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냉장고를 열 때마다 성준(가명) 씨는 머릿속이 소란해졌다. 엄마가 떠나고 가장 먼저 변한 건 식탁이었다. 식단이 단출해졌다.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이 묻어나는 김치나 콩자반, 멸치볶음은 없었다. 꿈에도 보이지 않는 엄마. 이제 그 얼굴도 희미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 정도 됐는데 꿈에도 안 보이는 거예요. 누나한테는 가면서 나한테는 왜 안 오지. 한번 인생 막 살아볼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엄마가 위에서 보다가 한번 혼내주러 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엄마는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영옥 씨가 동료들과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남긴 사진 ⓒ동료 제공

고(故) 허영옥 씨는 2021년 5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발견 당시 암세포는 온몸에 퍼져 수술조차 불가능했다. 주치의는 “앞으로 1년 정도 남았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그 말처럼 영옥 씨는 11개월을 더 가족들 곁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옥 씨는 1999년 8월부터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로 출근했다. 출근길엔 함께하는 ‘단짝’이 있었다. 여덟 살 난 아들 성준이였다. 아들이 교실로 달려가면 영옥 씨는 학교 급식실로 향했다. 그는 학교에서 급식을 조리하던 조리 실무사였다.

매일이 ‘전쟁통’이었다. 점심시간은 정해져 있고, 손은 늘 부족했다. 약 900인분의 식사를 책임지는 건 영옥 씨와 다섯 명의 동료들이었다.

한창 일할 때는 힘들어할 여유도 없다. 식용유 타는 냄새가 지독하고, 연기에 눈이 맵고, 칼질하던 손목이 저리고, 무거운 집기를 들다 허리를 삐끗해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학생들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둘러앉아 남은 음식을 먹을 때 비로소 피로가 몰려왔다.

영옥 씨가 급식 조리실에서 일한 시간은 자그마치 20년. 베테랑 조리 실무사의 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2021년 4월의 가슴 통증도 여느때와 같은 통증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약이라도 처방받을까 고민했지만, 대체 인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병원 가겠다고 연차라도 쓰면 그 사람의 몫을 남은 동료들이 더 해내야 했다. 영옥 씨는 동료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학교 재량휴업일까지 기다렸다. 영옥 씨는 한 달이 지난 5월이 되어서야 포천의료원을 찾았다. 의사는 결핵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학교 급식 노동자가 기름에 튀겨 음식을 조리하고 있다. 자료사진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제공

영옥 씨는 그해 5월 20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성모병원에서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발견 당시 뼈와 뇌까지 암세포가 전이된 상황이었다. 믿기 어려웠다. 매년 건강검진을 해왔다. 보건증 발급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이상 없던 몸에 왜 갑자기 악성 종양이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평소 앓던 지병이나 가족력도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엄마한테 그날 전화가 왔어요. 결과가 많이 안 좋게 나왔다고. 근데 말을 자세히 안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누나한테 전화 걸었죠. 그랬더니 엄마가 암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아들 구성준 씨 인터뷰 25. 10. 23.)

아픈 내색도 잘 하지 않던 영옥 씨는 아들 앞에서 말을 아꼈다. 혹시 아픈 엄마 때문에 서울에서 홀로 힘들어할까 봐. 성준 씨는 엄마에게 허락된 시간이 1년이라는 말을 듣고 짐을 챙겼다. 회사를 관두고 서울에서 철원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떠났던 고향으로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선택에 후회 없어요. 지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돌이켜보면 그때 그렇게 서울에서 내려온 게 정말 잘한 일이거든요.” (구성준 씨)

성준 씨는 엄마가 아픈 원인이 급식 조리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급식실에서 밥 먹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이상한 점은 있었다. 튀긴 음식이 나오는 날은 급식실 주변에 기름 찌든 냄새가 가득했다. 

