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 – 임철우의 <봄날> 서문에서
눈앞에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나타났다. 2000년 3월 7일 새벽, 아버지가 도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이후부터다. 다음날, 언니 김신혜(당시 만 23세)가 범인으로 체포됐다. ‘존속살해가 발생한 가정’이란 낙인이 열여덟 살 김수현(가명)의 몸과 마음에 찍혔다.
자신을 감싸 줄 어른은 없었다. 이혼한 엄마는 예전에 떠났다. 조부모님이 계셨지만, 할머니(당시 81세)는 문맹이었고 할아버지(당시 82세)는 귀가 어두웠다. 같은 미성년자인 오빠 김종현(가명. 당시 19세)과 둘만 세상에 남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낙인, 수현이는 고향 전남 완도와 집을 떠났다.
시간은 강처럼 흘렀다. 벌써 15년이 지났다. 감옥의 언니는 잘 있을까? 언니에게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언제든 갈 수 있어도 쉽게 나설 수 없던 길. 그 길 끝에 언니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그 길에 섰다. 청주여자교도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지난 2015년 2월 2일 오전의 일이다.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속으로 몇 번 다짐했다. 청주여자교도소 민원실에서 언니 김신혜 접견을 신청했다. 신청서에는 ‘수용인 김신혜와의 관계’를 적는 빈칸이 있다. 펜을 잡고 꾹꾹 눌러 적었다.
‘친동생’
접견실 문을 여니, 언니가 먼저 와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창 너머 하늘색 수의를 입은 언니가 보였다. 15년 만이다. 울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너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언니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오른손을 투명 창에 댔다.
“수현아, 울지마.”
언니 김신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수현아, 언니가 나가면 안아줄게. 그때 울어. 언니 없을 땐 절대 울지마.”
“미안해.”
강산도 변한다는 15년 세월 아닌가. 투명 창 너머의 언니는 마흔을 앞둔 여인이 됐고, 창 이쪽의 동생은 서른 중반이 됐다. 자매는 20대 청춘을 공유하지 못했다. 아주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직접 대면은 오랜만이어서 조금은 어색하고 서먹했다.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10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동생 수현 씨는 “꿈에 아버지가 가끔 나온다”고 말했다. 수현 씨는 언니와 약속을 하나 했다. 언니가 석방되면 고향 완도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함께 가기로 말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수현 씨의 한 가지 생각은 변함이 없다.
수현 씨는 중요한 진실의 한 조각을 알고 있다. 언니 김신혜가 체포되기 직전의 어떤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들었다(곧 연재 기사로 소개할 예정이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수현 씨는 언니의 재심을 돕는 박준영 변호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변호사님께 언니가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요. 언니가 친엄마 되시는 분 찾지 마시래요.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완도 엄마(새엄마)’ 한 분이었다고. 그러니 친엄마 찾지 마시래요.’
김신혜와 수현 씨, 아버지는 같지만 엄마는 다르다. 김신혜의 남동생 김종현과 수현 씨는 새엄마에게서 태어났다. 김신혜가 어릴 적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새엄마는 김신혜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헤어졌지만, 이전까지 김신혜를 친딸처럼 대했다. 아버지의 술주정으로 밤새 한 숨도 못자 도시락을 못 싼 채 학교에 보낼 때는, 새엄마는 금방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로 찾아오기도 했다.
김신혜는 얼굴도 모르는 생모보다 새엄마를 더 친근하게 여겼다. 김신혜는 떠난 새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봤고, 성인이 되어서도 두 동생과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등 가장노릇을 했다. 수현 씨는 그런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2000년 3월 7일, 아버지 사망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한 가정이 해체됐다. 언니 김신혜는 무기수로 감옥에 갇혔고, 오빠 김종현은 고향에 남아 은둔자처럼 한 시절을 보냈다. 수현 씨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삼남매는 김신혜 재판 이후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 남매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남매는 모두 아버지 살해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다. 완도경찰의 수사도 받았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수현 씨는 18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1월 19일 오후, 수현 씨를 그녀의 집에서 직접 만났다. 수현 씨는 혹시 그때의 일을 잊을까봐 따로 기록을 해뒀다.
김신혜가 존속살해와 사체유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때는 2000년 3월 8일 자정께. 수현 씨는 오빠 김종현처럼 완도경찰서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3월 9일, 10일 총 두 차례 수현 씨를 불러 참고인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수현 씨는 “3월 9일 첫 진술조서 작성 때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고, 10일에는 경찰이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차는 등 폭력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3월 10일은 경찰이 두 번째 참고인 조사를 위해 수현 씨를 데려가려 할머니집을 찾은 날이다. D경찰이 직접 찾아왔다. 수현 씨의 기록을 보자.
“아빠가 살던 집(할머니집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다) 창고 쪽에서 D경찰이 (손으로) 머리를 구타하려고 했다. 아빠나 어떤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았으니 절대 맞을 수 없다고 했다. D경찰이 구둣발로 차려고 해 피했더니 ‘좋은 말로 할 때 발 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맞았다. 아무리 경찰이어도 이렇게 모욕감을 줘도 되는지..”
구둣발로 맞은 수현 씨 정강이는 깊게 까졌다. 그때의 상처는 흉터로 아직도 남아 있다. 수현 씨는 경찰차에 올랐다. 기록은 이어진다.
