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직 탑승 시작 전이라 비행기 안에는 우리만 있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음료수를 권했다. 잠시 후 신문을 가져온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한겨레>를 집어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내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내 인터뷰 기사가 전편에 실려 있다. 모국을 떠나는 순간, 2014년 11월부터 벌어졌던 일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신은미, 도서출판 말, 2016년)

신은미(61)는 2015년 1월 10일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집으로, 내 가족들과 이웃들이 기다리는 미국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남한 땅이 보였다. 5년간 밟지 못할 고향이 아득히 멀어진다. 이내 희뿌연 뭉게구름이 눈앞을 가렸다.

신은미는 2015년 1월 10일 대한민국에서 강제출국당한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한겨레 신문을 읽었다. ‘어머니조차 얼굴 보고 살지 말자는 문자 보내’라는 신문 타이틀 아래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신은미

그가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것은 2014년 11월 19일. 그날 저녁 조계사에서 열릴 ‘통일토크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미국 국적인 재미동포 신은미는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총 세 차례 방북한다. 그 과정에서 북한 여행기 시리즈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누적 관광객 수 200만 돌파를 앞두고 2008년 중단된 금강산 관광 사업. 개성공단마저 2013년 5개월간 운영 중단이 되며 남북한 민간 교류가 축소된다. 냉각된 한반도 화해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북한 이야기를 접하기 어려울 때, 신은미의 방북 여행기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며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신은미는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과 통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여행기를 묶어 펴낸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신은미, 네잎클로바, 2012년)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다.

신은미의 ‘통일토크콘서트’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일곱 달 전인 2014년 4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의 초청으로 ‘통일토크콘서트’를 진행한 바 있었다. 그해 11월 강연 역시 6·15남측위 초대가 있었다. 지난 전국 순회 강연으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신은미는 그해 11월 다시 한번 청중들 앞에 섰다.

TV조선 뉴스9의 2014년 11월 21일 보도 화면 ⓒTV조선 보도 화면 갈무리

서울에서의 첫 강연을 마치고 이틀 뒤인 21일 오전, 가족들의 갑작스런 연락을 받는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다는 통보. 영문을 알 수 없는 신은미에게, 언니는 ‘텔레비전 몇 군데’에서 보도가 이어졌다고 말했다. 신은미는 곧장 호텔 방 텔레비전을 켰다. 종편 채널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북콘서트’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하루아침에 ‘악마’로 둔갑한 신은미 사진도 함께 실렸다.

신은미를 ‘간첩’처럼 묘사하는 언론.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놀라움과 걱정을 문자 메시지에 담아내기도 했다.

“나의 아름다운 딸이 어찌 악마로 변했느냐. 오늘 새벽기도에서 널 위해 기도했다. 예전의 예쁜 너의 모습으로 되돌려 달라고. 왜 그리 정신 나간 짓을 하고 다니느냐. 언제부터 빨갱이짓 하고 다녔느냐. (…) 당장 사탄 같은 짓 그만둬라. 네가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엄마는 너를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2014년 11월 21일 어머니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

TV조선은 신은미가 강연 중 했던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신은미는 토크콘서트에서 “대동강 맥주가 맛있다”, “북한의 강물이 깨끗하다”고 이야기했다. 종편은 북한을 ‘지상낙원’처럼 표현한 신은미가 북한을 고무·찬양했다고 지적하며,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보도를 이어갔다.

지난 4월 토크콘서트에서도 반복적으로 했던 이야기였다. 앞서 문제 되지 않았으니 단순한 ‘오보’일 거라고 여겼다. 신은미는 “곧 정정보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좀처럼 반가운 뉴스는 들리지 않았다. 종편 채널에서 시작한 보도는 몸집을 키웠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했다”는 보도에서 나아가 “북한의 지령을 받는다”, “주체사상을 옹호한다”는 뉴스로 이어졌다. 정정보도가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우익단체에서 신은미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언론의 ‘종북몰이’에 전국 순회 강연도 난항을 겪는다. 토크콘서트를 앞두고 장소가 변경되거나 대관한 건물에서 당일 행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우익단체는 통일토크콘서트가 개최되는 기관 앞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 강연장 앞에서 고성과 몸싸움이 오갔다. 신은미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날의 테러를 막진 못했다.

