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을 고문할 영화 찍듯이 특수효과를 동원했다. 일명엘리베이터실 고문 대략 이렇다

“큰 방 중앙에 철제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 의자를 작동시키는 기계장치가 놓여 있었다. 옷을 다 벗기고는 의자에 앉힌 다음에 손발을 의자에 묶는다. 그러고는 뒤로 젖혀서 수건을 얼굴에 덮은 뒤 주전자 물을 얼굴에 쏟아부었다.

그래도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 의자를 작동시킨다. 의자는 그 자리에서 1~2층 깊이의 지하로 내려간다. 아래에서는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 아래로 한강이 흐른다. 너 하나 죽여서 강물에 던지면 아무도 모른다’고 겁을 준 상태이기에 그때 느끼는 공포심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그 정도로 그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의자에서 전기고문도 받았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조작 피해자 윤정헌 씨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한겨레> 5 5 보안사 고문 수사관보다 조작 추인한 판검사가 밉다’) 씨를 고문한 남자는 보안사령부 수사관 고병천이다.

고려대학교 의대를 다니던 윤정헌은 1984 8 27 서울 장지동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다. 43일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 강압수사를 받았다. 고병천 수사관들은 고문으로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시나리오는 뻔하다.

일본에 살던 윤정헌이 북한 정보원에 포섭돼 한국에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식이다. 고문으로 만든 조작이니 물증이 없고 범죄사실이 엉성한 당연한 . 그럼에도 재판부는 윤정헌에게 간첨 혐의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한 법원 직원이 법원 출입문을 청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정헌은 재심을 거쳐 2012 무죄를 선고 받았다.엘리베이터 고문 기술자고병천( 79) 재심 증인으로 나와고문하지 않았다 말했다. 윤정헌은 누명을 벗은 고병천을 위증 혐의로 고소했다.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검찰은 고병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고소 5년이 흘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고병천을 기소했다.

고병천은 위증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기억나지 않는다 식의 책임 회피 발언을 하다가 지난 4 2 법정 구속됐다. 고병천은 재판 끝무렵에야 윤정헌 씨를 비롯한 고문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듯한 말을 했다. 선처를 받기 위한 퍼포먼스였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정헌씨에게 사죄를 드리고, 다른 모든 분들에게도 사죄를 드립니다. 염치없이 선처를 바랍니다.”

고문으로 여러 간첩을 만든 고병천에겐 징역 1년이 선고됐다. 여러 시민은지연된 정의가 실현됐다 판결을 반겼다. 고병천에게엘리베이터실 고문 당한 윤정헌 씨의 생각은 어떨까. 일본에 있는 그에게 14 전화를 했다.

“제 사건 조작 내용은 얼마나 유치합니까. 뻔히 조작이란 걸 알면서도 검사는 저를 기소했잖아요.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법원에서 저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지만, 판사들은 듣는 척도 안 했습니다. 검사, 판사들도 공범입니다. 그들이 더 미워요. 고병천은 뒤늦게 시늉으로라도 사과를 했습니다. 똑같이 책임이 있는 검사, 판사 중에서 사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재판 당시 판사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는 윤정헌 씨의 말은 사실일까? 그의 기억은 윤색된 아닐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남긴윤정헌 간첩조작 의혹사건 공판기록 정리보고서 찾아봤다. 1984 12 26 서울지법에서 열린 2 공판기록에  씨의 진술이 적혀 있다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 가장 가혹한 대우를 받을 때는, 검사에게 송치된 후 진술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기 위해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할 때였습니다. 조사실에서 금속 의자에 옷 벗긴 채 앉히고 몸을 끈으로 묶고 손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렸고, 물 적신 수건으로 코를 덮었고 의자로 엘리베이터식으로 내려갔다가 물속에 한참 있다가 다시 조사실로 와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34 법정 진술과 올해 <한겨레> 인터뷰 내용이 일치한다. 믿었던 사법부에 배신당한 윤정헌 씨는판사도 고문 조작 사건의 공범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에게 고통을 가해 비명 소리를 듣고, 자기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사건을 조작하는 수사관과, 사법고시를 통과해 고위직에 오른 검사판사를 하나로 엮어 공범으로 여기는 합당한 일일까?