“급식실에 기름 냄새 같은 게 잘 안 빠졌던 것 같아요. 중국집 근처 가면 기름 냄새가 엄청 나잖아요. 그런 냄새가 꼭 났어요. 저희는 또 그냥 맛있게 먹고 말았지만요.”  (구성준 씨)

급식 노동자 동료들과 유니폼 입고 사진을 찍은 영옥 씨 ⓒ동료 제공

그래도 성준 씨는 급식실을 좋아했다. 밥만큼이나 엄마가 좋았다. 급식실에 가면 배식하는 엄마와 그 동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성준 씨에게 어떠한 ‘특권’ 같기도 했다. 허영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보다 식판에 음식이 푸짐했다. 그런 날이면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식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엄마 퇴근 시간보다 수업이 빨리 끝났다. 그러면 급식실에 가방을 두고 밖에서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낸다. 성준 씨가 엄마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퇴근하고 나오는 엄마가 보인다. 그 길로 같이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동료들은 영옥 씨를 ‘허 기자’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많아 먼저 다가가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자연스레 마당발이 됐다.

영옥 씨는 주말에 집에 있는 법이 거의 없었다. 산으로 꽃구경 가고, 기차 타고 여행 가고, 차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러한 취미 생활을 동료들과 즐겼다. 급식 조리실에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일만 하던 동료들. 영옥 씨에게는 이들이 아픈 손가락 같았다. 계절 바뀌는 것도 느끼면서 살아 보자고 동료들을 주말이면 밖으로 불러냈다.

“꽃 필 때면 꼭 불렀어요. ‘진달래 폈으니까 (꽃구경) 가자’, ‘단풍 들었니까 가자’. 그 언니 덕분에 그렇게 다녔어요.” (허영옥 씨 동료 A 인터뷰 2025. 10. 17.)

꽃이 피고 질 때마다 A는 영옥 씨 생각이 났다 ⓒ동료 제공

밖에서도 동료들을 생각하던 영옥 씨는 일터에서 어땠을까. 그의 또 다른 별명은 ‘허 의원’이었다. 영옥 씨는 부항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동료가 어딘가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귀신같이’ 아픈 부위를 짚었다. 그리고 낫게 하려면 부항을 떠야 한다며 직접 부항을 놓기도 했다. 영옥 씨 본인도 그만큼 아파 봤기에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의 고통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탁자 같은 데 위에 올라가서 덕트(배기통), 후드(공기 흡입구) 이런 걸 다 약품으로 닦았어요. 그러면 언니가 먼저 올라가고 그러셨어요. 뒤로 빼는 법이 없어. 일 관련돼서 절대로 뒤로 뺀 적이 없어.” (동료 B)

“우리가 오죽했으면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팔을 붙잡고 있었어요. 하지 말라고.” (동료 A)

동료들은 “그의 손을 보면 그의 삶이 보인다”고 말했다. 손이 거칠고 마디마디가 울퉁불퉁하게 부어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노동의 흔적은 영옥 씨의 온몸에서 나타났다. 허리가 좋지 않아서 다리가 ‘오(O)자’로 벌어지고, 골반이 틀어져 앞치마는 자꾸 반대로 돌아갔다. 그런 몸으로도 성실함을 잃지 않았다. 영옥 씨는 2019년 1월, 지역 교육지원청이 선정한 모범공무원이 되기도 했다.

상을 받던 날 동료들은 영옥 씨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동료 제공

그가 번 돈은 대부분 가족에게 돌아갔다. 가족들에게는 좋은 ‘브랜드 옷’을 사 줘도 제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외출할 때 화장도 하지 않았고, 미용실도 잘 가지 않았다.

영옥 씨가 자신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은 ‘사우나’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었다. 한 동료와는 ‘목욕탕 동기’였다. 주말에 아침일찍 채비하고 나가도 늘 한 발 먼저 와 있던 사람. 그마저도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엄마, 병원 죽어서 가는 데 아니야.”

성준 씨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약 먹으면 통증도 나아질 텐데, 엄마는 병원에 가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반차’를 내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지. 아빠가 병원 갈 일 있으면 반차나 연차를 턱턱 내던 사람이었으니까. 정작 엄마가 아플 때는 병원 갈 엄두도 안 내면서.