신은미가 2013년 8월 17일 평양 공항에 도착해 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신은미

2014년 12월 10일 전북 익산의 한 성당. 이곳에서 신은미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성당 앞은 기자들과 시위대로 북적였다. 강연이 시작되고 40여 분이 지났을 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등학생 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신은미에게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하지 않았냐”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행사 스태프는 원만한 진행을 위해 그 학생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오○○는 몇 분 뒤 가슴 속에서 양은냄비를 꺼냈다. 냄비 안에서 시뻘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는 인화성 물질이 든 냄비를 신은미가 서 있던 무대 방향으로 투척하려다 저지당했다. 불덩이는 신은미가 서 있던 책상 앞에 떨어졌고, 장내는 화염과 하얀 연기로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토크쇼에 참여한 200여 명이 대피하고, 2명이 화상을 입는다. 이른바 ‘사제폭탄 테러사건’을 자행한 오○○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테러가 있고 이튿날) 서울에 도착해 광화문에 있는 대사관에서 영사를 만나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영사는 저와 남편에게 “어서 이 나라(한국)를 떠나라”고 했고, 미국 국적자인 저는 국적국 영사의 지시에 따라 바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제가 출국금지를 당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습니다.”(신은미 서면 인터뷰 2023. 5. 6.)

공항에 도착한 신은미는 카운터에서 티켓을 구매하던 중 자신이 출국정지 당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한국을 떠나라고 했던 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공항 법무부 출입국 사무소에서 출국금지를 확인하고 미국의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메일을 열었는데, ‘질긴놈’이라는 사람이 보낸 메일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누군가가 아직도 폭탄을 들고 ‘질기게’ 저를 추적하고 있다는 생각에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열었더니 ‘서울지방경찰청’ 경위로부터 온 메일이었습니다.”(신은미 서면 인터뷰(2023. 5. 6.))

‘질긴놈’은 신은미 담당 수사관의 이메일 대화명이었다. 신은미는 10일간 출국금지 처분을 받는다. ‘질긴놈’은 신은미가 언론사를 고소한 사건과 보수 단체로부터 고발당한 사건과 관련해 조사가 필요하다며,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사무실로 출석을 요구했다.

신은미는 2014년 12월 14일 첫 경찰 소환 조사에 응했다. 이번에도 언론의 허위 보도가 이어졌다. 언론은 신은미를 ‘앞선 경찰 소환에 불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질긴놈’의 메일을 받고 절차에 따라 출두 날짜를 정한 신은미는 떳떳했다. 그녀는 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찰 조사에 응하고, 15시간 검찰 조사에도 출석한다. 경찰과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신은미에 대한 출국금지는 두 차례 연장된다.

그사이 해가 바뀌어 2015년이 됐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2부(김병현 부장검사)는 1월 8일 신은미가 ‘통일토크톤서트’를 열고, “북한의 3대 세습과 체제를 미화했다”며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 등) 위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기소는 하지 않았다.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과 함께, 법무부에 강제퇴거를 요청했다.

그에 따라 2015년 1월 10일, 신은미에게 강제출국 명령이 떨어진다. 신은미는 출국금지 조치로 31일간 대한민국에 강제로 발이 묶인 뒤, 이제는 5년간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신은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2014년 겨울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다. 미국 공항에 발을 딛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은 환영 플래카드와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신은미는 주먹질과 고성이 오가는 공항에서 쫓기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인기피증이 생긴 신은미는 한동안 집에서만 생활한다. 지난 시간으로 그녀의 삶은 사뭇 달라졌다. 그녀는 지금도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일을 어려워한다. 이번에 셜록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다. ⓒ셜록

