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한 번 재판정에 들어섰다. 1년 전 법정구속 된 순간이 떠올랐다. 징역 4년. 방청석에 앉아 있던 가족들과 그 길로 헤어져야 했다. 그날의 두려움이 다시 밀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평소에 지나쳤던 사소한 감각까지 되살아난다. 방청석을 채운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판결문을 넘기는 소리. 어쩌면 국가보안법이라는 ‘장벽’ 앞에서 판사 역시 부담을 느꼈던 건 아닐까. 주문을 읽어내려 가는 판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피고인 김호는 무죄.”

남북경협사업가 김호(50) 전 HB이노베이션 대표. 지난달 23일 서울고등법원(이원범 형사2부 부장판사)은 김호에게 내려진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이라는 1심 판결을 모두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은 지 5년 만이었다. 김호는 “지옥에 갔다 온 기분”이라고 그날의 심정을 떠올렸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1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김호를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그는 창가에 앉아 철학 책을 읽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 1호 ‘간첩’ 사건의 주인공. 하지만 체크 남방에 카키색 점퍼를 입은 평범한 중년 남성으로 보일 뿐이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난 1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김호 전 HB이노베이션 대표를 만났다 ⓒ셜록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한반도에 평화의 새바람이 불었다. 남북이 서로 신뢰를 다지며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약속했다. 김호는 이때 대북경협 사업에 뜻을 두고, 2002년부터 북쪽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성행하던 판매업이 주춤하자 그는 2007년 IT 협력 사업에 눈을 돌린다.

그는 얼굴 인식 프로그램 개발에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중국법인을 통한 제삼자 무역 형식을 통해 북측 인력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북 경협을 이어간 것이다. 2012년에는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2015년 미 국립표준기술원(NIST)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10년간 토대를 다져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2018년. 순항하던 사업에 제동이 걸린다.

“(사업을 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항상 염두에 뒀던 건 사실이에요. 아무리 정권의 기복이 있었다지만, 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교류를 한 것도 아니었고요, 경제적인 교류 협력을 했기 때문에, (만약 문제를 삼는다 해도) 남북교류협력법(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정도는 생각했지, 국가보안법으로 이렇게 조작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해 남북 정상은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며 약속했다. 한반도에 평화의 나무가 심어지는 동안 김호의 삶은 뿌리째 뽑혀나갔다.

2018년 8월 9일 어슴푸레 동이 트던 새벽이었다. 김호 가족이 사는 옥탑방으로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실에서 작은딸과 함께 잠들어 있던 김호를 끌어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들이밀어 김호를 체포했다.

“지금이 무슨 이명박 정부냐, 박근혜 정부냐. 제가 진짜 발악을 했거든요. (…) 구속영장 청구서를 보고서야 저한테 씌워진 혐의를 알았어요. 구체적인 내용은 그때도 사실 몰랐어요. 구속되고 나서 경찰의 수사 기록을 보고서야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았어요.”

2018년 4월 김호는 투자 유치 차원에서 홍콩 코트라 주최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사업을 소개했다 ⓒ김호 제공

검찰은 김호가 북측 프로그래머와 개발한 프로그램이 사이버테러의 위험성이 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했다.

▲북측 인력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회합통신’(국가보안법 제8조) ▲기술자들에게 하청을 주고 개발비를 건넨 것과 개발 관련 자료를 제공한 것은 ‘편의제공’(국가보안법 제9조)과 ‘금품수수’(국가보안법 제5조) ▲기술적 문의를 하는 과정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은 것에는 ‘자진지원’(국가보안법 제5조, 제4조)이 적용됐다.

압수수색에 나선 검찰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휴대폰과 노트북을 가져갔다. 그 안에는 김호가 사업을 북측 담당자들과 나눈 대화가 전부 담겨 있었다.

“내가 오히려 (통화 내용을) 공개하라고 했어요. 저는 가능해요. 그런데 오히려 얘네들(검찰)이 숨겼어요. 그걸 자기네들한테 유리한 거 몇 개만 조각조각 편집해서 전후 문맥도 알 수 없게 했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원본 그대로 제출해라, 그걸 왜 숨기느냐’ 그랬죠.”

김호는 자신이 해온 일에 떳떳했다. 그는 검찰이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라고 규정한 2명을 통일부에 공식적으로 접촉 신고를 하고 만나왔다. 또한, 국정원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업 동향을 전했다고 말했다.

김호의 시련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언론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김호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전, 온갖 기사들이 쏟아졌다.

법적인 심판을 받기도 전에 피의 사실을 공표하며 쏟아진 기사들  ⓒ셜록

언론은 공소장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아직 법정에서 입증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한 종편 채널은 검찰이 유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수사 기록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김호가 북측 담당자와 나눈 농담을 교묘하게 편집했다.

마녀사냥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에요. 한 명을 죽이는 거죠. 그 한 명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 대중들이 얼마나 겁먹겠어요. 그게 마녀사냥이 바라는 바인 거예요. (…) 그게 국가보안법인 거죠. 한 명만 하면 돼요. 사람들이 보면 무섭지 않겠어요? (국가보안법은) 그 존재 자체가 공포인 거죠.”

김호의 억울한 목소리는 대중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고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언론은 그를 ‘간첩’, ‘북의 지령을 받은 자’로 보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시간이 흘렀다. 2심 무죄.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5년 만에 나온 무죄 판결 소식을 보도한 기사는 10개 남짓. 그조차 법원의 보도자료를 짤막하게 인용한 단신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환호성이 터져나온 법정과 달리 법정 밖은 고요했다.

