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양승태 대법관은 미국 캘리포니아 뮤어 트레일을 걷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산(4418m) 요세미티 계곡을 있는 아름다운 . 대법관은 어느 지점에서 청와대 쪽의 연락을 받았다.

며칠 뒤인 2011 8 18 오후, 이명박 대통령은 차기 대법원장으로 양승태 대법관을 내정했다고 밝혔다. 김두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양승태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6년간 법관 생활 동안 판결의 일관성을 유지해온 데다 우리 사회의 중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갈 안정성과 시대 변화에 맞춰 사법부를 발전적으로 바꿔나갈 개혁성을 보유했다.”

2011 이명박 대통령 측은 양승태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해 “36년간 법관 생활 판결의 일관성을 유지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그날 오재선은 제주양로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6년째 사는 양로원 가까운 곳에 아름다운 제주올레가 있지만 오재선은 길을 걷지 않는다. 한라산과 여러 오름도 오르지 않는다. 오재선은 무릎이 아파 오래 걷지 못한다.

2011 9 6 오후, 오재선은 제주양로원에서 TV 보다 낯익을 얼굴을 발견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다.

양승태.. 양반 많이 출세했네.”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윤남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너무 완벽한 흠이면 흠이다라고 양승태를 평가했다. 오재선은 말을 들었다. 그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얼마 , 양승태는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부가박근혜 정권에 최대한 협조 혐의가 드러난 지금. 좋은 말만 모아 놓은 김두우 홍보수석의 발표에서 법관 양승태에게 맞는 말이 하나 있다.

판결의 일관성

법관 양승태의 삶을 살펴보면 말은 틀리지 않다. 그가 판결로정권에 최대한 협조 사례는 한두 개가 아니다. 신임 법관 시절부터 그랬다. 양승태의 일관성에 희생된 사람 명이 바로 제주도 오재선이다.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은 중요한 국면에서 만난다.

1948 부산에서 태어난 양승태는 경남고와 서울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1975 11 1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오재선은 오래전 제주도 고내리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탔다. ©박유빈

오재선은 제주도 애월 출신 부모 사이에서 1941 일본에서 태어났다. 1945 부모와 함께 애월로 돌아왔다. 그의 부친은 애월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했다. 1948제주 4.3’ 터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살기 위해 홀로 일본으로 도피했다.

오재선은 애월중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오재선은 일본에서 가방공장, 식당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일본에서 쫓겨나고 다시 밀항하기를 반복했다.

양승태의 경남고서울법대 선배 김기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은 1975 11 22 재일교포 유학생이 주축이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사건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6 서울형사지방법원 소속 양승태 판사는선배 김기춘 수사한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에 배석으로 참여한다. 재판부는 재일교포 유학생 김동휘, 최연숙, 이원이, 장영식 등이 간첩행위를 했다며 무기징역, 징역 10 중형을 선고했다.

징역 10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받은 조득훈의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국내 경제 문제에 대한 대학 교수들의 분석 비판 논문 등이 게재된 <동아일보>사 발행 월간지 <신동아> 1권을 500원에 구입하는 등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

훗날 피고인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선배 김기춘이 조작한 사건을, 후배 양승태가 도장을 찍어준 셈이다. 이렇게 20 후반의 젊은 판사 양승태는 간첩조작에 발을 담그고, 재일교포와 악연을 맺었다.

즈음 30 중반의 오재선은 일본 어느 도시 골목에서 빈대떡 장사를 했다. 불고기 파는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다.1983 3 12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 오재선은 제주에 정착했다. 1.5톤급 우정호 선원으로 일하고, 애월 평화목장에서 잡부로 종사했다.

양승태는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86 제주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부임했다. 한길을 걸은 양승태와 떠돌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오재선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1986 4 25, 오재선은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서울 육지에서는 군사정권 유지와 강화를 위해 재일교포 유학생이 간첩으로 조작됐다면, 제주도에선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을 밀항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좋은 먹잇감이었다. 오재선은 45일간 경찰에게 두들겨 맞으며 간첩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때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오른쪽 귀를 다쳤어요. 구속이 안 됐으면 치료 받았을 텐데.. 누명을 썼으니까 귀까지 먹은 거죠.”

