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논은 장대처럼 내린 가을비에 흠뻑 젖었다. 추수를 앞두고, 벼는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를 비집고 강아지풀이 솟아올라 있었다.
논에 괴어 있는 물속엔 작은 생명체가 꿈틀거렸다. 멀리서 보면 돌멩이처럼, 가까이 보면 달팽이처럼 보였다. 60대 친환경 농업인 김필승(가명) 씨는 손으로 이 생명체를 건져올려 보여줬다.
“아마존강 왕우렁이예요. 우렁이는 벼도 먹고 풀도 먹고 다 먹어요. 얘네가 벼인지 풀인지 아나요. 그냥 막 씹어먹는 거죠.”

왕우렁이를 사용해 벼농사를 짓는 ‘왕우렁이 농법’. 이 농법은 풀을 먹는 왕우렁이 덕에 제초제를 쓰지 않고도 제초 효과를 크게 볼 수 있어 친환경 벼 재배 농가에서 선호한다. 논물의 높이를 조절해 우렁이가 잡초만 먹고 벼는 못 먹게 하는 게 관건이다. 김 씨가 기자에게 보여준 논의 크기는 6000평 정도. 드넓은 논에서 수백 마리의 왕우렁이가 일(?)하고 있다.
김 씨는 손에 있던 왕우렁이를 다시 논에 풀어주며 말했다.
“내년이면 이 땅도 농사 못 짓습니다. 올해까지 (이 논에서만) 친환경 농사 5년차인데, 땅 주인이 그것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농지를) 판다고 내놨어요.”
목소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수년 동안 화학비료도 농약도 쓰지 않으며 만든 친환경 땅에서 더 이상 농사를 못 짓게 됐으니까. 친환경 농업인 김 씨에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16일 현장을 찾았다.

김필승 씨는 경기 파주시에서 25년 동안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해온 ‘친환경 농업인’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농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임차농’이기도 하다. 그는 총 3만 평 규모의 농지에서 채소와 벼 등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이중 김 씨 소유의 농지는 4000평뿐.
김 씨는 2021년 지인에게, 앞서 살펴본 논 6000평을 빌렸다. 매년 지주에게 주는 농지 임대료는 600만 원.
같은 해 그는 해당 농지에 대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하 농관원)에서 주관하는 ‘친환경인증’을 받았다. 친환경인증은 농업생태계를 건강하게 보전하기 위해 화학자재를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을 최소화한 환경에서 생산한 친환경농축산물에 인증표시를 하는 제도다.
친환경인증 4년 차에 접어든 지난해, 그는 농관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농관원은 “지주가 ‘직불금 부정수급’ 조사 대상자”라고 설명했다.
직불금은 농가소득의 안정화를 위해 농업인에게 주는 정부보조금. 농촌진흥지역의 경우 논 6000평(2ha) 기준 면적직불금은 해마다 약 430만 원으로 추정된다. 이때 실제 농지를 경작하지 않으면서 직불금을 신청하거나 수령하는 경우를 부정수급 사례로 본다.
“알고 보니까 지주가 직불금을 약 18년 동안 타먹었더라고. 직접 농사 안 짓는데 타먹었으니까 부정수급인 거지. 농관원에서, 이 사람 땅이 3만 평 정도 되니까 약 1년을 (부정수급 여부를) 조사했다고 하더라고.“
지주는 김 씨의 농지 임대료와 부정수급한 직불금을 합쳐 해마다 약 1000만 원의 불로소득으로 번 것으로 추정된다.
현행 농지법 제6조 1항에는 “농지는 자기의 농업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자가 아니면 소유하지 못한다”고 명시돼 있다. 자경(自耕) 의무. 농지는 농사지을 사람만 가질 수 있다. 직불금은 경작자에게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지주가 실경작하지 않으면 실경작자가 직불금을 수령하는 게 원칙적으로 맞다.

이번엔 지주가 김 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러곤 황당한 요구를 했다. 친환경인증을 취소하라는 것. 직불금 부정수급 단속 과정에서 해당 농지의 실경작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게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빌려준 땅은 지주가 실경작을 안 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안 걸렸어요. 근데 나만 친환경인증을 받아놔서 실경작자가 따로 있다는 게 (행정상에서) 입증되니까 부정수령 증거가 남은 겁니다.
지주는 땅만 빌려줬지, 제가 친환경농업을 하는지는 관심 없었으니까요. 뒤늦게 알고 나서는 친환경인증을 취소해달라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땅이 볼모로 잡혔다. 지주의 요청대로 친환경인증을 취소하지 않으면, 농지 임대마저 불투명해지는 상황. 친환경 농업인들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유기토양을 만드는 데만 2~3년을 투자한다. 만약 농지 임대가 연장되지 않으면 새로운 땅을 찾아 또 다시 2~3년을 투자해 유기토양을 만드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땅을 힘들게 (유기토양으로) 만들었는데 갑자기 친환경인증을 취소해야 하니까 허탈하죠. 땅을 빌려서 농사짓는 임차농들만 힘들어지는 겁니다. 친환경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우선순위로 농지를 빌릴 수 있는 정책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결국 김 씨가 포기했다. 지주의 요청에 따라 친환경인증을 취소해줬다. 나아가, 매년 인증받은 지난 3년치(2021~2023) 친환경인증 기록마저 모두 삭제해줬다.
지주가 수년간 직불금을 부정수급 해온 사실이 행정적으로 확인되면 직불금 반환에 벌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지주는 일부 부정수급이 인정돼 직불금 약 5300만 원만 토해내는 걸로 상황이 정리됐다.
“내가 지난 3년치 친환경인증 이력을 취소해주면 지주가 벌금은 안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지인 땅이기도 하고. 나 때문에 벌금 물게 생긴 것 같으니까 미안하기도 해서 친환경인증을 취소해줬죠.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친환경인증이 취소됐는데 어떻게 농업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친환경인증 취소했으니까 (유기농으로 키웠지만) ‘관행농'(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농업 방식)으로 납품됩니다. 유기농으로 키우느라 자재비, 인건비 등으로 돈은 많이 썼는데, 유기농 납품 단가에 맞춰서 팔 수가 없는 거예요.
‘못난이 농산물’로 싸게 판매하기도 하지만, 벌레 먹거나 너무 못생긴 농산물은 아예 상품으로 못 나가요. 지금도 당근이 창고에 한 50박스 있어요. 그냥 버려야 해.”

