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1500만 원 때문에 채권자와 원하지 않는 결혼까지 한다는 생각을 하면, 창문 없는 고시원 방에 다시 끌려간 것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두 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여동생과 둘이 사는 건, 어떻게 포장해도 인간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옆방에 사는 남자는 일명 ‘바바리맨’이 돼 나타났다. 그녀는 동생을 데리고 고시원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20대 후반 나이에 빚만 벌써 1억 원. 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동생을 데리고 식당 앞까지 갔다가 유리문 너머의 가격표를 보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그녀에게, 다세대주택 보증금 1500만 원은 꿈속의 돈이었다. 끙끙 앓던 그녀는 최근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를 찾아갔다.

“혹시 돈 있으면 빌려줄 수 있어요? 열심히 일해 월급 모아서 꼭 갚을게요.”

‘바바리맨’이 출몰하는 좁은 고시원. 그곳이 자매의 집이었다. 자료사진 ⓒunsplash

마음도 정도 안 가는 남자였다면 덜 참담했을까. 오히려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기에 이 말을 하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남자는 벼랑 끝에 몰린 그녀에게 보증금을 빌려줬다. 그렇게 고시원을 떠났지만, 다른 차원의 고통이 시작됐다.

남자가 사악한 사채업자처럼 군 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이 문제였다. 그녀는 남자와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빚도 청산하지 않은 채 이별을 통보하는 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깊은 밤, 그녀는 동생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난 1500만 원 때문에 담보처럼 그 남자랑 사귀는 거야.”

그 즈음 취업에 성공한 동생은 언니가 채권자에게 팔려가는 건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선지, 그야말로 영혼까지 동원한 대출로 1500만 원을 구해왔다. 그녀는 남자에게 돈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이별을 이야기했다. 남자는 크게 상심했다.

“설마 채무 때문에 그동안 저를 만난 건 아니길 바랍니다. 돈은 안 갚아도 됩니다.”

착한 남자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미련 따위를 남기고 싶지 않았고, 당연히 갚아야 할 돈이기도 했다. 그녀는 빌린 돈을 돌려주고, 새 출발을 다짐했다.

착한 남자에게 빌린 돈을 갚고, 자매는 고시원 생활의 ‘비상구’를 찾았다 ⓒ셜록

그녀가 20대 나이에 1억 원대의 빚을 떠안은 건 가정 환경 탓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기업을 다니다 명예퇴직을 했다. 아버지는 연년생인 자녀 셋의 등록금 걱정에 퇴직금을 주식에 넣었다가 몽땅 날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잘 가르치면 훗날 부자는 못 돼도 가난은 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희망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자녀 교육비를 댔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다 손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를 당하고도 자녀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려 여러 곳에 투자를 했지만 모두 망하거나 큰 손실을 보고 말았다. 자녀 셋이 공부를 마쳤을 때 집안의 빚은 아버지 혼자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이런 환경에서 첫째 딸인 그녀는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그녀가 가정 형편 탓에 꿈을 접으려 하면, 오히려 아버지가 나서서 공부를 독려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의 목표는 물려줄 재산이나, 결혼할 때 남과 같이 평범하게 해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월세방에 살더라도 학식을 심어 재산 대변하겠다는 생각을 평소 두고 살아온 거다. (…) 네가 원하는 모든 것에 항상 마음 깊이 찬사를 보낸다.”

그녀는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최대 한도인 1억 원을 몽땅 대출해 부모님의 빚부터 갚았다. 그걸로도 부족해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몇 년을 고시원에서 살며 부모님 빚을 갚아야 했다.

고시생 시절,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일부. 첫째 딸이 흔들릴 때 아버지는 계속 공부를 하도록 지지해줬다. ⓒ몬스테라

눈 밝은 독자는 살짝 눈치 챘을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그녀는’ 바로 나 몬스테라(필명)의 이야기다. 나는 처음부터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지 않았다. 변호사 초기에는 로펌에서 일했는데, 그때 내 집은 앞에서 서술한 바바리맨이 출몰하는 그 고시원이었다.

고시원에 사는 로펌 변호사. 이 경험이 운명의 연결고리가 됐을까? 법원 소속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는 지금, 나의 고객인 피고인들 상당수는 고시원에 거주하고 있다. 삶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의 마지막 보금자리, 고시원. ‘중증내상센터’와도 같은 곳이다.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는 지금, 내가 만난 피고인들 중 상당수는 고시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자료사진 ⓒpixabay

고시원에 살던 숱한 나의 피고인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50대 남성인 그는 아래위 모두 검정색 옷에 검은색 모자를 쓰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 얼굴 역시 어두웠는데, 말과 표정에서 무기력과 체념이 느껴졌다.

그는 내게는 무척 조용히 말했지만, 욱하는 성정이 있는지 일면식 없는 사람과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다 폭행죄로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고시원에 살며 일용직으로 일하던 그에겐 벌금 낼 돈이 없었다. 그는 정식재판을 청구했고, 내가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됐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의 행위에 비해 벌금 액수도 과하지 않아 재판 취하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우리같이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는요, 벌금도 징역이나 마찬가지예요!”