판단을 잠시 미루고 이번엔 다른 사례를 보자. 사법부 최고 정점에 오른 양승태 대법원장과 서성 대법관이 과거 각각 1, 2 재판장을 맡았던 사건이다.

서울에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병천이 있다면 제주도엔 OO 형사가 있었다. 서울에는 간첩으로 조작하기 쉬운 재일교포 유학생이 있었다면, 제주도엔 먹기 살기 위해 일본에 밀항했다 돌아온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제주도 동쪽 조천읍 출신 강희철(당시 27) 명이다. 씨는 17 때인 1975 일본으로 밀항했다. 신발공장, 프레스공장 등에서 일하다 1981 7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6 , 제주도의 고병천OO 형사 등이 씨를 체포해 105일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했다. 서울의 윤정헌 씨처럼 강희철 역시 뻔한 시나리오 대로 간첩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에서 북한 정보원에 포섭돼 한국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식이다. 간첩 혐의를 입증할 확실한 물증이 없는 것도 똑같다.

강희철은 고문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1 재판 과정에서도 허위자백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자백에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북한에 가서 머문 동안의 행적에 관하여 하루 세끼 밥 반찬 종류는 물론 노동당 당원수첩의 번호 198097까지 한구절 오차없는 진술을 수사기관에서부터 법원까지 되풀이하며 자백한 것이었다.” – 박우동 <판사실에서 법정까지> 159페이지에서.

사건 기록만 봐도 재판부 역시 씨가 간첩이 아니란 쉽게 있는 상황. 당시 재판장은 양승태 판사였다. 그는 이상한 점을 느꼈을까? 1 공판이 열린 어느 , 휴식 시간에 양승태 판사가 강희철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고 한다.

혹시, 경찰에게 고문 당했습니까?”

경찰에게 105일간 불법 감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한 강희철. 양승태 판사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셜록

순간에도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05일간의 고문이 씨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도 씨는 양승태 판사는 뭔가 눈치챘을 거라 기대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양승태 재판장은 1986 12 4 강희철에게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강희철은 2 때부터 모든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2 재판장 서성 판사은 양승태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강희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단숨에 결심을 하고” 1987 3 31 강의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훗날 박우동 대법관은 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다녀오고 말고는 고사하고 국내에서의 간첩활동이라는 것도 어디에 발전소가 있고 군부대가 있고 하는 것을 탐지했다는 등 판에 박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사형 다음의 중형을 선고한 판결에 그렇게 아무 감정도 고뇌의 흔적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재판장이란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 책 <판사실에서 법정까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결에서 어떤 인간적 감정과 고뇌도 느낄 없었다는 탄식. 동료 법관을 원망하게 만든 판결. 대법관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있다. 피고인 강희철이 혐의를 적극 부인함에도 항소심 판결문 내용은 아홉 , 고작 원고지 1.6 분량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문제는 경찰이 고문으로 만든판에 박은 시나리오 한국 사회 최고 엘리트 판사들이아무 감정도 고뇌의 흔적도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점이다.

판사는 1 사법고시를 수석합격한 수재다. 서성 판사는 1997 대법관이 됐다. 현재 그는 법무법인 세종에 고문변호사로 있다. 양승태 판사 2005 대법관, 2011 대법원장이 됐다.

강희철은 2008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엘리트 판사가 심판한 사건이 뒤집어진 것이다. 이들은 단순 오판을 했던 걸까? 법관은 피고인 강희철이 1 법정에서도 허위자백을 했으니, 어쩔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 그럼 다른 사례를 보자.

제주경찰서 OO 형사는 강희철을 고문하던 1986 그때, 비슷한 처지의 제주도 애월 출신 오재선(당시 45) 45 동안 고문해 간첩으로 만들었다.