“D경찰에게 따졌다. ‘저기요, 아무리 경찰이어도 이렇게 폭력을 써도 되나요?’ 그러자 D경찰이 말했다. ‘야, 그렇게 법을 잘 알면서 아버지를 죽여?’ (중략) 경찰서에서 (참고인 진술을 할 때도 D경찰이) 머리를 때리고 심한 욕설을 했다. 그러더니, 집에 데려다 줄 때는 음료수를 주면서 ‘미안하다, 이해해라’라고 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뭘 이해하라는 건지.”
수현 씨는 종현씨가 겪은 것처럼 참고인 진술을 할 때 “원하는 대답을 안 하면 경찰이 뒤통수를 때렸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경찰이 작성한 두 개의 참고인 진술조서는 수현 씨가 말한대로 작성됐을까?
“진술서에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적히고, 경찰이 마음대로 쓴 것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장 안 찍겠다’고 했었거든요. 그러자 D경찰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찍으라’고 강요해서 서명하고 지장 찍게 됐어요.”
실제로 수현 씨의 참고인 진술조서를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아버지 성추행’부분이 그렇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김신혜가 아버지를 살해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로 아버지의 성추행을 들었다. 그만큼 이 부분은 중요하다. 하지만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수현 씨의 진술조서에서 정작 성추행 관련 진술은 일관성이 없다. 우선, 2000년 3월 9일 작성된 진술조서를 보자.
경찰) 그럼 아빠가 진술인을 성폭행하였다는 말인가요.
김수현) 같이 잠을 자지는 않았는데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98년, 3월 초부터 아버지가 술을 먹을 때마다 저를 집으로 내려 오라고 했고, 저의 몸을 만지면서 옷을 벗기려고 하여 제가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자꾸 언니가 아빠에 대하여 물어보아 제가 하는 수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중략)
아버지 죽음에 대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오빠와 언니 그리고 저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정리하면, 수현 씨가 중학교 3학년인 1998년 3월 초부터 아버지가 술에 취할 때마다 성추행을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바로 다음날인 3월 10일 진술조서에서 확 달라진다.
언제 어디서 성폭행을 당하였는가요?
1999년 2월 초순경 00:30분께 완도군 완도읍 OO리에 있는 집 부엌 식탁입니다.
그 이후에도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중략)
평소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술이 많이 먹어서 그렇지 좋은 분이었습니다. 사실 아빠가 처음부터 그렇게 술을 마신 것은 아닙니다. 엄마랑 이혼하신 후부터 많이 마셨습니다.
그럼 아빠 죽음이 슬프지 않았나요?
사실은 정말 슬프고 아빠가 불쌍합니다.
아버지의 성추행은 1999년 2월 초 단 한 번뿐이었다고 진술이 번복된다. 게다가 전날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았다”고 했다가, 10일에는 “정말 슬프고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나온다. 경찰 진술조서만 보면 도대체 사건의 실체가 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특히 성추행 부분을 제가 저렇게 진술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찰에게 따지기도 했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적이 없어요. 경찰이 마음대로 쓰고, 일부는 조작된 진술이에요.”
수사기관에 따르면 김신혜가 아버지를 살해한 주요 동기 중 하나가 성추행이었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니. 아버지 성추행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부분은 사건의 실체를 다루는 후속 연재기사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수현 씨가 자신을 상대로 강압수사를 하고 진술조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고 지목한 D경찰을 찾아 나섰다.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2015년 2월 6일 늦은 오후, 어렵게 그와 전화통화를 했다.
D경찰은 “당시 아버지를 죽인 공범으로 주로 의심을 받은 인물은 김신혜의 남동생이었다”며 “여동생(김수현)은 무척 어린 십대였고, 우리는 성추행 피해 내용 등을 주로 조사했다”고 말했다. D경찰은 “그런 애를 내가 설마 때렸겠느냐, 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신혜 씨는 (사건과 관련 없는) 자신의 누드사진을 경찰들이 돌려봤다고 하는데,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뭔 사진을 보긴 한 것 같다”고 다소 모호하게 말했다.
김신혜·김종현·김수현. 이들 삼남매는 아버지를 살해한 용의자로 한동안 의심을 받았다. 이들은 보호자나 변호사의 조력 없이 경찰 수사를 받았다. 모두 경찰의 가혹행위를 겪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들을 때렸다고 지목한 경찰은 모두 네 명이다.
우선 A경찰. 그는 압수수색 영장 없이, 그것도 자기 군대 동기랑 김신혜의 집을 수색했다. 그는 불법으로 김신혜의 누드사진을 가져갔다. 김신혜와 그녀의 남동생 김종현은 A경찰에게 구타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A경찰은 현재 전남의 한 파출소에서 근무 중이다.
김신혜가 “가장 악랄한 경찰”이라고 지목한 B경찰. 김신혜는 B경찰이 누드사진으로 자신을 협박했고, 입에 수건을 물린 채 구타했다고 주장한다. 종현씨도 “B경찰이 날아 차기로 날 때렸다”고 밝혔다. B경찰은 전남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수현 씨는 위에서 쓴대로 D경찰에게 정강이를 차이고 머리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D경찰 역시 전남의 한 경찰서에서 일한다.
또 다른 한 명인 당시 완도경찰서 수사과장. 종현씨는 “두꺼운 책 모서리로 내 머리를 때렸다”고 그를 기억한다. 그는 경찰에서 퇴직했다. 현직에 있는 이들은 모두 삼남매의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 “기억 안 난다” “내가 수사 안 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은퇴한 한 명을 제외하고 ‘그때 그 경찰’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15년을 살았다. 한 가정은 완전히 무너졌다.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