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법원장 35명이재판 거래의혹 후속 조치 논의하러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 모였을 , 오재선(77) 지팡이 짚고 제주지방법원으로 향했다.

젊은 판사 양승태가 전두환 정권의 원활한 국정 운영에 판결로 협조한 (?) 간첩 누명을 오재선은 몸과 마음과 인생이 망가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은 오재선은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 못한다. ©셜록

그는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고, 지팡이가 없이면 이제 걸을 수도 없다. 4.3사건 트라우마가 깊은 제주에서 빨갱이로 몰렸으니 그의 가족은 애초에 해체됐다. 그는 제주양로원에 몸을 의탁해 가족 없이 13년째 살고 있다.

청력을 거의 잃은 오재선은 판사의 말을 들을 없다. 그래도 법원에 간다. 양승태 판사가 자신에게 선고한 간첩 누명을 벗는 , “존경하는 판사님에게당신은 간첩이 아닙니다“라는 선고를 받는 , 77 오재선의 마지막 꿈이다.

귀가 안 들려도, 지팡이 짚고 방청객 없는 법정에 기어코 나가는 이유다. 꿈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간첩 누명을 벗는 게 77세 오재선의 마지막 꿈이다. 귀가 안 들려도, 걷기 힘들어도 그가 법정을 찾는 이유다. ©셜록

7 오후 4 30, 제주지방법원 201 법정에서는간첩 오재선 재심 공판이 열렸다. 양승태 재판장이 오재선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해 징역 7년을 선고한 1986 12 4 판결을 다시 심판하는 것이다.

서울에선 법원장들이 재판 거래 의혹으로 모였고, 제주에선 양승태가 내린 판결을 다시 심판하고. 이날 대한민국의 남북 양쪽 끝은 ‘양승태 문제’로 통합됐다

서울 대법원엔 세상의 눈과 귀가 쏠렸지만, 오재선 사건 재심이 열린 제주지법 201 법정에 관심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날 법정에 외부인은 딱 한 명이었다.  걸을 없고, 듣지 못하는 오재선을 제주양로원에서 법정까지 데려온 사람은 이영일(85).

그가 오재선의 보호자이자 유일한 방청객이었다. 사람은 제주양로원에서 10년째 함께 지내고 있다.

재판이 열리기 , 오재선은 제주지법 2 복도 의자에 앉아 대기했다. 창문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왔으나, 의자에 앉은 남자는 냉랭했다. 왼쪽은 오재선, 오른쪽의 안창보는 널찍이 떨어져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창보는 증인으로 이날 재판에 나왔다.

7일 재심 공판 때 증인으로 출석한 안창보(오른쪽)와 오재선. ©셜록

사람은 제주도 애월 고내리에서 자랐다. 1980년대 중반 고내리 포구 바닷가에서 함께 술을 마신  있다. 제주경찰서는 술자리에서 오재선이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경찰이 안창보의 참고인 진술조서를 그렇게 만들었다. 동네 후배 안창보의 꾸며진 진술이 오재선 간첩 조작에 이용된 셈이다.

오재선 사건 재심은 7일 오후 4시 30분 제주지법에서 열렸다. 재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오재선은 긴장했다. ©셜록

손목시계의 바늘이 오후 4시 30분으로 향해 갈수록 오재선은 떨기 시작했다. 그는법원만 오면 긴장된다 찬물을 들이켰다. 그에게 소리로 물었다.

작은 어선 타고 일본으로 밀항까지 하셨던 분이 재판이 무서워요? 파도가 무섭지 않아요?”

오재선의 눈이 커졌다.

믿었던 법원에 제가 당했잖아요. 판사가 법봉이 경찰 주먹만큼 무서운 겁니다.”

오재선은 밀항으로 일본에 세 차례 다녀온 적 있다. 제주경찰서 형사들은 그를 45일간 고문해 간첩으로 조작했다. 그래도 오재선은존경하는 판사님 법봉의 힘을 믿었다. 경찰의 주먹질에 항복해 허위자백을 했지만, 법정에선 양승태 재판장에게 모든 진실을 말했다. 양승태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할 거라 생각했다. 

1986 그때, 오재선만 제주경찰서에서 고문당한 아니다. 그의 남동생과 삼촌도 고문 강압수사를 받으며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사람은 당시 오재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둘은 경찰서에서 겪은 고문을 말하며오재선은 간첩이 아니다”라고 양승태 재판장에게 읍소했다. 오재선의 남동생 OO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는 탄원서를 양승태 재판장에게 보냈다. 간첩 혐의를 입증하는 명백한 물증도 없으니 오재선은 무죄를 확신했다.

양승태 판사는 일가족이 겪은 고문과 읍소를 외면했다. 그는 경찰이 주먹으로 만든 가짜 간첩 오재선을 법봉으로 때려 잡았다. 양승태 재판장은 오재선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법원의 외면은 경찰의 주먹질보다 아픈 상처를 남겼다. 외면 받은 진실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어졌다. 오재선의 동생은 지금도 고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탓에 형의 재심에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오재선은 불안한 모습으로 7 오후 제주지법 법정에 들어섰다.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안창보는 명이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제가 조사 받으러 1986년 5월 경찰서에 갔더니, 오재선이 술자리에서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서류가 꾸며져 있었습니다. 오재선과 저는 나이 차이가 나고 고향에서 함께 산 기간이 짧아 거의 모르는 관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화 나눈 적도 없습니다.”