전체 농지 면적 대비 친환경인증 농가의 비율은 2020년 기준 약 5.2% 정도.(농림축산식품부 2021~2025 <제5차 친환경농업 육성 5개년계획> 인용) 경기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에 따르면, 친환경 농업인의 약 80%가 자기 땅에서 농사짓지 못하는 임차농인 현실이다.
김진아 한살림 정책기획본부 정책기획1팀 팀장은 임차농의 친환경인증 중도포기 사례가 증가하는 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2021년 LH 농지투기 사태 이후 정부 당국에서 직불금 부정수급을 적발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조사 방식이 아닌, 농업경영체를 기준으로 다른 행정정보들을 다 통일시키는 방식으로 적발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농업경영체에 A 씨가 등록돼 있는데, 다른 행정정보에는 A 씨가 요양원에 들어가 있으면 직불금 부정수급의 근거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여러 가지 행정정보 중 하나가 친환경인증인 겁니다. 그 과정에서 애꿎게도 임차농의 친환경인증 중도포기 피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홍안나 경기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 사무처장은 친환경 농업인들이 겪는 문제를 방치하는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친환경농업을 하는 임차농들은 직불금을 아예 신청할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임차농 입장에서는 농지 임대료도, 직불금도 지주한테 다 주는 거죠. 사실 친환경인증을 받는 것도 돈이 들어가는 일이거든요. 거꾸로 말해서, 친환경농사를 안 지으면서 굳이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친환경인증을 받을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정부도 알아요. 친환경인증을 받은 홍길동 씨가 진짜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걸요. 직불금을 받는 사람이 사실은 땅만 빌려준 지주라는 걸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임차농이 겪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모른 척 눈감습니다.”

왕우렁이 농법을 살펴보고 김 씨의 농산물 출하장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김 씨는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여러 번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모두 그의 손길로 일궈낸 논밭이었다. 서로 불과 300m씩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양배추 밭1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로터리(농기계로 밭을 가는 작업) 해서 수단그라스(녹비작물) 뿌려놨어요.(기자 주 : 녹비작물은 푸른 식물체를 그대로 비료로 사용할 수 있는 작물. 한마디로 토양천연비료다. 토양에 양분과 유기물을 공급해 화학비료를 대체하는 친환경농업의 핵심요소.) 우리는 (무농약에서) 유기로 전환하려면 연작 작물을 심어야 해. 그것도 꼭 (입증) 자료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 옆에 (자투리 땅에) 양배추 두 줄 심었고요.”#콩 밭
“(차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보이는 밭도 제가 심은 겁니다. 여기는 콩.”#양배추 밭2
“친환경농업이니까 썩는 비닐을 쓰고 있어요. 일반 농업용 비닐에 비해 2~3배 비싼 편이에요. 그런데 날이 뜨거우니까 한 달 만에 썩는 비닐이 녹아버려요. 그게 또 문제더라고.“
이날 김 씨가 기자에게 보여준 논밭 필지만 총 4곳. 그런데 이 모든 농지는 그의 것이 아니다. 모두 타인에게 빌린 농지다. 그는 주인이 다른 각각의 농지를 조각조각 모아 농사를 짓고 있다. 임차농의 설움이 이곳저곳 흩어진 농지의 위치만으로 충분히 설명됐다.
그렇다면 김 씨는 왜 20년이 넘도록 친환경농업을 고수하는 걸까?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기도, 직불금 같은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그는 직접 심은 작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기도는 친환경농업의 판로가 확실하게 있어요. 학교급식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쓰잖아요. 안정적으로 납품이 가능하니까 믿고 친환경 농사를 계속하는 거죠.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비옥한 농토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기후위기 문제가 요즘 대두되는데, 친환경농업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부분에서 보탬이 될 수 있겠죠. 농사를 지으면서 기후위기를 실감하는데, 나라도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도록 작은 실천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김 씨가 이런 가치를 갖고 몇 년간 가꿔온 친환경 농지를 지주가 팔아버린다고 선언한 상황.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기자의 질문에 김 씨는 대답했다.
“나이도 있고 그래서 이참에 (농사일을) 좀 줄이려고 해요.”
손수 가꿔온 친환경 농지를 줄일 수밖에 없는 현실. 오히려 그의 대답이 덤덤해서 더 슬펐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