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졸업생을 대표해 단상에 올랐다. 눈부신 조명 때문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니 무대 아래 가족 단위로 모여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조명보다 따가운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냈다. 곧이어 조금씩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얼굴도 모르는 부모라는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갓난쟁이를 매정하게 내다버린 사람들. 그들이 그린 내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벽외지 근무’를 자원한 대학생 예비교사 이야기. 그녀가 외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육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국가의 지원 덕분에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외면하지 않은 국가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에 환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인간극장’류의 훈훈한 미담으로 소개될 법한 이 이야기는 영상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영상물을 가지고 있다면, 집으로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이는 북한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설마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압수수색을 당하고 기소되기까지 할까?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2일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유영호(60) 왈가왈북 대표를 만났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2일 서울 노고산동 이한열기념관에서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 왈가왈북 대표를 만났다. ⓒ셜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그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목격하게 된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 화해와 평화를 약속한 ‘일대 사건’. 당시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영호도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그는 통일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간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 중 북한 영화를 감상했던 날, 그의 마음속에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쪽 영화를 보면 되게 낯설어요. 남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령’, ‘당’ 이런 것들을 얘기하니까 되게 낯설죠. 그런데 그것만 약간 벗어나서 본다면 일상생활 모습이나 가정에서의 문제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하고 아무 차이가 없어요.”

이질적인 북한 영화에서 우리와 닮은 사람살이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쾌재를 질렀다. 그가 영화를 통한 ‘북 바로 알기’에 몰두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모든 사람이 직접 방문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회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유영호는 인터뷰에 앞서 준비해온 기록물들을 테이블 옆에 올려뒀다. 마음속 어딘가에 정리해뒀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본다.  ⓒ셜록

경찰은 2011년 유영호의 일상에 불쑥 나타났다.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며 들이닥친 경찰청 보안수사대 직원들은 능숙하게 압수물을 골라냈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 그러나 유영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2011년에 ‘왕재산 사건’이 발생했잖아요. 거기에 연루된 사람 중에 제가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곧 나도 건드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영호는 이른바 ‘간첩단’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압수수색을 당한다. 대학원에서 통일학을 전공하며 북한 자료들도 가지고 있던 그는 공안당국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유영호는 약 6개월간 인천 만수동에 위치한 대공분실을 오갔다. 수사관은 매달 조사를 목적으로 그를 호출했다. 당시 그는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모바일 서비스 프로그램 개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대공분실까지 이동 시간만 왕복 두 시간. 조사를 받는 날이면 하루가 송두리째 “깨지는” 셈이었다.

“전체 중 일부분만 가져와서 증거로 들이민 적이 많아요. 제가 예전에 홋카이도에 있는 재일 조선학교를 견학 갔어요. 학교 복도에 있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학생들을 지켜보니 정말 그런 생활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 카페에 그런 내용을 견학 후기로 적었어요. 그런데 (수사관은) 그게 북한 헌법 63조 조항이라면서 북한을 찬양한 걸 인정하냐고 묻더라고요.”

국정원은 유영호가 재일 조선학교 방문 후기에 쓴 문구를 지적했다. 그런데 이 문장, 어딘가 친숙하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One for all, All for one). 다름 아닌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 속 명대사로도, 이미 흔하디 흔하게 퍼져 있는 말이다.

유영호가 대학 시절 만든 역사기행 동아리 ‘산하사랑’ 회지 표면에 압수물 스티커가 붙어 있다 ⓒ유영호

그들은 유영호가 1988년 대학 시절에 만든 동아리 회보도 문제 삼았다. 그는 당시 역사기행 동아리 ‘산하사랑’을 창립했다. 동아리를 조직하고, 처음으로 발간한 소식지는 그에게 의미 있는 기록물이었다. 대학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한 부 복사해 보관하던 회보는, 뜻밖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증거가 됐다. 수사관은 동아리 창립 취지에 적힌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말을 문제 삼았다. 이 세 단어가 북한이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이었다.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났다. 유영호의 집에 등기우편이 날아들었다. 발신처는 다름 아닌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이었다. 올 것이 왔다.

검찰은 유영호의 전자우편과 압수물에서 발견한 63건의 자료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했다. 제시된 증거는 북한 영화 20편과 북한 출간물 43건. 검찰은 유영호가 이를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할 목적”으로 소지했다며 기소했다.

유영호는 압수수색 이후 4년이 지나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셜록

조사받은 지 4년 만에 기소라니. 유영호는 압수수색을 받는 순간부터 언젠가 기소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 4년은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가족들과 미국으로 1년간 지내러 다녀올 때는, 혹시 출국금지를 당했을까 싶어서 출입국사무소를 찾아가 거듭 확인하기도 했다.

법적 공방이 시작되자 유영호는 매달 한 번씩 법정에 출석했다. 2015년 5월 21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22번의 재판이 열렸다. 공판이 시작되자 검찰은 이른바 ‘전문가’의 감정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위 문건에서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인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해 ‘주석’,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꼬박꼬박 붙이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는 북한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 저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2010년 5월 16일 강석승 당시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대우교수가 작성한 감정서 일부)

유영호가 2009년 집필한 책 ≪북한영화, 그리고 거짓말≫에 대한 감정서. 그는 이른바 ‘전문가’에 의해 “주체사상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 선전하려는 함의가 있는” 인물이 돼버렸다. 이러한 감정서 수백 장이 재판부에 제출됐다. 유영호의 ‘이적목적성’에 대한 감정이었다.

