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의 신발사이즈를 알게 된 건 그가 내 사무실을 나갈 때였다. 사무실 현관까지 배웅하는데, 누가 봐도 새로 산 것이 분명한 그의 단화가 눈에 들어왔다. 신발 발뒤축에는 ‘260mm’라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는 세상의 빛을 처음 받는 듯이 반짝거렸다.
‘외출할 때 신을 신발 한 켤레 없이 사셨구나.’
국선전담변호사와의 미팅을 위해 그는 특별히 신발까지 구매한 거였다. 그는 보복목적협박죄라는 사건의 주인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사건기록에는 그가 농기구인 쇠스랑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공소장의 한 대목이 사진 설명을 대신했다.
(자신을) 경찰에 신고한 것을 보복할 목적으로 쇠스랑을 들고 죽이겠다며 이웃을 협박했다.
피고인은 60대 초반의 남자로 경기 이천시의 농장에서 일했다. 농장 주인은 피고인의 친구였다. 그는 친구가 취미로 타는 말을 돌보고, 말이 뛰어노는 초원과 텃밭을 가꾸고, 수목을 관리하는 등 농장의 모든 일을 했다.
농장 주인은 이웃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피고인은 친구가 미워하는 이웃을 덩달아 싫어했다. 그들은 볼 때마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다. 앙숙처럼 다투던 어느 날, 피고인은 이웃의 신고로 경찰서에 다녀오게 됐다.
피고인이 쇠스랑으로 일을 하는데, 이웃이 평소처럼 피고인에게 욕설을 했다. 피고인은 화가 나 쇠스랑을 손에 쥔 채 대응했다.
“너 저번에도 내가 욕했다고 경찰에 신고했지? 너 한번 죽어볼래!”
그러자 이웃은 피고인 코앞까지 다가와 쇠스랑을 들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조롱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나의 피고인이 보복목적협박죄로 기소된 사정이다.

피고인은 억울하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기록을 보니 이상하긴 했다. 쇠스랑 협박으로 공포감을 느꼈다는 이웃은 정작 피고인 지척에서 사진 여러 장을 찍었고, 나의 피고인은 마치 스냅사진 촬영하듯 쇠스랑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국민참여재판을 준비하려면 피고인과의 상담이 필요했다. 나는 사건 기록에 적힌 피고인의 연락처로 전화했다. 농장의 주인이자 피고인의 친구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김○○(피고인)에게는 휴대폰이 없어요. 가끔씩 우리 집에 놀러 오니까 상담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면 전달하겠습니다.”
친구는 약속을 지켰는지, 피고인은 정해진 시각에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피고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나이는 60대 초반인데, 실제 모습은 80대 중반의 노인으로 보였다. 몸은 비쩍 말랐고 머리는 백발이었으며, 이는 거의 모두 빠져 음식을 어떻게 먹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충격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사건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만, 피고인은 막걸리를 마시고 와서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 속에서 사건에 관한 정보를 빼내는 일은 흡사 모래에서 금을 채취하는 과정처럼 힘겨웠다.
피고인은 젊은 시절 외국의 건설현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번 돈을 처에게 보냈지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헤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후 나의 피고인은 남동생과 생활했다. 하지만 남동생이 자살로 삶을 마감해 다시 혼자가 됐다.
피고인은 이후 충북 음성군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여동생 집 앞마당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놓고 그곳에서 기거했다. 여동생의 남편은 자주 술을 마시면 여동생과 피고인을 때렸고, 여동생은 일하지 않는 남편 대신 돈을 벌러 공장에 다녔다. 피고인은 힘 좋은 여동생 남편으로부터 맞는 게 힘들어서 10여 년 전부터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피고인은 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자신과 함께 산다는 친구 자랑을 길게 했다. 시작은 학력과 재산이었다.
“제 친구는 명문대를 나왔는데, 서울과 경기도에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어요. 친구 부인은 서울에서 대형 약국을 운영하는데, 주말에만 전원주택으로 내려옵니다. 군대에서 만난 친구인데, 중년에 귀농해서 승마와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아주 멋지게 살아요!”
피의자신문조서에는 피고인의 직업이 농장관리인으로 적혀 있었다. 그는 새벽 5시부터 말똥 치우기를 시작으로 농장의 온갖 일을 감당했다. 조서에는 이런 취지의 내용도 적혀 있었다.
“친구와 함께 산 지 10여 년 되었고 고용관계가 아니라 함께 살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것이라서 급여는 받지 않습니다.”

