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침대에 누워.”

이별은 이번에도 실패다.

‘오늘은 기필코 헤어지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이별 얘기가 나오자마자 남자친구의 눈빛이 돌변했다. 욕을 쏟아붓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불을 난도질하기도 했다. 손으로 이불보를 찢어 솜을 한 움큼 꺼내더니 거실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여자친구인 김보라(27살) 씨는 겁에 질려 몸이 움츠러들었다.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싫어. 그만해. 우리 그만 만나자.”

김 씨는 침대에 눕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무엇보다 더 이상 원치 않은 관계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 반의 짧은 연애 동안 남자친구는 자신을 욕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듯했다. 그는 매번 불쾌한 요구와 함께 성관계를 원했다.

불과 2주 전에는 주먹까지 휘둘렀다. 성관계 도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며 김 씨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 턱에 멍이 들었다.

남자친구는 연예인이었다

남자친구 A 씨는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명세를 탄 가수였다.

김 씨는 앨범 사진 작업을 계기로 A 씨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앨범 사진 모델로 김 씨가 발탁되면서 일을 함께했다. 작업은 즐거웠고,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호감은 자연스레 연정으로 이어져 2016년 8월 말 둘은 연인이 됐다.

첫 설렘과 달리 남자친구는 점차 폭군의 면모를 보였다. ‘언젠가 바뀌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리기도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김 씨가 이별을 통보한 2016년 10월 5일, A 씨는 여자친구인 김 씨의 목을 졸랐다. 그는 김 씨를 침대에 강제로 눕히고 목을 강하게 움켜쥐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했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가만히 안 둘 거니까.’

김 씨의 목표는 이때부터 이별에서 생존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목을 움켜쥔 A 씨의 손에 힘이 풀리는 순간, 그의 옥탑방에서 도망가기로 다짐했다. 다행히 틈이 생겼다. 김 씨는 재빨리 소지품을 챙겨 달아났다.

인기척을 들은 남자친구가 팬티 차림으로 김 씨를 쫓아왔다. “머리채 잡기 전에 따라오라”고 협박했다. 결국 김 씨는 다시 지옥 굴로 걸어 들어갔다.

“편의점 가서, 소주 있는 대로 사와.”

김 씨는 A 씨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A 씨의 명령대로 술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김 씨의 불안함은 편의점 직원에게 포착됐다. 떨리는 손으로 소주병을 집어 든 그녀를 보고 편의점 직원이 “누가 때렸느냐”고 물었다. 김 씨는 “신고하라”는 편의점 직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 “때린 사람이 유명인이라 신고가 힘들다”면서 편의점을 나왔다.

그게 큰 실수였다.

일을 크게 만들기 싫고,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남자친구 집에 들어갔는데 상황은 더 꼬여갔다. A 씨는 갑자기 소주 한 병을 들이키더니, 김 씨에게도 술을 마시라고 소리쳤다.

자리를 비운 사이 김 씨의 휴대전화에서 무언가를 보고 화가 난 듯했다. A 씨는 다시 김 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김 씨는 살고 싶었다.

“살려주세요! 여기 누가 좀 살려주세요!”

비명을 지르자 A 씨는 본격적으로 김 씨를 때렸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창문을 닫았다.

이상한 점은 A 씨가 자신의 얼굴을 같이 친다는 점이었다. 그는 “나도 다치면 쌍방폭행이 된다”면서 “신고하면 나도 맞았다고 진술할 것”이라고 김 씨를 협박했다. 이때 이미 김 씨의 왼쪽 손가락은 부러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A 씨는 김 씨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을 억지로 쳤다.

“빨리 칼 잡아. 이 상처도 네가 칼로 찔러서 생겼다고 할 거야.”

주방에 있던 식칼은 협박 도구로 동원됐다

A 씨는 칼로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한 뼘 정도 그어 자해한 뒤, 그 칼을 김 씨가 움켜쥐도록 시켰다. 김 씨의 지문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김 씨는 처음에는 칼을 잡지 않았지만, 계속 거부하면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 A 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해가 뜨고 얼마 뒤, 김 씨는 그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죽다 살아나온 느낌이었다.

보복이 두려웠지만 김 씨는 고심 끝에 신고를 결심했다.

신고하지 않으면 A 씨의 폭력은 계속될 듯했다. 먼저 병원으로 향했다. 간단한 치료만 받고, 진단서를 끊어 경찰서에 제출했다. 며칠간 이어진 경찰 조사를 꿋꿋이 마치려고 애썼다. 가해자 신분 확인 과정에서 A 씨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합당한 심판이 내려지리라 믿고 견뎠다.

ⓒ 주용성

“마조히스트 여자친구 때문입니다”

악몽은 그 후 벌어졌다. A 씨는 사건 당일부터 김 씨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상해와 협박이 있었던 그날 밤, A 씨가 김 씨의 전 남자친구를 찾아가 김 씨를 음해했다. 말은 장황했지만, A 씨의 용건은 간단했다.

그는 “김보라가 뒤통수를 치면 어떤 식이든 서로 돕자”고 김 씨의 전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자기가 아주 영화 속 주인공인 줄 알아. 걔가 우리 둘을 이간질 시킨 것이고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요.” –  당시 A씨의 발언, 김보라 씨 전 남자친구에 대한 검사 측 증인신문에서 발췌”

사실 A 씨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김 씨는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계약하기로 한 에이전시와 틀어졌고, 오랜 기간 고대했던 뮤직비디오 모델 출연 일도 못 하게 됐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가 됐고, 심리적으로 불안해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뮤직비디오를 위해 맞춘 의상비는 고스란히 김 씨의 몫이 됐다.

