도 새우고, 이런 일들을 (유희 부의장이) 다 했죠.”(최)
다른 활동가들과는 생각하는 것부터 사뭇 달랐다. 당시 활동가들이 주로 놓치고 있던 것들을 유희는 “섬세하게” 발견해냈다. 열사의 가족들을 챙기고, 연대하러 온 시민들의 식사를 챙기고, 활동가들의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는 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유희가 도맡아 해온 그 모든 일들이, 투쟁의 대의명분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소중하고 중요하단 걸.
“지금 이 땅의 상황이 변하거나 좋아지지 않았는데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덕인 열사의 시신이 탈취되고 갈기갈기 찢겨져 드라이아이스에 뒤집고 엎어져 넣어지는 처절함에 비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죠. (…) 후회할 틈이 없어요. 후회할 기회를 갖기 위해 저는 조금 더 투쟁해야 해요.” (유희 구술, 블로그 ‘성주사드 일기’ 2019년, 은영지 기록)

지금이나 그때나 노점상 단체 간부나 지역 대표들은 남자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여성 부의장을 맡았던 유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투쟁 현장에서 밥을 지어 나누고, 열사의 가족들을 섬세하게 위로하는 모습과는 또 딴판이었다. 그녀의 ‘카리스마’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회의를 하면 아주 격렬했어요. (심할 때는) 재떨이도 집어던지고, 의자도 날아다니고. 그런데 유희 부의장이 ‘야! 너네들 똑바로 해!’ 막 이러면 다들 꼼짝도 못해요. 진짜 요즘 말로 ‘등짝스매싱’도 날리고.(웃음)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니셨거든요. 대단했어요.”(최)
부의장을 맡을 때 유희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원칙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면, 나이 많은 남성 지역 대표들 앞에서도 호통을 쳤다. 정 많고 눈물도 많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서선정이 기억하는 ‘운동가’로서 유희는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열정 빼면 시체”.
“항상 열정으로 치면 언니를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투쟁 준비할 때는 무대 준비부터 회원들 한 명 한 명까지 굉장히 꼼꼼하게 놓치는 거 없이 다 챙겼거든요.”(서)

서선정이 특히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그 시절 큰 도심 집회가 열리면, 무대에서 먼 쪽으로는 어김없이 조촐한 ‘술자리’가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집회 준비와 진행으로 내내 동분서주하던 유희는, 어느 틈엔가 그쪽에도 나타나 있었다. 홍길동처럼.
“부의장! 우리 막걸리 한잔 받아야지!”
“아이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격려하고 아우르는 리더십.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던 서선정은 그런 유희를 본받고 싶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도 몇 십 년 만나온 사람처럼 대하는 친화력까지.
“언니는 관계 형성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능숙했죠. 투쟁기금이 모자라서 모금이 필요할 때, 사람을 설득하고 실제로 그분들이 주머니를 열게 하는 일은 언니가 거의 도맡아서 했어요. 조직이 커질 수 있었던 것도 언니 덕분이었고요.”(서)
최인기는 유희를 ‘독보적인 선동가’로 기억했다. 유희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시작하면, 청중들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울고 웃고 화내고 함께 주먹을 쥐었다. 최인기는 그것이 ‘생각의 깊이’와 ‘감성의 폭’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선동을 정말 잘해요. 기본적으로 감성이 엄청 풍부하죠. 선동할 때 막 드러나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타고난 감성이 없으면 그런 선동은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어떤 활동가들과 토론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사유가 깊어요. 그런 건 책으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최)

서선정은 유희가 좀처럼 내색하지 않았던 ‘어려움’을 몇 번 눈치 챈 적이 있었다. 열정도 해결해주지 못한 것. 가족들의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노점상 벌이로 세 아들을 먹이고 입히는 건 늘 버거웠다. 하지만 그 고단함을 먼저 말한 적은 없었다.
“언니가 그런 건 입이 무거워요. 언니랑 그렇게 붙어 다닐 때도 저는 몰랐어요. 아들 하나가 야구를 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운동을 시키려면 부모가 돈을 대야 하잖아요. 자식 셋을 키우는데 운동하는 자식까지 있으니, 노점으로 가정을 책임진다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때도 빚을 내가며 살았다는데, 저는 그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한마디도 안 해서.”(서)
최인기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유희의 이삿날. 같이 활동하는 동료들이 이사를 거들러 갔다. 하지만 도와줄 게 없었다. 조그마한 집에 든 세간살이가 너무 단출해서.
유희는 자신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더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초창기부터 노점상 운동을 이끌어온 노수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고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이야기다.
노 고문 역시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려가는 노점상. 노 고문이 감옥살이를 하게 됐으니, 이제 장사는 부인 혼자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20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포장마차의 무게가 문제였다. 부인 혼자 무거운 포장마차를 끌고 가고, 펼치고 접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유희 언니가 가서 (노 고문 부인을) 도와주셨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포장마차만 끌어주고 펴준 게 아니라, 언니가 같이 거기서 음식도 만들어주고. 우리 같으면 한두 번 정도야 도와드릴 수는 있겠죠. 그런데 그걸 그렇게 꾸준히 하기는 정말 쉽지 않거든요.”(서)