 “원심 및 당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김호)이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인 박○○, 양○○을 ‘지원할 목적’으로 군사상 기밀을 제공하였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따라서 이 부분 피고인의 사실오인 내지 법리오해 주장은 이유 있다.”(2023. 3. 23.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일부, 2022노266)

2심 재판부는 김호의 사업이 ‘특수한 목적성’을 띤 것이 아니라 적법한 사업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른바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라는 사람들을 사업 파트너로만 생각했을 뿐, ‘어떠한 목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호에게 적용된 ▲편의제공 ▲금품수수 ▲회합통신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모두 벗겨졌다.

김호가 5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셜록

그러나 그는 쉽게 일상으로,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사람이 사실 배고파서 죽는 건 아니고, (제일 크게 잃어버린 건) 비전 상실이죠, 비전 상실. 제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이렇게 한길을 걸어왔는데….”

김호가 10년간 쌓아왔던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삼성보다 한층 더 높은 기술력”이었다고 자랑하던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IT 기술이라는 건 1년만 손을 떼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최근 김호는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중노동을 한다.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근 6개월간, 법정에 나가는 날을 빼곤 하루도 쉬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할 때 강도 높은 일을 해야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했다.

김호에게는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 검찰은 지난달 30일 2심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고했다. 무죄 판결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법정 공방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지금도 사실은 불안의 연속이에요. 나로 인한 사건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내가) 안고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 (2심 무죄 판결에) 주변에서 많이들 좋아하죠. 그것도 고마워요. 그런데 결국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 가는 거지, 누가 짊어지겠어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라진 5년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간첩’이라는 꼬리표 역시 그가 안고 가야 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붉은 수식어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농민, 노동자, 시민사회, 종교계 등 각계 대표자들이 지난 2월 1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국가보안법 폐지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셜록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에 미결로 남은 숙제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 법률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9월 15일 공개변론도 진행됐고, 헌재의 판단이 머지 않았을 거라는 전망도 나왔다. 김호는 헌재의 판결 대신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문제는 사실 입법기관(국회) 아니겠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야 헌재 판결이 어떻게 나오는지 당연히 관심 가지고 지켜보자고 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들은 법을 만들거나 없애거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그걸 하지도 않으면서 언제까지 ‘추이를 지켜본다’ 이런 얘기만 하는지….”

그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보안법 폐지를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이용하는 국회의원들의 태도 때문에 실질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진심으로 바꾸겠다는 생각 없이 눈치만 보는 그들의 행보에 실망한 듯했다. 그들에게 ‘진심’이 있었다면 이미 몇 번이고 폐지됐을 거라는 게 김호의 문제의식이었다.

“남북관계의 긍정적인 유산은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걸 그대로 가지고 온 거고, 그 이상 도약을 못했던 게 결국 거꾸로 가버리는 결과를 만드는 거라고 봅니다.”

최근 발생하는 이른바 ‘간첩단’ 사건에도 안타까움을 표했다. 등에 “국가정보원”이 새겨진 검은 점퍼를 입은 국정원 수사관들과 경찰 수사관들은 노동조합, 농민단체 등을 연이어 압수수색 했다. 이 과정에서 구속되거나 체포되는 활동가들도 있었다. 시민사회에서는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공안탄압을 멈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호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발생한 이른바 ‘간첩단’ 사건은 문재인 정부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는 2018년에 체포됐지만 공안당국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물밑 작업’은 2012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역시 오랜 ‘준비’ 끝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일지 모른다.

그는 앞서 공안 조직이 사라졌다면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았을 거라며,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는 여야 가리지 않고 제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셜록과의 인터뷰가 끝나갈 때 그는 국가보안법 뒤에 가려진 현실의 병패를 이야기했다. ⓒ셜록

“사법부라는 보수적인 틀에 갇힌 그분(2심 재판장)도 본인의 결단과 용기로 저에게 무죄를 내려주셨잖아요. (판결문을 읽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고) 이 재판장이라는 사람도 국가보안법 앞에서 겁먹고 힘든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더 고마운 거죠. 그런데 이런 것조차 못하는 사람(국회의원)들이 무슨 남북관계 개선이네, 진보네 해요. 이거 다 거짓말이에요. 사실 그분(재판장)만큼도 용기를 못 낸 거지.”

김호의 삶은 아이러니하다.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간 것은 문재인 정부 때였고,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윤석열 정부 때다.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입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고, 태생부터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사법부는 오히려 무죄 판결로 그를 지옥에서 구해줬다. 이는 그에게 더 큰 배신감으로 작용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게 우리 한국 사회의 장벽이에요. 정신적인 장벽인 거죠.”

국가보안법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사람을 가른다. 심지어는 피해자의 측근마저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잡혀갔겠지’ 하며 등 돌리게 만드는 법. 김호는 국가보안법 피해 당사자가 되면서 그 고통을 몸소 느껴야 했다. 결국 이 까마득한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건 변명이 아닌 결단과 용기라고 그는 강조했다.

“저는 보수니까 나쁘고, 진보니까 착하고, 이런 식으로 보지 않아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분단이라는 굴레 있잖아요. 이 족쇄에서 벗어나면 보수에게도 새로운 책임과 결단이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는 것이고, 진보는 더 용기를 내서 이 족쇄를 넘어서야만 더 새로운 비전과 세상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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