오재선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그는 왼쪽 귀로만 소리를 듣는다. 왼쪽도 조금씩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박유빈

간첩이 오재선 사건을 양승태 판사가 맡았다. 피고인 오재선은 법정에서 낮은 자리에 앉았다. 많이 배우고똑똑하게 생긴양승태 재판장은 높은 법대에 앉았다. 오재선은 양승태 재판장을 구세주로 여겼다. 자신과 달리 귀도 멀쩡해 보였다. 오재선은 읍소하며 진실을 말했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기합을 받고 무서워서 그런 것(허위자백)입니다. (중략) 머리를 바닥에 박으라 하고 엎드려 뻗치라고 하였습니다. 경찰 9명에게 한 달간 고문을 받았습니다.

양승태 재판장은어떻게 맞았냐등등 고문 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재선의 말을 들었는지, 들었는지 길이 없었다. 눈으로 보라고 양승태 재판장에게 직접 편지도 썼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은 제주경찰서에서 장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경찰관이 묻는 대로 대답만 하였습니다. 검사님의 조사 때도 항시 경찰관이 따라 다녀 공포심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오늘 탄원하게 됨을 용서해 주시 옵소서.”

오재선의 동생, 삼촌도 법정에서 경찰의 고문에 대해서 진술했다. 귀가 어떻게 됐는지이번에도 양승태 재판장은 일관되게 경찰 가혹행위 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에 발을 담갔던 양승태 판사는 제주도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오재선이 과거 제주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고문당한 사실을 말하며 자신이 겪은 일명 ‘원산폭격’을 재연하고 있다. ©박유빈

1986 12 4, 양승태 재판장은 오재선에게 간첩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같은 , 양승태 재판장은 역시 일본을 밀항한 있는 강희철(당시 27)에게도 간첩 혐의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같은 , 연속 오판으로 가짜 간첩 제작에 관여한 법관 양승태.

재일교포 유학생 사건과 똑같이 제주도의 오재선, 강희철 역시 간첩 혐의를 입증할 명백한 물증이 없었다. 그럼에도 양승태 재판장은 일관되게 유죄, 그것도 중형을 선고했다. 강희철은 1998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2008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재선의 재심은 아직 진행중이다.

양승태 판사는 단순한 오판을 걸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 기록만 봐도 그들이 간첩이 아닌 걸 쉽게 알 수 있거든요. 판사가 기록도 제대로 안 살피고 오판을 했다면 직무유기고, 간첩이 아닌 걸 알면서도 유죄를 선고했다면 간첩조작 공범인 겁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곳곳에서 간첩을 조작한 박정희전두환 시절. 양승태는 판결로 정권에 부역한 셈이다.

양승태 판사는 제주지법 생활을 마치고 1989년부터 사법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1993년엔법관의 이라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 됐다.

시절, 오재선은 광주교도소 등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고문으로 다친 오른쪽 귀는 점점 기능을 잃어갔다. 1991 오재선은 세상으로 나왔다. 자기를 고문한 경찰을 찾아가 따졌다. 진실을 말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양승태 판사를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없었다.

양승태 판사는 높은 자리로 자꾸자꾸 올라갔다. 2001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2002 부산지법원장, 2003 법원행정처 차장이 됐다. 등산 마니아인 양승태는 높은 산에도 자주 올랐다. 법원 생활을 마치면 자유롭게 살고자 오토바이 면허증도 땄다.