한눈에 봐도 이상한,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찰, 검찰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나의 피고인은 친구 자랑을 이어갔다.
“나는 기초생활수급비가 뭔지도 몰랐는데 친구가 신청해줘서 기초생활수급비도 받고 있어요! 엄청 좋은 친굽니다.”
그에게 국가로부터 얼마를 받고 있느냐고 물었다.
“친구가 통장이랑 도장을 관리해서 잘 몰라요. 암튼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돈이 꽤 있을 겁니다.”
피고인은 친구 이야기는 길게 했지만, 사건에 대해서는 횡설수설 대답했다. 그에게 술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농장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나올 수가 없어요. 아, 그냥 대강 재판해요!”
이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이라서 재판 당일 배심원들이 나오게 돼 있었다. 드라마로 멋진 변호사만 본 시민들에게 대충 일하는 국선변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날 만나기 위해 신발까지 새로 구입한 사람이 아닌가. 대충 변론하고 싶지 않았다.
“검사는 법복 입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멋있지만 전 안 그렇거든요. 대강 재판하면 멋도 없지만 사람들한테 욕도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친구 자랑은 그만하고, 그때 사건을 좀….”
술에 취한 그를 몇 번이나 달래고 설득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는 그동안 말동무가 별로 없었는지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만 길게 하면서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발사이즈를 본 건 바로 이날이었다. 어릴 적 재래시장에서 신발을 사면 항상 뒤축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딱 그 기억과 일치했다. 나의 피고인은 어렵게 잡은 다음 상담일에도 술을 마시고 왔다.
그는 몇 시 버스를 타고 돌아갈지 친구에게 미리 알려줘야 한다며 나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우리 대장한테 전화 좀 해줘. 늦게 오면 걱정해.”
친구가 대장이라니, 그는 왜 이런 호칭을 쓰는 걸까.
“군대에서 만난 친구지만, 자랑스러우니까 대장이라 부르는 거지! 군대는 누가 먼저 갔냐고? 내가 6개월 빨리 갔지. 내가 선임이야!”
군대 후임을 “대장”이라 부르는 나의 피고인,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말똥을 치우고 풀도 뽑지만 임금은 받아본 적 없다는 나의 의뢰인. 그를 대신해 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담이 이제야 끝났다고, 나의 고객을 위해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내가 직접 가보겠다고 말이다.

며칠 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경기 이천시 사건 현장으로 갔다. 피고인의 친구는 미리 나와 있었는데, 그는 실제보다 20년 늙어 보이는 나의 피고인과 반대로 20년은 젊어 보였다. 옷도 세련되게 입었는데, 외모로만 따지면 피고인과 부자지간으로 보였다.
현장에서도 내 피고인의 말은 자주 핵심에서 벗어났다.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럴 때면 친구는 종이를 돌돌 말아서 피고인을 때리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걸 확! 이 새X, 또 이런다!”
두 사람과 함께 농장을 한 바퀴 돌아봤다. 농장에는 피고인의 친구가 탄다는 말 여러 마리와 염소도 있었다. 넓은 밭, 소나무 식재장, 말이 뛰어노는 초원도 있었지만 일하는 사람은 피고인이 전부였다.
피고인은 내 앞에서도 친구를 “대장”이라고 불렀고, 친구는 내 피고인을 걸핏하면 “이 새X”, “저 새X”라고 불렀다. 10여 년을 함께 지냈다면서도, 피고인이 약간이라도 답답하게 말하면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건에는 별 관심 없이 자신이 가진 걸 자랑스럽게 설명하던 친구에게, 내가 농장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축사를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사건과 관련 없는 장소였지만 꼭 보고 싶었다. 아마도 나의 피고인이 말이나 염소와 함께 그곳에서 기거할 것만 같아서였다. 친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농기구를 보관하는 곳”이라며 축사 근처에는 접근도 못하게 막았다. 사진 촬영도 물론 불가였다.
사건 현장 확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피고인의 친구는 자신의 차로 나를 버스터미널까지 바래다줬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김○○(피고인)이 불쌍해서 전원주택에서 함께 살며 도움을 주고 있다”며, “친구와 나는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집에서 잔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길게 했다.
그는 영양상태가 무척 좋아 보였는데, 이가 없는 나의 피고인이 친구와 같은 걸 먹는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김○○ 씨는 이가 없어서 식사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데 틀니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기초생활수급비 지금 한 50만 원 남았던데… 몇 달 모아서 그 돈으로 하라 그러면 되죠.”
피고인도 모르는 기초생활수급비 통장 잔액을 피고인의 친구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내가 맡은 피고인 재판이 우선이니까.