혹독한 겨울을 보낸 신은미에게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가족이나 친지가 아니면 전화 통화조차 어렵고, 밖에 나가 장을 보거나 머리를 자르는 일 또한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은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나는 깨달았다. 한국 사회가 ‘종북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을. (…) 어느 누구도 “너 종북이지?”라는 질문에 “그래, 나 종북이다”라고 반박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자신은 종북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오히려 종북의 올가미에 더 깊게 걸려들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한다.”(≪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신은미, 도서출판 말, 2016년)

신은미는 남한사회에서 ‘종북’ 프레임이 씌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실감한다. 하지만 그만큼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에 기여하는 삶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신은미는 2015년 3월 “강제퇴거 명령이 부당하니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진행한다. 4월에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 행정5단독(송방아 판사)은 2016년 7월 7일 신은미에 대한 강제퇴거 명령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이어진 2심에서 서울고법 행정6부(이동원 부장판사)도 2017년 2월 8일 강제출국 조치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진작에 고국에서 ‘종북몰이’를 당할 때부터 한국의 검·경이나 사법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아 (패소 판결을 보고도) 마음의 동요나 감정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만 판결문을 보고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공공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강제출국 및 5년간 입국금지 조치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판결입니다.”(신은미 서면 인터뷰(2023. 5. 6.))

신은미는 1심과 2심 판결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판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과거 ‘국가보안법을 위반함으로써 사회의 안녕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추방됐던 2015년 1월과 달리, ‘강제퇴거 취소소송’ 판결문에는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없지만 원고(신은미)가 사회갈등을 야기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공방은 2021년 9월 30일까지 이어졌다. 결국 헌법재판소까지 가서야, 신은미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합당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전원일치로 ‘기소유예처분 취소’ 결정을 했다. “북한의 권력 세습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한다고 보기 어렵고”, “대한민국의 안전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신은미는 앞선 법정공방에서 두 차례 패소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연신 보도하며 ‘종북몰이’에 박차를 가했다. 좀처럼 어려울 것 같던 법적 구제. 하지만 6년 6개월 만에 헌법재판관들은 신은미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 기소유예처분은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친 중대한 수사미진 및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는 자의적인 검찰권의 행사로서 청구인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였다.”(2015헌마349 기소유예처분취소 헌법재판소 결정문)

신은미는 지난 시간을 “창살 없는 거대한 감옥과 같았다”고 기억했다. 이어 ‘종북몰이’는 “가짜뉴스와 허위보도를 일삼은 언론”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뉴스의 막대한 영향력을 실감했다고 전했다.

빅카인즈와 네이버(종편4사)를 통해 집계한 시기별 ‘신은미’ 관련 보도 건수 ⓒ셜록

한국 언론이 만든 “창살 없는 거대한 감옥”의 실체를 확인해보자.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의혹 제기'(2014년 11월~2015년 1월) 시기와 ‘무죄 판결'(2021년 10월) 시기의 ‘신은미’ 관련 보도량을 집계해 비교했다.  

우선 뉴스빅데이터 분석서비스 빅카인즈(www.bigkinds.or.kr)를 통해 각 시기 검색어 ‘신은미’를 통해 확인되는 기사의 양을 확인했다. 빅카인즈에는 종편4사(JTBC, MBN, TV조선, 채널A)가 집계되지 않아, 이들 매체의 보도량은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검색해 합산했다.

신은미 관련 보도의 양은 ‘의혹 제기’ 시기인 약 3개월간(2014년 11월 17일 ~ 2015년 1월 11일) 모두 1788건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기소유예 취소 판결 이후 한 달간(2021년 9월 30일 ~ 10월 31일) 보도량은 12건에 불과했다. 1788 : 12. ‘의혹 제기’ 시기의 보도량이 ‘무죄 판결’ 시기의 보도량보다 149배 많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울과 광주에서 토크콘서트가 열린 2014년 11월 셋째 주 당시 신은미에 대한 보도는 19건이었다. 이때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종북콘서트’라는 내용의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보도량은 점점 늘어났다. 가장 많은 기사가 쏟아진 12월 둘째 주에는 한 주 동안 무려 662건의 보도가 있었다. 이른바 ‘익산 사제폭탄 테러사건’과 출국정지, 경찰 첫 소환 조사가 이뤄진 시기였다.