오재선은 제주도에서 야채장사 등을 하며 살았다. 오른쪽 귀는 완전히 기능을 잃어갔다. 간첩 딱지가 붙은 그는 자유롭게 없었다. 술을 마시면 종종 고문 경찰을 찾아가 따지곤 했다. 아무리 따져도 망가진 몸과 인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5 양승태는 대법관이 됐다. 보수성향인 그는 일관되게 거의 다수의견 쪽에 섰다. 그는 주심으로 용산 참사 사건을 맡았다. 그가 속한 대법원 2부는경찰이 진행한 진압작전을 위법한 직무집행이라고 없다라고 판결했다.

양승태 대법관이 국가가 제공하는 관용차를 타고 서초동 대법원으로 출근하던 2005 그때, 오재선은 가방 하나 들고 제주양로원에 입소했다. 청력을 잃고, 건강이 나빠지고, 가족이 없는 오재선이 남은 생을 의지할 곳이다. 가방에 벌이 오재선 전 재산이었다. 오재선은 기초생활수급권자다.

작년 9월 퇴임식을 마치고 대법원을 떠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오마이뉴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양승태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일했다. 선관위는 2010 6.2지방선거에서 ‘4대강 사업 반대캠페인을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친환경 무상급식운동 관계자를 고발하기도 했다.

같은 기간, 오재선은 제주양로원에 있었다. TV 보며 일상을 보냈다. 몸이 아파 자주 병원을 찾았다.

2011 9 양승태는 대법원장이 됐다. 의전서열 대한민국넘버 쓰리 됐다. ktx 승무원, 전교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원세훈 국정원장 선거개입, 국가폭력 과거사 사건 등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졌다.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을 뒷조사했다.

같은 기간 오재선은 역시 제주양로원에 있었다. TV 보며 일상을 보냈다. 그는 제주양로원넘버 됐다. 현재 양로원에서 그보다 오래 생활한 사람은 1명뿐이다. 양로원에서 사는 동안 여러 노인의 죽음을 봤다.

양승태 판사는 정권과 깊이 관련된 사건을 맡을 때마다 판결로 권력자를 기쁘게 했다. 그는 언제나 권력, 강자, 다수 편이었다. 집요하고 흔들림 없는 일관성. 그의 판결이 지나간 자리에는 자살한 ktx 승무원의 무덤이 생겼고, 장애인 오재선과 고문당한 재일교포 유학생이 쓸쓸하게 남았다. 사법부는 만신창이가 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6 1 재판거래와 판사 뒷조사 등을 모두 부인했다. ktx 승무원 관련 판결에 대해서는재판은 법관이 양심을 가지고 하는 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떳떳하다고 밝혔다.

저 흔들림 없는 일관성

자신이 판결한 간첩 조작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졌음에도 사과하지 않았던 과거와 똑같은 모습. 역시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지난 5, 오재선과 제주도 애월 고내리 포구에 갔다. 오래 그가 일본 밀항을 위해 배를 탔던 곳이다. 강한 바람으로 바다가 출렁였다. 오재선은 한손에 지팡이를 짚고 바다를 바라봤다.

제가 살면 몇년이다 더 살겠어요. 죽기 전에 재심에서 간첩 누명 벗고 싶죠. 보상금 나오면 저를 18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준 양로원과 그동안 도와준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떠날 생각입니다. 그 돈 무덤에 가져갈 수 없잖아요. (웃음)”

오재선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바닷가 인근에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는 바람에 흔들리며 일관성 없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오재선은 국가에서 주는 20 원으로 달을 산다. 담뱃값을 제외하고 남는 10 원을 저축한다.

오재선은 국가에게 매월 약 20만 원을 지원받는다. 담뱃값을 제외하고 10만 원을 저축한다. ©박유빈

오재선은 어제처럼 오늘도 제주양로원에서 TV 보며 일상을 보낸다. 18년째 반복된,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일관된 일상.

, 가지를 빠트렸다. 법관 양승태가 판결로 협조했거나 그가 승승장구했던 시절의 권력자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이들은 모두 헌법을 유린했거나 법을 어겨 교도소와 인연을 맺었다.

, 놀라운 일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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