최인기가 노점상 단체의 선전국장으로 상근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5년. 스물아홉 살 최인기가 받은 활동비는 한 달에 20만 원이었다. 평범한 직장인들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드니까, 대부분 식사는 라면 끓여 먹고 그랬던 시절이죠. 아니면 노점상 회원들 장사하는 데 옆에 껴서 같이 장사를 하거나, 이런 것들을 병행했어요.”(최)
유희는 신입 활동가인 최인기를 각별히 아끼고 챙겼다. 노점상 회원들이 파는 과일이나 채소 같은 것들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그것들을 항상 최인기의 손에 들려 보냈다.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고. 유희의 포장마차에서 우동이며 막걸리를 얻어먹은 적도 여러 날이었다.
“유희 부의장이 저한테 ‘신선초’라 그랬다니까요. ‘이슬 같은 남자’라고. 그만큼 순수하고 착해보였다는 말이에요. 지금은 아무도 기억을 못하고, 제가 지어낸 말이라고 믿지도 않는데, 진짜거든요.(웃음) 그만큼 후배, 동료 활동가들을 많이 챙겨줬어요.”(최)
동료들을 챙기는 데는 유희의 자매들까지 동원(?)됐다. 유희는 네 자매 중 둘째. 유희를 뺀 세 자매가 모두 미용사다. 유희는 노점상 활동가들을 동생의 미용실로 끌고(?) 갔다.
“(노점상 활동가들이) 머리를 깎을 돈도 부담스러운 거예요. 우리 집행부들을 죄다 끌어다가 (동생 미용실에) 앉혀서 머리를 깎이고, 이런 일도 언니가 다 했어요. 언니는 항상 콩 한 쪽도 있으면 나눠 먹고, 그런 게 항상 남다른 분이셨어요.”(서)

“싸움에 이기든 지든 밥은 먹고 살아야 된다. 결론은 밥 때문에 싸우는 거다. 내 30년 운동의 본토가 빈민투쟁이에요. 노점상, 철거민. ‘천 원 줄게 밥 사먹어’, ‘만 원 줄게 밥 사먹어’. 이런 말은 하기 쉽다는 거지. (하지만) 정말 내가 내 자식들한테 해먹이는 밥을 해서 나누는 건 (어려운 거다). (유희 구술, 2016년 작은책 인터뷰 녹음파일)
어렵고 힘든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을 그냥 두지 못하는 사람이 유희였다. 2000년대 이후 유희가 전국의 농성장과 집회 현장을 다니며 ‘십시일반 음식연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서선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당연하게(?) 생각했다.
“언니가 밥 연대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존경스러웠어요. 그 시절 제가 봐온 언니 모습 그대로잖아요. 남 굶는 거 못 보고, 늘 남 배고픈 거 챙기던 모습이 더 구체화된 거라고 생각했죠. 역시 그릇이 달랐던 것 같아요. 밥을 나누는 일에 언니는 정말 진심이었구나.”(서)
최인기는 유희가 ‘십시일반’ 밥 연대를 한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걱정도 됐다.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헌신성’ 하나로 해내야 하는 일인데 ‘어쩌자고 일을 벌리나’.
하지만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1995년부터 이덕인 열사 투쟁을 해나가는 동안 유희가 그 겨울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녀가 ‘십시일반’으로 차려낸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유희 동지처럼) 연대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장기투쟁’이 유지될 수 있거든요. 하나의 버팀목이 되는 거죠. 십시일반. 여기 딱 들어맞는 말이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최)

서선정은 유희와 함께 “찰떡같이” 붙어다니며 1990년대를, 20대 청년 시절을 보냈다.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지역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떨어지게 됐다.
하지만 유희와 ‘동지들’이 열어 보여준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송파주거안심종합센터 센터장으로, 위례시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그때 같이 계셨던 분들이 지금도 저한테 ‘유희 언니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니?’라는 말을 많이 하세요. 옛날엔 정말 어딜 가나 둘이 딱 붙어 다녔어요. 그때는 만나면 웃을 일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상황은 힘들었지만 얼굴을 보면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사이.”(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함께한 유희 언니. “밥은 하늘이다”라고 외치며, 땅에서 디딜 곳 없이 밀려난 사람들에게 평등한 하늘을 나눠준 사람. 하늘의 밥을 나누던 유희는 2024년 6월 하늘로 돌아갔다. 향년 65세.
“밥에는 목적이 없다. 무조건적인 거다.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그저 굶지 말고 건강히 투쟁하라는 거다. 만날 컵라면에 김밥 먹을 때, 그런 때 따끈한 밥을 내놓는 건 구세주다. 밥에 목적이 있으면 안 된다. 밥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유희 구술, 계간 작가들 2023년, 김연식 기록)

서선정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매일같이 밥을 짓는다. 30년 전 유희가 그랬던 것처럼. 밥을 나누고 하늘같은 마음을 나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다 가면서, 그래도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했다, 그래도 이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마음으로 나름 열심히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살아가려 해요. 유희 언니에 비하면 정말 많이 부족할 뿐이지만.”(서)
※ ‘하늘을 짓는 여자’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1화] 프롤로그. 나는 그녀의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2화] 살벌하고 배고팠던 그때… 언니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