버티던 영옥 씨가 결국 수술을 받았다. 학기중에 꾹 참고 일하다가 방학이 돼서야 병원을 갔다. 그리고 어깨 수술을 받고 돌아갔다. 조리실에서 무거운 것들을 들고 나르느라 어깨를 혹사시킨 탓이었다. 의사는 한동안 휴식해야 한다고 권했지만, 영옥 씨는 개학하자마자 일터로 향했다.

급식 조리사들이 함께 타공 바구니를 옮기고 있다. 자료사진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제공

그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함께 십여 년 근무했던 동료는 “짧은 시간에 적은 인원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옥 씨는 일곱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다. 기숙사가 있는 중고등학교에서는 아침·점심·저녁 세 끼 식사를 모두 제공했다. 조식은 먼저 출근한 두 명이 맡고, 중식을 책임지는 여섯 명의 조리사는 순번에 따라 석식에도 두 명씩 배정됐다. 석식까지 담당하는 날이면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전 여덟 시에 출근하면 약 3시간 30분 동안 1000인분을 만든다. 국과 밥을 담당하는 사람은 1명씩. 그리고 나머지 동료들이 반찬을 담당했다. 누구는 재료를 손질하고, 누구는 기름에 음식을 튀기고, 누구는 소스를 만들고, 누구는 양념을 묻히고, 음식을 옮겨 담는 식이었다.

튀김 조리는 대형솥에서 이뤄진다. 이때 식용유에 많은 양의 재료를 튀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식용유 타는 냄새와 연기가 발생한다.

“튀김을 하다 보면 큰 타공 바구니로 일곱 바구니씩 튀기니까 급식실 안에는 연기가 가득 차요. 빠지기는 해도 제대로 안 빠지니까. 어떨 때는 점심도 못 먹을 정도로 속이 메슥거리고 힘들고 그래요.”(허영옥 씨 생전 인터뷰 영상, 민주노총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제작, 2024. 12. 6.)

그렇다고 볶음이나 부침 조리는 나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때는 대형솥이나 전판(전이나 구이를 부치는 대형 철판)에 직접 허리를 구부려 가며 조리한다. 음식과 조리사의 거리가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때 가스나 냄새가 직접 흡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는 업무의 특성상 냄새나 연기를 신경 쓸 겨를은 없다.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음식을 시간 맞춰 만들고 나면 학생들에게 음식을 배식한다. 배식이 끝나면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조리하고 배식이 끝난 뒤에는 청소가 남아 있다. 자료사진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제공

식판과 도구는 불림세제를 넣고 가열해서 세척한다. 영옥 씨는 이때 발생하는 냄새에 구토와 어지럼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사용한 집기와 조리실을 청소한다. 이때 세척제와 락스를 물에 풀어 사용한다. 눈이 맵고 두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이면 어느새 네 시 반. 퇴근이다.

여기는 아프다고 하면 ‘죄인’이 돼요. 하루는 채칼로 야채 손질하다가 손가락 끝이 잘려 나가서 피가 철철 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병원 잠깐 가는데, 계속 신경은 쓰이죠. 내가 없으면 내 일을 동료가 해야 되니까. 안 그래도 인원 적어서 힘든데, 더 힘들어져.”(동료 A)

한겨울에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조리실은 한여름에 ‘생지옥’이다. 유니폼이 땀에 푹 젖을 만큼 뜨겁다. 한 동료는 과로 때문에 코피를 쏟는 날들도 있었다.

동료들이 영옥 씨를 걱정했던 건 허리, 어깨, 다리, 무릎과 같은 관절이 “멀쩡하지 않아서”였다. 그 누구도 영옥 씨가 암에 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 년 전 이곳에서 일하던 동료가 폐암으로 죽었지만, 그게 조리실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 다음 이야기 <아이들 살리는 ‘밥’을 짓고… 엄마는 죽어갔다>로 이어집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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