징역은 벌금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형벌인데, 왜 같다고 생각할까. 나의 피고인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경북의 한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의 형은 “돈을 벌어 오겠다”며 10대의 나이에 집을 나갔다. 그렇게 형과 연락은 물론 인연이 끊겼다. 나의 피고인은 평생을 어렵게 산 탓에 집 나간 형을 찾지 않았다. 그저 “형이라도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길 바랐”다.

나의 피고인이 50대가 된 어느 날 한 구치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40여 년 전 사라진 형의 근황을 알리는 전화였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당신 형이 한 마트에서 의자에 있던 타인의 가방을 훔치다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다. 돈이 없어 벌금을 못 냈고, 수배자로 살다 검거돼 벌금 대신 노역을 하는 ‘노역장 유치’를 위해 구치소에 수감됐다. 근데, 수감된 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 형의 시신이랑 유품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 알려달라.”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과거에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나의 피고인의 형 사망사건은 2018년 4월 20일 한겨레가 보도했다. 언론이 알려준 그의 형 처지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동생의 처지와 비슷했다.

‘나의 피고인’ 형의 소식을 보도한 2018년 한겨레 기사 ⓒ한겨레 보도 갈무리

동생의 바람과 달리 피고인의 형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노숙과 쪽방 생활을 오가며 살았다. 사망 직전엔 국가가 주는 기초생활수급비 월 70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형의 마지막 거처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평 남짓한 쪽방이었다.

형은 ‘폐부종을 동반한 심부전’으로 스스로 병원 응급실을 찾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으나, 돈이 없던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의사가 직접 나서 시울시에서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긴급 의료비 100만 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도록 했고, 다행히 형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형은 이후의 치료비가 부담스러워, 수술 이후 회복을 마치지 않고 병원을 떠났다. 퇴원 나흘 뒤, 형은 검거돼 구치소에 입감됐다. 그동안 벌금을 내지 않아 지명수배 중이었기 때문. 그 다음은 내 피고인이 말한 대로, 이틀 만에 구치소에서 사망했다. 국가가 세금으로 애써 살려놓은 사람이, 국가의 벌금 집행을 받다가 숨진 셈이다.

나의 피고인은 40여 년 만에 형을 시신으로 만났다. 유족으로서 시신과, 형이 구치소에 들어갈 때 영치한 돈 몇 천 원 등 소지품을 인수했다. 피고인은 허망한 죽음의 내막을 알고 절망했다.

“형이 큰 수술을 받은 상태라 국가에서 노역장에 유치하는 걸 좀 미뤄도 되는데, 무리하게 집행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형이 사망한 구치소,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했어요. 책임자가 사과라도 하는 게 맞지 않아요? 근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데요. 형도 그렇게 유령처럼 살았겠죠?”

나의 피고인은 형의 유골함을 고시원 방에 두고 산다고 했다.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이 누울 곳도 마땅치 않은데, 죽은 형을 안식하게 할 공간은 더더욱 마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노동을 하거나 거리를 배회하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면, 그를 맞이하는 건 어린 시절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간 형의 유골함이다.

그의 형은 노숙과 쪽방 생활을 오가며 살다, 구치소에서 죽고, 유골함에 담겨 동생의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자료사진 ⓒpixabay

나의 피고인은 정식 재판에서도 벌금 1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피해자와 합의를 하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애초 합의금이 있었다면 그는 나와 인연을 맺지도 않았을 거다.

선고와 동시에 나와 피고인과의 인연은 끝났다. 살면서 종종 저학력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마주하면, 상담을 위해 내 방에 들어서던 검은 옷과 어두운 얼굴의 그가 떠오른다. 그의 몸에서 풍기던 쿰쿰한 냄새, 익숙한 고시원 냄새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한 시절 나의 냄새이기도 했다.

나는 동생과 함께 고시원을 떠났지만, 형의 인생을 복사한 듯한 나의 피고인은 형의 유골과 함께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자매와 이들 형제의 운명을 가른 건,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팔 할이 운이었음을 이젠 잘 안다.

나에겐 손가락이 잘릴 뻔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교육비를 댄 아버지가 있었고, 1500만 원을 빌려주는 남자는 물론, 대출을 끌어오는 여동생도 있었다. 나에겐 운 좋게 ‘그 한 사람’이 있었지만, 나의 절대다수 피고인들에겐 불운하게도 그 한 명이 없었다. 벼랑 끝에서 무너지고 추락할 때 가까스로 손을 잡아주는 그 한 명 말이다.

하나를 덧붙이면, 나는 지금 ‘고시원의 여인’에게 1500만 원을 빌려준 그 남자와 19년째 살고 있다. 이별 뒤 다른 남자를 몇 만나봤지만, 그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은 없었다.

몬스테라 작가 monstera0930@kakao.com

TOP