‘의혹 제기’ 시기 가장 많은 보도를 한 언론사는 매일경제, 채널A, MBN 순이었다. 매일경제는 전체 1788건 중 243건(13.59%), 채널A는 242건(13.53%), MBN은 130건(7.27%)을 기록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에서 ‘기소유예 취소판결’이 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보도량 상위 3개 매체인 매일경제, 채널A, MBN은 물론, 종편 4사 모두 단 한 건의 기사도 검색되지 않았다.

이러한 통계를 살펴보면 언론이 신은미를 어떻게 ‘종북인사’로 만들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사건 초기에는 ‘종북’ 프레임을 씌워 의심을 풍선처럼 부풀리다가, 시간이 지나 혐의가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 조용히 침묵해버리는 언론의 행태.

2021년 헌법재판소의 기소유예 취소 결정에도 신은미가 마음껏 즐거워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지인들의 축하에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헌법재판소의) 위헌소원 판결에도 낙인찍혀 버린 과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물량 공세를 퍼붓던 몇 언론들은 무죄 판결 앞에 입을 닫았다.

“만약 언론이 나를 ‘살인자’라고 보도했어도 내 가족이 사건에 대한 자초지종조차 알아보려 하지 않고 나를 내쳤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렇듯 한국에서 ‘반공’이라는 것은 가족애를 초월하는, 모든 가치 위에 있는 최상의 가치가 돼 버렸다.”(≪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신은미, 도서출판 말, 2016년)

신은미는 당시 뉴스 보도로 일부 가족, 지인들과 등졌다. 사람들의 노골적인 혐오 발언에도 귀를 닫아야 했고, 강연장에서 신변의 위협도 느꼈다. 그 과정에서 신은미는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국가보안법’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 법이 가족 간의 유대도 단숨에 끊어버리는 ‘천하의 몹쓸 악법’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미 고국에서 ‘종북몰이’를 당하며 한국 언론을 경험했기에 그 정도(추방 후에도 계속해서 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의 행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런 언론의 행태를 바로잡지 않으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고국의 모습을 보며 더욱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신은미 서면 인터뷰 2023. 5. 6.)

미국으로 돌아간 신은미가 2022년 12월 19일 시애틀에서 토크콘서트 강연을 하는 모습. ⓒ신은미

신은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언론은 ‘북한 찬양은 미국에서도 계속’되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한번 씌워진 ‘종북’ 프레임은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짜뉴스와 허위보도를 일삼는 언론의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대한민국 정세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 제주·경남 등 각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구속 기소되는 이들도 있다. 사법적으로 확인되기도 전에 피의사실에 대한 과잉 보도로 사회적인 ‘단죄’가 이뤄지는 행태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신은미는 시민들의 의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더 이상 언론이 하는 보도를 온전히 흡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그(종북몰이 보도) 영향력이 전보다 감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촛불행동의 구호가 북한의 지령이다”라고 정부가 주장하고 언론이 퍼뜨려도, 국민들이 별로 호응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요.”(신은미 서면 인터뷰 2023. 5. 6.)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 신은미는 꺾여 나가지 않았다. 거센 바람에도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믿음’이 있었다. 진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할 수 없다는 굳센 마음이었다.

“여러분! 제아무리 ‘힘센 악’도 ‘선함’을 이길 수 없고, 제 아무리 강건하게 포장되어진 ‘옳바르지 않음’도 ‘옳음’을 범할 수 없습니다. 저도 늘 사랑하는 여러분을 생각하며 우리 모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애쓰겠습니다.”(2015년 1월 10일 강제출국 당일 작성한 ‘출국성명’ 중)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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