얼마 뒤 열린 국민참여재판. 피해자는 “피고인이 예전에도 집 앞에서 욕을 한 적이 있고, 그걸 입증할 영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장의 제안으로 피해자 휴대폰 속 동영상이 재생됐다.
동영상 중반부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피고인을 누군가 욕을 하며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다. 피해자는 “피고인이 평소 신발을 신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닌다”는 말도 했다. 피고인을 때리는 사람은 내가 농장에서 만났던 피고인의 친구였다.
그날 배심원들은 전원 만장일치로 무죄 의견을 냈고,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문제의 사진 속 쇠스랑은 피고인이 협박을 위해 소지한 게 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중이어서 들었던 것이고, “죽이겠다”는 피고인의 말은 피해자가 먼저 욕설을 하며 시비를 걸어 홧김에 우발적으로 나온 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국민참여재판이 모두 끝났을 땐 늦은 밤이었다. 법원에서 경기 이천시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겼고, 피고인은 대장에게 왕복 버스비밖에 받지 못했다. 피고인은 “찜질방에서 자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애처롭게 말했다.
돈을 주면 막걸리를 사 마시고 찜질방에는 가지 않을 듯해 나는 피고인과 찜질방까지 걸어갔다. 직접 결제를 해줄 요량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별로 없었다. 들리는 건 밤길을 걷는 나의 구두 소리와 그의 새 신발이 바닥을 끄는 소리뿐이었다. 길을 걸으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왜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을 수 있는지 아세요?”
피고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대장이 월급을 안 주니까요. 선생님한테 수입이 없으니까요.”
피고인은 못 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농장을 둘러볼 때 그랬듯이, 그 역시 가슴 속에 할 말이 많은데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몇 달간 사건을 담당하면서 ‘그를 여동생 집 앞마당 컨테이너 박스로 데려다 주면, 여태 받지 못했던 급여를 받게 해주면, 그는 과연 행복할까’ 하는 고민을 여러 번 했다.
피고인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가 여동생의 불행을 보며 본인도 매질을 당하는 그 생활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가족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거나 지금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
피고인의 대장은, 피고인의 주변에서 유일하게 음지를 벗어난 존재였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고(심지어 입속의 이마저), 더 건강했으며, 멋지게 승마도 한다.

여러 번 ‘농장노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피고인에게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피고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에 대한 모욕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끝나고 얼마쯤 지났을까. 나의 피고인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대장이 나를 농장노예로 부린다고 누군가 신고해서 (대장이) 경찰서에 가게 생겼어요! 10년 치 월급 떼먹고 저를 학대했다고 누가 신고했대요. 변호사님, 우리 대장 좀 도와주세요.”
그는 “혹시, 변호사님이 신고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그가 묻지 않은 것을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대답만 했다.
“선생님을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장만큼은 도와드릴 수가 없겠네요.”
변호사로서 악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는 번뇌는 그렇게 끝났다. 악한 사람도 악이 무르익기 전에는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그 악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된다는 법구경의 이야기를 나는 오래도록 곱씹었다.
몬스테라 작가 monstera0930@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