“검찰 쪽에서 증거(북한영화)들이 자꾸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니까, 변호사가 그럼 그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했어요. 직접 보고 판단하자고요. 검사가 안 보려고 하는데, 판사가 “봅시다”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그중 한 편을 먼저 봤는데, 한 시간이 조금 넘었어요. 그거 보고 재판이 끝났죠. 다음에 판사가 “남은 한 편도 마저 봅시다”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2부까지 다 봤죠.”

2016년 봄에는 공판 중 북한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을 같이 감상하는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검사가 지적한 ‘이적표현물’을 시청하는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사실 <심장에 남는 사람>은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누구든 볼 수 있는 영화다. 심지어 같은 제목의 영화 주제곡 ‘심장에 남는 사람’은 영화보다 더 유명해져서, 한국 가수들에 의해 여러 차례 다시 불리기도 했다.

‘심장에 남는 사람’ 유튜브 검색 결과 화면 캡처. 맨 위는 한국 가수가 영화 주제가를 부르는 공연 영상, 맨 아래는 <심장에 남는 사람> 영화 영상이다.(검색 일자 : 2023년 6월 14일)

재판이 시작되고 세 번째 여름을 맞은 2017년 6월 21일. 법원의 첫 번째 판단이 나왔다. 결과는 ‘유죄’.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4단독(남현 판사)는 유영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검사가 지목한 63건의 증거를 이적표현물이라고 봤다.

유영호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통일학을 전공하고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이 북한 관련 자료를 갖고 있는 게 죄가 된다니, 의아했다. 그건 마치 심리학 전공자가 심리학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일 아닌가.

1심 판결에 변호인과 검찰은 각각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1일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형사부(지영난 부장판사)는 1심 판결에서 ‘이적목적성’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던 부분을 무죄로 봤다. 즉, 1심에서 유죄로 판단한 부분까지 모두 무죄로 보고 ‘최종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판결은 뒤집혔다.

판사는 “피고인(유영호)이 대학 시절부터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이론적·실천적 관심을 갖고 오랜 기간 활동한 연구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어 “북한의 정책이나 문화 연구에 대한 참조용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유영호가 이적을 목적으로 자료 수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흔히 무죄 선고를 받은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은 환호하거나 눈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유영호는 담담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머릿속으로 되뇌던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6년 하고도 1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다. 법정을 빠져나온 유영호는 담당 변호사와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그제야 찬 바람에 얼어 있던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유영호는 국가보안법이 우리 사회의 “법률적 적폐”라고 이야기했다 ⓒ셜록

“국가보안법 무죄 판결을 받고 나서도 심리적인 위축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항상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거요. 이게 결국 국가보안법의 위력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영호는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우리 사회의 “법률적 적폐”라고 이야기했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일상 속에서 누구나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나는 북한을 지지하지는 않지만’과 같은 안전망을 쳐야 한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해 논박하려면 ‘대단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하고, 준비한 그 자료의 출처가 북한이라면 가치가 없는 정보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에 북한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북한 경제가 힘들고, 사상이 어떻고,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는 식이죠. 그런데 그 정보들은 직접 찾아서 공부한 게 아니라 어디선가 주워들은 거죠. 우리가 북한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없으니까요. 대개 언론이나 학교에서 배울 텐데, 그것들의 출처는 결국 국정원인 거죠. 북한에 대한 1차 정보가 아니고 가공된 정보라는 거예요.”

유영호가 ‘북 바로 알기’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남한에 유통되는 북에 대한 정보는 진실과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른 나라에 대해 알려면 그 나라의 정보를 수용해야 하는 것처럼, 북한을 알기 위해서는 바른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영호는 “법률적 통일은 국가보안법 폐지”라고 말했다 ⓒ셜록

유영호가 압수수색을 당한 시점으로부터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공안정국’은 그의 말을 실감하게 해준다.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달 2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전교조 강원지부장의 사무실,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민주노총 사무실과 금속노조 경남지부 사무실에서도 각각 지난 1월과 2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사람들이 통일을 어렵다고 보는 건, 어떤 게 통일인지 정의하는 게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누구는 체제가 하나 되는 걸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구는 자유 왕래만 되면 통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 제가 생각할 때 법률적 통일은 국가보안법 폐지인 것 같습니다.”

유영호는 국가보안법 사건에 휘말리면서 압수수색과 조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셜록이 앞선 기사에서 만난 이들 역시, 끝내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고통스러운 세월을 겪었다.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빼든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칼. 국가보안법은 생각의 감옥 안에 사람을 가둔다. 그러나 이들은 그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김호는 계속해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한 글을 쓰며,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에도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관련기사 : <“국가보안법 무죄!” 나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강성호는 경남 진주와 서울을 오가며 국가보안법 폐지 시위를 이어갔다.(관련기사 : <‘빨갱이 교사’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모두 공범이 됐다>)

최보경은 국가보안법 폐지 자전거 국토종단을 하고,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인 활동을 계속 활발하게 펼쳐가고 있다.(관련기사 : <382번의 단식… ‘흰옷’ 입은 학생들이 국보법을 이겼다>) 신은미는 미국에서도 계속 통일운동가로 살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관련기사 : <언론이 만들어낸 마녀… ‘1788 : 12’라는 참혹한 대비>)

유영호 역시 ‘북 바로 알기’를 주제로 글을 쓰고 유튜브 채널 ‘왈가왈북’을 운영하며 북에 대해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날이 멀지 않았다는 게 바로 지금 정세가 아닐까 싶어요.”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어둠에 숨어 다음 타깃을 찾고 있다. 당신의 생각과 입을 막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둠 속에 뜬눈으로 새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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