오재선은 1 재판 때부터 적극적으로 혐의를 부인했다. 법정 진술과 탄원서를 통해 경찰이 고문과 강압 수사로 사건을 조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재판장은 양승태 판사였다. 그는 오재선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오재선은 항소했다. 2 재판장은 서성 판사였다. 오재선은 서성 재판장에게도 일관되게 경찰의 고문 사실을 밝히며 억울하다고 했다. 강희철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1987 3 31 그날, 오재선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오재선은 지금도 의문이다.

“도대체 판사들이 재판을 하는 건지, 개판을 치는 건지 정말 답답했습니다. 경찰에게 고문당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판사들이 귀가 안 들리는지, 제 말은 듣지도 않았어요.

경찰에게 45일간 불법 감금 상태에서 고문을 받은 오재선.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박유빈

같은 형사에게 고문당하고, 같은 판사에게, 같은 간첩 혐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강희철, 오재선이 같은 경험을 하나 있다. 강희철에게 원고지 1.6 판결문을 남긴 서성 판사. 그는 오재선에게도 거의 똑같은 내용, 분량의 판결문을 남겼다.

윤정헌강희철오재선,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인이 되어 한국에 이들은 수사관에게 두들겨 맞고 간첩으로 다시 태어났다. 셋은 판사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모두 외면당했다. 윤정헌 씨는 1985 6 4일에 항소이유서에서 기분을 이렇게 썼다.

민족 차별을 하는 일본사회가 싫어 조국에 와서 정착하려 결심하고 결혼해 아기도 낳았는데 배신당한 기분입니다.”

고문을 당해 누명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이 사법부다. 사법부가 자기에게 기댄 사람을 내친 사례는 숱하게 많다. 사람의 배신 경험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그래도 윤정헌강희철오재선만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 책임을 면하기 위한 형식적인 서비스 하더라도, 이들을 고문했던 수사관들은 모두 자기 잘못을 일정부분 인정했다는 점이다

간첩 조작 사건은 고문 수사관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검사의 기소, 판사의 판결로 비로소 완성된다. 고위직이어서 손에묻힐 없던 검사판사들, 고위직이기 때문에 어쩌면 책임이 있는 그들 사과한 사람은 명도 없다

민주화 이후, 미약하나마 고문 수사관들이 법적 처벌을 받은 사례는 있다. 반면, 고문 조작사건에 판결로 마침표를 찍어준 많은 법관들이 법적 책임을 사례는 건도 없다. 여러 과거사 사건이 재심에서 뒤집어졌지만, 국가배상소송에서 법관의 과실이나 불법행위가 인정된 사례는 없다.

판사들은 왜 사과하지 않을까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과실과 불법행위를 추궁당하는 쪽은 수사관 아랫사람들이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했는지, 의도적으로 정권의 뜻에 따라개판을 쳤는지 다툼이 대상이 아니다. 전현직 법관이 본인 판결 문제로 증인으로 불려나간 사례 자체가 없다.   

서성 대법관은 퇴임 후인 2003 9 <동아일보> 인터뷰를 했다. 기자가후배 법관들에게 한마디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현직에 있을 때 처신을 바로 하고 바르게 살려고 항상 노력했습니다. 법관은 항상 용기를 가지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제물에 대한 욕심을 자제하고 남을 위해 베풀며 ‘적극적’ 청렴을 실천해야 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6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 거래 의혹 등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연합뉴스

양승태 대법원장은 재판 거래 의혹 관련 지난 6 1 기자회견에서 “(저는) 재판 독립의 원칙을 정말 금과옥조로 삼는 법관으로서 40여년을 지내온 사람이 사람이라고 말했다. 오재선은 이런 양승태를 TV뉴스에서 보고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밝혔다.

재판 거래 의혹, 판사 뒷조사 문건이 쏟아져 나와도 양승태가 당당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정권의 몽둥이 일한 말단의 고문 수사관에겐 크게 분노하지만, 법봉으로 없는 사람 때려 잡는 판결로 정권에 협조한 고위직 법관에겐 관대하다.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윤정헌 씨의 말을 복기해 본다.

‘고문 수사관과 법관은 공범인가, 아닌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