병원비에 의상비까지, 경제적 손실은 컸다

김 씨의 바람대로 사건은 재판에 넘겨졌다. 2017년 3월 14일 서울중앙지검은 A 씨를 상해와 협박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여러 언론은 A 씨의 소식을 보도했다. 사실이 그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듯해 김 씨는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같은 날, 한 스포츠 신문은 A 씨와 ‘단독 인터뷰’를 했다며 A 씨를 두둔하는 듯한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의 요지는 이랬다.

‘여자친구가 먼저 때려 달라고 요구해서 때렸을 뿐이다’

“그 친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학적인 성적 관념을 가진 마조히스트라는 점이에요. 처음엔 너무나 놀랐어요. 늘 저한테 폭력을 요구했어요. 본인은 그래야만 만족을 한다고 했어요. 상해에 대한 것은 결코 폭행이 아니었어요. 그 친구의 무자비한 폭력 과정 속에 정당방위였어요 – 2017년 3월 17일 <스포츠조선>가 보도한 A 씨의 발언 발췌”

‘피해자는 김 씨’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기사에 담긴 게 무엇보다 문제였다. “처음 만난 것은 앨범 자켓 촬영 현장이었다”는 말에서 김 씨의 신상이 노출된 것이다. 본인이 원치 않았음에도 김 씨가 피해자란 사실이 폭로되자, 김 씨의 SNS 계정에는 악성 댓글이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너 마조히스트라면서, 나랑도 자자” 등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 주용성

‘피해자다운’ 모습을 요구받다

재판 과정도 김 씨에겐 고통이었다. A 씨의 변호인과 김 씨의 주변인 가릴 것 없이, 사건의 본질보다 김 씨의 평소 행실을 더 문제 삼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김 씨의 스타일이 “피해자답지 않게 너무 자유분방해 보인다”며 김 씨의 일부 주변인들은 “탈색 머리보다는 검은색 머리가 더 낫지 않겠느냐”고 염색을 권유했다.

얌전하고 위축된 모습이 ‘피해자답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법조인은 “개명을 하는 것은 어떠냐”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김 씨는 황당했다. “개명과 이 사건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고 답변했지만 불편한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것이 김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피해자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피해자는 왜 수치심을 강요받는가’ 등이 궁금했다.

진짜 문제는 A 씨의 변호인이 이러한 ‘성폭력 피해자다움’ 편견을 변호에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A 씨의 변호인은 김 씨의 SNS에 올라온 모델 활동 사진들을 근거로 ‘김 씨가 정상인과 다른 성 관점을 가졌다’는 식의 질문으로 쏟아냈다. 모델 활동 중 촬영한 컨셉 사진이 “가학적인 성관계를 연상시킨다”고 하고, 같은 맥락에서 “클럽을 자주 가는지”도 물었다.

“증인은 클럽 등을 자주 다니나요?”

(사건 발생 후 한 달 뒤쯤) 클럽 등에서 파티를 즐긴 사진을 게재한 사실이 있나요?”

 “증인은 여성의 몸을 줄로 묶은 만화를 게재하거나 증인의 몸을 줄 등으로 묶어 놓은 사진을 게재한 바 있지요?”

이와 같은 사진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정상적이지 않고, 가학적인 성관계 등을 연상할 수 있는 사진이지요?

– 김보라 씨에 대한 피고인 측 변호인의 증인신문 중 일부”

사실 이런 방식의 신문은 우리나라에서 흔하다.

특히 성폭력 피해 사건에서 그렇다. 피해자가 과거 성관계 경험이 있는지, 성매매한 이력이 있는지 등으로 피해자를 재단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보호 장치가 탄탄한 편이다. 미국에서는 〈강간피해자보호법(Rape Shield Law)〉를 제정해 1974년부터 피해자의 성 이력에 대한 신문을 금지하고 있다.

다행히 법원은 김 씨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해 7월 20일 A 씨에게 징역 8개월의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재판문을 통해 선고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성관계 도중 피고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고인이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 때린 사실이 인정되고,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요구하였다고 인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A 씨는 끝내 김 씨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SNS 계정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지만, 피해자 김 씨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 없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김 씨는 항소했다

1심의 선고가 가볍다고 생각해서다. 1심 선고 후 9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항소심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늘 A 씨의 집 문이 닫혀 있어 항소장이 지금까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 씨와 A 씨의 변호인에게는 기자가 여러 번 통화와 만남을 요청했지만, 현재까지 묵묵부답이다.

ⓒ 주용성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

성추행 피해자였다가 수사과정에서 무고죄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된 차진영(가명) 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2년 8개월의 시간을 허비했다. 최 씨는 수사 초기부터 무고 피의자로 의심받았다.

수사관은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며 최 씨를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이유는 바로 ‘피해자답지 않다’는 점이었다. 최 씨의 당당한 태도가 의심의 이유가 됐다.

‘진짜’ 피해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어야 피해자로 인정해주는가?

차진영 씨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때의 억울함을 밝혔다.

“수사관이 하는 말이 ‘난 수사관 경력이 많다’, ‘경력이 많고 많은 성추행 피해자를 만났다’, ‘그런데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 였죠. (중략)

나의 수사받는 태도가, 일반 피해자 같은 태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물어보는 질문에 또박또박 똑똑하게 (대답)했을 뿐이에요.

– 허민숙(2017)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 – 성폭력 피해자 무고죄 기소를 통해 본 수사과정의 비합리성과 피해자다움의 신화, 한국여성학회, 한국여성학, 제33권 3호, 피해자 인터뷰 인용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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