재판장, 검사, 오재선을 변론하는 이명춘 변호사는 안창보 증인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청력을 잃은 오재선은 모든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쌍꺼플 눈을 껌뻑이며 피고인석에 불안하게 앉아 있었다.

공판은 오후 6시께에 끝났다.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오재선이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오재선 사건 재심이 6월 7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렸다. 공판이 끝난 뒤 오재선은 “증인이 무슨 말을 했느냐”며 많이 궁금해 했다.

“(증인이) 뭐라고 하던가요? 저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않던가요?”

판사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명춘 변호사가 목소리로 직접 설명했다. 불리한 진술은 나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7일 재심 공판이 끝난 뒤 이명춘(왼쪽) 변호사가 큰 목소리로 재판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영일옹(85세. 가운데)과 오재선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셜록

오재선은 왼쪽 귀에 손을 오므려 대고 어떻게든, 무슨 소리든 들으려고 애썼다. 그의 왼쪽 귀는 조금이나마 소리를 들을 있다. 번을 설명해도 오재선의 불안한 눈빛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법원을 빠져 나오면서도 다시 번을 물었다.

법정에서 무슨 나왔습니까? 이야기 해주세요.”

기능을 잃어 들리지 않는 귀는 이럴 더욱 서럽다.

무릎이 아픈 오재선은 계단 이용을 무척 힘들어 한다. ©셜록

재판을 마치고 법원을 빠져나오는 . 이번엔 무릎이 아파 서러웠다. 오재선은 계단, 언덕은 물론이고 평지 걷는 것도 힘들어 한다. 지팡이 손에 아무리 힘을 주고 걸어도 뒤에 처져 걸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등산 마니아로서 배낭 메고 네팔 히말라야, 미국 요세미티 트레킹을 다녔지만, 오재선은 평지에서 자기 건사하기도 힘들어 한다

무릎이 아픈 오재선은 걸음이 느리다. 그는 일행과 함께 걸으면 늘 뒤처진다. ©셜록

힘겹게 법원을 빠져나가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재선은멀리 서울에서 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라 했다. 이영일옹과 오재선은 식당에서 자리회무침을 시켰다. 요즘 자리회가 제철이라며 보라고 했다.

야채와 함께 새콤달콤하게 무친 자리회무침이 상에 올랐지만 정작 오재선은 자리회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먹어온 제주도 음식이지만 오재선은 더는 그걸 맛볼 없다.

제가 틀니여서 딱딱한 자리회뼈를 씹을 수가 없어요.”

이영일옹(왼쪽)과 오재선은 7일 재심 공판을 마치고 늦은 자리회무침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오재선은 이가 좋지 않아 야채만 먹었다. ©셜록

이영일옹과 오재선은 붉은 자리회무침을 가운데 두고 야채만 골라 입에 넣었다. 공판을 무사히 마친 안도하며, 재심에서 무죄가 나오면 조촐하게 파티 하자는 담소를 나누며, 85-77 노인은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제주양로원으로 향하는 택시 . 오재선은 32 자신을 고문했던 경찰 이야기를 했다.

날 주로 고문했던 김OO 경찰은 제 중학교 2년 후배예요. 제가 수감생활을 마치고 화가 나서 제주경찰서로 찾아갔어요. 그때는 저도 젊었으니까, 힘이 있었죠. ‘날 간첩으로 만들고 넌 출세해서 행복하느냐’고 막 따졌죠. 그랬더니 뭐라는지 아십니까?”

재심 공판을 마치고 제주양로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 오재선은 32년 전 자신을 고문한 경찰 이야기를 했다. ©셜록

오재선은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고문 당한 경험을 떠올리면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 올라오는지 눈이 붉어졌다.

“45일 동안 날 고문했던 그 사람 한다는 소리가.. ‘그땐 시절이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 너무 원한을 품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30만 원을 봉투에 담아서 제게 주더군요.”

그땐 시절이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 그동안 많은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특히 시절에 출세한 사람들이 훗날 시대를 탓한다. 

오갈 없는 오재선이 13 살고 있는 제주양로원에 도착할 무렵.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봤다.

전국 법원장들은합리적인 근거 없는 이른바재판 거래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개혁방안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강조했다는 소식이 포털사이트 메인을 채웠다.

판사 양승태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한 인생을 무너뜨렸다. 그는 고문당하는 자의 비명도 듣지 않았다. 오재선과 그의 동생, 삼촌이 법정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말하며 읍소해도 양승태 판사는바짓가랑이 걷어보라 말을 하지 않았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지 않고, 정권의 뜻에 따라 판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오재선의 몸과 삶이 보여준다.

판사 양승태가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시절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누명 사람은 그걸 벗기까지 평생이 걸린다.

7일 재심 공판을 마친 오후 8시께에 제주양로원에 도착했다. 그의 방은 207호다. ©셜록

제주도의 서쪽 하늘이 검붉게 변할 무렵 오재선은 양로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로원 입구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힘겹게 자신의 207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놓인 붉은 방울토마토 개가 법정에서 돌아온 오재선을 맞았다.

전국 법원장들이 7시간 격론 끝에재판 거래 의혹에는 합리적 근거가 없다 결론 내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시각, 오재선은 아픈 몸에 약을 털어넣고 침대에 누웠다.

오재선은 제주양로원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7일 재판을 마치고 돌아온 오재선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셜록

오재선 재심 공판 다음 기일은 6 21일에 열린다. 그는 합리적 근거도 없이 유죄를 선고한존경하는 양승태 재판장님판결 때문에 32년간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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